강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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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沆 (1567-1618)

조선 중기의 학자, 의병장.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조선 성리학을 전한 인물이다.

1567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조선 초의 명신 강희맹으로 강항에게 강희맹은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1588년 진사시에 급제한뒤 임진왜란의 전란 중이던 159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4년 승정원의 가주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1597년 공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을 지냈다.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 영광으로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강항은 참판 이광정의 휘하에 배속되어 군량 수송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남원성 전투에 휘말리게 된다. 원균의 뻘짓(칠천량 해전)으로 벌어진 남원성 전투는 남원성이 함락되어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지는 파국을 맞았고 강항은 겨우 고향으로 도망쳤다.

영광으로 도망쳐온 강항은 왜군을 막아내기 위해 고향 사람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지만, 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전라도 일대를 휘젓고 다닌 왜군의 기세가 막강한데다 불과 100여명밖에 되지 않는 숫자로 왜군을 맞선다는 것도 무리한 일이라 결국 의병은 흩어지고 강항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의 진영으로 가려고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1597년 9월 23일, 그만 왜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명량해전이 끝난지 불과 며칠 밖에 안된 시점이었다.

강항과 가족들은 왜군에게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가는 길에 수많은 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왜군은 강항의 어린 조카가 설사를 하자 너 같은것에 줄 약은 없다면서 바다에 집어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강항은 이런 피눈물 나는 상황을 보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왜군이 가로막아 실패하게 된다.

강항과 남은 가족들은 쓰시마와 오키를 거쳐 이요의 오즈성(오늘날의 에히메현 오즈시)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지내다가 1598년에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해 오즈에서 오사카를 거쳐 교토 후시미성으로 옮겨졌다.

교토에서 강항은 여러 일본인들과 교류했는데 대표적 인물이 요시다 소준과 그의 제자 리안, 그리고 강항이 순수좌라 칭한 후지와라 세이카 등이 있었다. 특히 후지와라 세이카는 본래 선종 승려였으나 유학에 관심이 많았고 강항에게서 조선 유학을 전수받게 된다. 후에 후지와라 세이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대학을 강의하게 되는데 이전까지 일본의 유학은 당나라까지의 훈고학의 영역에 그쳐있었다가 강항을 통해 주자와 정자의 사서삼경 주해가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고 이는 에도 막부에 성리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초가 되는 사람이기 하다.

한편으로 강항은 교토에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얻은 정보를 은밀히 조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난 후 후지와라 세이카와 세이카의 주군인 다지마 성주 아카마츠 히로미츠의 도움으로 1600년 강항은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1]

귀국 후 고향에 은거해 후학을 양성하는데만 주력하다가 1618년에 사망했다. 자신이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간양록이다. 단순히 견문록 수준이 아니라 전문 정보요원의 정보수집 수준으로 일본의 속사정을 정리하여, 일본이 다시 침략해 오는 것을 방지하는데 집필 목적이 있다. 심지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래 육손이었다는 정보까지 실렸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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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의 이런 인생 역정에 따라 강항의 고향인 영광군과 강항이 포로 생활을 했던 일본 오즈시는 2001년부터 자매결연해 교류하고 있다고 하고, 오즈시 중심가에는 홍유 강항 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세워져 있다. 현창비 옆의 안내문에는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미디어에서는 MBC 사극 간양록에서 이정길이 연기했다. 조선왕조 5백년 임진왜란편에서도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했고, 임채무가 연기했다.
  1. 뱀발로 강항이 일본을 떠난 것은 4월 2일이고 부산에 도착한 것은 5월 19일로, 강항이 귀국하고 4개월 뒤에 일본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