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정

郤正
(? ~ 278)

1 개요

삼국시대의 촉나라의 정치가로 자는 영선(令先). 본명은 극찬(郤纂)이며, 하남군 언사현 출신이다.

삼국지연의의 일부 파본에는 각정(卻正)으로 등장한다.

2 생애

2.1 촉나라에서

조부 극검은 익주자사로 있다가 도적에게 살해당했고 부친 극읍은 맹달을 따라 위나라에 항복하여 중서령사가 된다.

어려서부터 부친이 죽고[1] 어머니가 재혼하여 혼자 외로운 생활을 했지만,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성질이 선천적으로 명예나 이익은 가볍게 보지만 문장에는 특히 마음을 기울여 사마상여, 왕포, 양웅, 반고, 부의, 장형, 채옹 등이 남긴 문장이나 사부로부터 당대의 우미한 서간과 정묘한 논설에 이르기까지, 익주에 있는 것은 찾아 연구하며 거의 전부 읽어 약관의 나이가 되자 문장을 훌륭하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궁궐로 들어가 비서사가 되었고, 영사에거 랑으로 승진하고, 령까지 올라갔다. 그 중에 맹광과는 특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극정은 궁정 안의 직책이 임명된 이후로 환관 황호와 함께 일을 처리하며 30년을 보냈다. 황호는 극정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성질이 위에서 얘기했듯 명예나 이익을 가벼이 보는 성격이었기에(…) 황호의 미움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봉록은 6백 석에 불과했지만, 황호의 참언에 의한 우환은 면했다.

연의 한정으로 황호와 다투었던 강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조언을 준 일화가 있다

황호가 유선의 곁에 붙어 정사를 좌지우지하더니, 급기야 위나라를 치러 나간 강유를 불러들이고 벼슬을 빼앗으려는 짓도 행하려 했다. 이에 강유는 곧바로 성도로 돌아와서 황호에게 따지러 갔지만, 황호는 이미 몸을 피했고 유선은 황호의 편을 들었다. 이 얘기를 극정에게 하자, 극정은 "장군에게 곧 화가 미칠 것이며, 그리 되면 촉한도 흔들리게 된다."라고 경고했다. 강유가 대책을 묻자, 극정은 이렇게 답했다.

"무후(제갈량)를 본받아 농서(?)의 고을에서 둔전(군사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함)하겠다고 하고 지방으로 가십시오. 이렇게 하면 군량을 마련하는 동시에 농서의 지방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고, 위나라 군사를 막을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군사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으니 내란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에 강유는 "천금보다 귀한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라고 사례하며 극정의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2.2 위나라에서

263년에 초주의 의견에 따라 유선이 항복할 때 극정이 등애에게 항복할 문서를 작성하였고 위나라로부터 열후에 봉해진다. 그러나 264년에 종회가 성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유선은 낙양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촉나라의 중신 중 극정과 장통만이 처자식을 버리고 유선을 따랐는데, 그 때 유선은 극정의 조언에만 의거하여 행동하니 모든 일에 잘못이 없어 감개하며 그의 능력을 이제서야 알아 그를 발탁하지 못한 것을 그제서야 후회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정사에도 서술되어있는 사마소와 유선과 술자리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사마소가 유선을 위해 옛 촉의 기(技-가무)를 짓게 하자 주위에 있는 모든 촉 출신의 사람들은 모두 슬퍼했으나 유선은 기뻐하고 웃으며 태연자약하니, 사마소는 가충에게 "사람이 무정하니 가히 이 지경에 이른 것이오! 비록 제갈량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능히 보필하여 오래 보전하지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강유라고 오래 가겠소?"라고 말했다. 가충이 이에 "이와 같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어찌 그를 아우를 수 있었겠습니까?"라며 서로 유선을 디스했다. 그 후 어느 날, 사마소가 유선에게 "촉이 생각나지 않으시오?"라고 묻자 유선은 "여기가 즐거워 촉이 생각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극정은 유선을 따로 만나서 눈물을 흘리며 간했다.

"왕(사마소)이 다음에 묻거든 흐느끼며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흑흑…맛있었다. 오늘 밥은' '선인들의 분묘가 멀리 농, 촉에 있어 마음이 서쪽을 향해있고 비감하니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시면 됩니다."

때마침 사마소가 다시 묻자 유선은 눈물을 흘리려 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어쨌든 극정이 시킨 대로 대답했다. 이미 심복을 통해 엿들었던 사마소가 "어찌 극정의 말과 같단 말이오!"라고 말하자 유선이 놀라서 쳐다보며 말했다, "참으로 존명과 같습니다." 그로 인해 좌우에서 모두 웃었다는 이야기.[2]

2.3 진나라에서

272년에는 옛날 성도가 혼란하였을 때 절의를 지켜 충성과 절개를 위배하지 않았고 임용을 받음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다해 일을 다하였다는 찬사와 함께 파서태수로 임명된다.

278년에 세상을 떠나는데 그가 저술한 시ㆍ논문ㆍ사부 등을 합하면 백개가 넘어갔다고 한다.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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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B급 문관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6/4/63/74. 병법은 쓰레기같은 투석, 조영이 전부다. 내정이나 시키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6/63/73/61에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10/4/63/75/61에 발명 특기를 가지고 있다. 성도에서 등장하는 사실 시나리오에서는 동일한 특기에 소속이 같은 윤묵과 활용이 겹친다. 하남군 출신이라 영웅집결에서는 낙양에서 등장하는데, 이 때는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삼국지 12에서는 42/23/68/75로 통솔과 무력이 대폭 상승하고 지력도 5나 상승했다. 존재감 없는 무장 대부분이 전작 능력치를 그대로 계승한 삼국지 12에서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전법은 지력상승에 특기는 경작, 감시, 냉정으로 동급 무장 중에서는 많은 편이나 경작 이외에는 유명무실하다. 일러스트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듯, 유선과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모습이다.

삼국지 13에서도 42/23/68/75의 능력치로 등장하는데, 변설이 무려 7이나 된다.
  1. 위나라에 항복한지 얼마 안 되어 죽은 듯.
  2. 다만 이것은 유선이 살기 위해서 매우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도 있다. 과거 조조가 영웅을 논할 때 번개에 놀란 척을 했던 유비와 대비시키는 것인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유선은 그 이후로 편안히 살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