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어 슈트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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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 Strasser / Straßer
1892~1934

1 개요

독일의 정치가. 나치당의 간부이다. 그의 아우 오토 역시 간부였으며 형이 죽은 이후에 도이칠란트를 탈출하여 반 히틀러 운동을 벌였다.

2 생애

1892년 독일 제국바이에른 왕국에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전쟁중 현지임관하여 장교로 복무하고 종전 후 전역한다.

1920년에 돌격대에서 나치당에 입당하였다. 1921년에 히틀러와 대면하게 되었다.오버바이에른 지역 나치돌격대 지휘관직을 지냈다.

1923년 뮌헨 봉기(맥주홀 폭동)에서 돌격대의 한 부대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봉기 실패 이후 재판에서 1년 반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1924년 5월에 가석방 되었다.

뮌헨 폭동 이후 1924년 6월 12일 나치당 잔당 세력과 독일 민족 자유당이 합류한 국가사회주의 자유 운동에 참가하여 국회의원에도 당선 되었다.

1925년 히틀러가 출옥하고 나치당을 재결성하기로 하자, 노동자 계층의 권익을 우선시하는 성향이라 히틀러의 명령으로 노동자계층이 많은 북독일 지역에서 나치당을 재건을 맡았고 북독일 지역에서 전권을 위임받는다.

북서독일 지역에서 나치당은 지부수가 증가하였고 세력이 강화되었다. 북서독일에서는 바이에른과는 달리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 많아 노동자 계층에 대한 지지가 필요했다. 원래 슈트라서 형제의 성향도 나치당 내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노선 분파중에 사회주의 우위 노선이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서 좌파적 성향을 띄었고, 이 때문에 나치당 베를린 지역구는 반 자본주의 사상을 강화하였으며, 이 강화 노선이 괴링과 빌헬름 프리크 뮌헨의 중앙당과의 대립을 일으키기도 했다. 히틀러는 초기에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1926년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당내 강령이 지나치게 우편향이라는 의견을 내걸고 당헌 개정을 요구했으나 나치당 주류 뮌헨에선 극히 부정적인 반응이었고 결국 당내 노선차이는 중앙당에서 그레고어의 의견은 무시되고 결국엔 히틀러의 "내가 곧 이데올로기다" 란 메시아 선언으로 마무리 되는데, 실제론 뮌헨 중앙당의 민족주의 계열이 당내에서 세력이 컸고 같은 좌파 성향이라고 여긴 북독일 베를린지역의 괴벨스 조차 지도자 원리에 복종해버렸기 때문에 당내에서 입지는 점점 약해졌다.

그러나 굴복 직후에도 히틀러에게 낯간지런 찬양사를 쓸 정도로 히틀러에게 반기를 들진 않았다. 직접 당내 강령 유인물을 직접회수하며 갈등보단 지도자에 대한 충성으로 덮어 버린 것. 석달 후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히틀러가 직접 문병하여 오랫동안 독대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며 갈등은 일단 봉합되었다.

1927년 나치식 경례가 퍼져나가는데도 일조했다. "하일 히틀러"는 '지도자에게 개인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충성의 맹세이며 지도자에 대한 깊은 사랑과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바치는 내면적 헌신이라' 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주군과 가신!

지도자와 동지들의 끈끈한 유대야 말로 귀족적이면서도 민주적인 독일의 유서깊은 전통인데 그것은 바로 나치당 구조의 본질이기도 하다. 벗들이여, 오른팔을 높이 들어 나와함께 자랑스럽게 외치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일 히틀러!"[1]

이후 나치당 선전국장을 맡으며 북독일 노동자계층에 파고들었고 나치당세는 전국적으로 정체인 가운데 1928년 역시 국회 의원에도 당선 되지만나치당 의원수는 12명에 불과할 정도. 선거엔 나치당 지지율은 오히려 더 떨어졌지만 골수분자들은 훨씬 늘어나 맥주집 폭동시절에 비하면 당원수가 두배나 늘어난 10만명에 달했다. 이런 세력은 훗날 나치당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선전국장을 사임했지만[2] 당내 업무를 총괄하는 조직국장 자리로 이임했고, 1930년경 부터 나치당이 경제 위기를 기회삼아 원내 2당이되며 정치적으로도 거물이 되었다. 가톨릭 중앙당 하인리히 브뤼닝과의 정책 연합을 시도하기도 했고, 나치당내 거물 국회 의원으로 여러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브뤼닝의 가톨릭 중앙당 뿐만 아니라 온건우파 부르주아 정당들 사이에서도 신뢰할만한 인물이란 평을 얻었다.

1932년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연정을 시도하다가[3] 히틀러의 격노를 사서 당무를 사임하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2.1 숙청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내각이 성립했다. 슈트라서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독일에 머물렀다. 당무에는 다시 복귀하지 않고 제약회사 부사장직으로 스카웃되었다가 1933년 후반 당내 좌파들을 달래기 위해 과격좌파 에른스트 룀과 더불어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러나 정계 복귀나 당내 업무는 복귀하지 않았다. 히틀러에게 찍힌데다가 당내 주류와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

1934년 6월 18일 루돌프 헤스에게 편지를 보내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2주도 지나기 전인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 당시 게슈타포에 납치되었으며, 2시간 뒤 감옥에서 사살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되었다. 동생 오토는 국외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

에른스트 룀과 패키지로 살해되고 좌파 성향이라 하지만 비롯한 당내 과격좌파와 슈트라서의 노선은 전혀 달랐다. 돌격대는 반동 척결을 주장하며 사회혁명을 부르짖은 과격 좌파였고, 슈트라서는 반자본주의 성향이나 비교적 온건한 노동자 권익 중심이었으며[4], 정치적 행보로는 우파 부르주아 정당과 연정을 주도할 정도로 유연성이 있었다. 당연히 사이도 좋지 않았고 동성애자인 점을 비꼬아 룀을 암퇘지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3 평가

"주군과 가신! 지도자와 동지들의 끈끈한 유대야말로... 독일의 유서깊은 전통인데 그것은 바로 나치당 구조의 핵이기도 하다." (1927년 그레고어 슈트라서).

나치당 내부에서 좌파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현재 기준으로 좌우 구별 스펙트럼과 거리가 멀다. 반자본주의 성향이라 좌파로 분리되긴 하는데 나치당 내 반자본주의 반공주의는 반유대주의로 결합되어있기 때문. 정신나간 일부매체에선 나치당내에서 숙청되고 좌파였다고 개념인으로 띄워주지만 아돌프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개인적 충성을 바쳤고 일종의 음모론인 반유대주의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결국 나치당 주류인 민족주의 세력과는 다른점이 많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나치이고, 히틀러 개인숭배까지는 나가지 않았지만 히틀러가 천재이며 지도자로 인정하며 대체할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철저한 인종주의자였으며, 히틀러에게 개인적인 충성심은 죽을때 까지 유지했다.

개인적인 능력으론 당내 행정을 맡아서는 탁월한 업무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 나치당 2인자는 외부에서 보기엔 괴링이 아니라 그레고어 슈트라서로 여길 정도.

그러나 정치인의 필수 능력인 연설에선 별 재능이 없었다. 나치당 베를린시당 기관지인 캄프(kampf) 출판사의 여러 출판물 주필도 맡았지만 형편없이 안 팔려서 괴벨스가 이런 약점을 발견하고 자신이 따로 출판물을 만들어 버릴 정도. 결과는 선전국장 자리도 뺏겨버리고 베를린 시당도 괴벨스에게 넘어간다.

4 동생 오토 슈트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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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오토는 형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함께 나치당 내 좌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1928년 형과 상의 없이 당내에서 사회주의를 규합하여 히틀러에게 공개적으로 우편향된 당내 질서 개편을 요구했고, 히틀러가 비밀리에 만나 갈등을 봉합하려 언론특보직을 제의하나, 히틀러와의 비밀대화를 공개하여 히틀러에게 바가지로 욕을 퍼먹었고 당내 배신자로 찍혔다. 결국 유대인 사고방식에 물든 지식인 판정을 받았고 중앙당서 축출되기전 탈당한다. 탈당시 장담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겨우 20명밖에 따르지 않았고 당내분란은 찻잔속 태풍으로 끝난다. 일부 매체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개념인 취급하는 병크 내용은 사실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아니라 오토 슈트라서가 일으킨 당내 반란내용을 잘못 알았거나 왜곡해서 전달한 것으로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오토의 돌발 행동에 매우 화를 냈고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다. 오토는 형을 포함한 타 나치당원들과는 다르게 인종주의적 성향은 상대적으로 약했었고 심지어 나치당 주류세력을 엿먹이기 위해서는 유대인(!)들과 손을 잡는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1) 또한 그는 하켄크로이츠가 아닌 검과 망치를 심볼로 애용했으며 경례구호도 하일 히틀러가 아닌 하일 도이칠란트를 사용했다.(#2)

오토는 히틀러가 집권한 후 오스트리아 및 체코로 도피하여 장검의 밤 때 살아남았고, 이후 외국을 떠돌아 다니다가(2차대전 중에는 캐나다에 머무름) 전후 독일로 돌아와(바로 돌아온 것은 아니고 1955년에야 귀국이 허용 됨) 정치활동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74년 사망) 자신이 나치 주류세력에게 밉보였던 경험을 담은 《히틀러와 나(Hitler und Ich)》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네오나치들 사이에서는 슈트라서 주의가 아직 남아있다고 한다.

5 기타

특이한 점은 하인리히 힘러를 잠시 비서로 둔적이 있다. 무능해서 짤렸다는 낭설이 있지만 슈트라서가 나치당 선전국장 시절 힘러가 튀링겐과 오버바이에른 지역에서 한지역에만 집중해서 유세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성공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힘러가 출세하게 된다. 나치당 인물중에선 괴링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앙숙이 었으며 괴벨스와는 좌파성향이던 괴벨스가 주류와 타협하자 역시 불편한 사이였으며 베를린시당에서 갈등이 잦았다. 나치당 과격좌파 에른스트 룀과도 성향이 맞지않는데 슈트라서는 노동자 권익 중심의 현실참여형 온건 성향이기 때문. 상술한대로 좌니 우니 하는 것은 상대적 성향일 뿐이고, 1920~30년대 독일기준이다.
  1. ≪히틀러 Ⅰ≫ -이언 커쇼-
  2. 후임은 당시 베를린 대관구장 요제프 괴벨스였다.
  3. 슈트라서에게 부총리와 프로이센 총독(친위 쿠데타로 인하여 중앙정부가 주정부를 직접 통치함) 노동부 장관직 등을 제안했다. 당내 국회 의원 60명정도가 따를걸로 판단했다.
  4. 단 국제 노동자 연대나 계급투쟁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나치당에서 이것은 조국과 민족이 없는 유대인식 사회주의으로 공산당을 비난하는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