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규

婁圭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누규가 누구야?
후한 말의 군웅이자 위나라의 장수. 자는 자백(子伯)으로 형주 남양군 사람이다. 밑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정사와 연의의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2 정사

위소의 오서에 의하면, 누규는 어릴 때부터 야망이 크고 호전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평소 그는 "남자가 태어났으면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한 나라를 이루어 역사에 이름을 남겨야지!" 와 같은 말을 자주하며 큰 포부를 숨김없이 밝혔으나, 그의 친구들은 이런 그를 우습게 여겨 조롱하며 비웃었다고 한다.

누규는 죄인을 숨겨주고 타군으로 도주시킨 일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밤중에 담을 뛰어넘어 탈옥하였다. 이를 알게된 관리들은 누규의 뒤를 쫓았지만, 누규는 오히려 "누규를 쫓아라"라고 외치며 이들과 한패거리인듯 위장하여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1]

그는 젊어서부터 호전적이었으며 큰 야망을 가졌고, 이를 숨기지 않았던 그의 당당한 모습과 더불어 꾀를 써 일신을 보존하였던 일화를 미루어보아 누규는 당대에 유행했던 임협이나 건달 무리에 속했을 것이다. 이후 나라가 본격적으로 혼란스러워졌던 초평 연간(190~193)부터 누규는 그가 젊은 시절에 말했던 것 처럼 무리를 모아 군벌로서 할거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그는 유표를 의지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은 왕충에 관련된 위략의 기록에서 잠시 언급되는데, 왕충은 삼보의 난[2]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인육을 먹으며 다른 무리들과 함께 남쪽으로 갔지만 누규가 형주(=유표)를 위해 이들을 맞아들이려 하자, 왕충은 이에 반발해 같이 온 무리들과 함께 누규를 공격했는데, 누규는 총 일천명의 군사들을 빼앗아 조조에게 귀부했다고 한다. 아마 195년 전후의 일일 것이다.

누규가 유표에게 의지했고, 형주(=유표)를 위해 형주 북쪽의 경계지역에서 북방의 객인들을 맞아들였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누규는 독자적인 세력이라기 보다는 유표를 따르던 형주 북방[3]의 유력자로서 관리일을 했던 것 같다. 즉, 남양군의 치안 및 거주민들의 생업을 돕고 중원에서 난을 피해 남하하는 인구들을 정착시키고 그들의 수를 조사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일을 그가 맡았던 것이다. 제갈량의 본래 고향이 서주였던 만큼 당시 강하에는 중원에서 남하한 사람들에 의하여 인구가 크게 늘어났는데, 늘어나는 인구 수는 세수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니 호구수를 조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나 그는 훗날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평소 그가 보였던 호전적인 협객의 모습과는 별개로 실무 능력이 매우 높게 평가되었는지 조조는 그를 중요한 계책을 의논하는 자리에 항상 참석시켰다. 다만 조조는 누규를 대장의 지위에 임명했으되 그에게 병사들을 인솔할 수 있는 권력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서에 반복되어 언급되어있듯, 조조는 누규의 야망을 눈치채어 그를 경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조조가 형주를 치고자 남진하였을때, 유표가 병으로 죽자 뒤를 이은 유종은 채모를 비롯한 외척의 권세에 밀려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조조의 좌우에서는 모두 이것이 속임수라고 평했지만, 누규만은 형주가 싸울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였고, 조조는 누규의 의견에 따라 유종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누규는 조조가 서진하여 마초등을 격파할 때도 여러차례 공을 세웠는데, 조조는 항상 "누자백의 계책은 나도 따라갈 수 없다" 며 탄식했다고 한다.

조만전에 따르면, 이때 누규는 추운 날씨를 이용해 모래로 둔덕을 쌓고 이것에 물을 뿌려 얼음성을 만드는 계책을 올려 하룻밤 사이에 요새를 구축하는데에 큰 공을 세웠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때가 8월이었음을 근거로 들어 이와 같은 기록을 부정했다. 따라서 이는 조조도 어렵게 여기던 책략가로서의 누규의 능력이 과장되어 당대에 떠돌던 풍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조조는 그를 우대하여 그에게 높은 봉록과 은상을 내렸다. 누규의 부유함은 상상이상이였는데, 집에 천금을 쌓아둘 정도였다고 하며, 이에 조조는 "부귀함은 나와 같으나, 다만 그 권세가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후 누규는 조조를 따라 기주로 갔는데, 위서에 따르면 그는 조조가 아들과 유람하며 노는 것을 보고 "이 집안의 부모와 자식은 저렇게 노는구나."라고 주변에 말했다. 이것을 조조에게 일러바친 자가 있어 조조는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를 처형했다.

그러나 <오서>의 기록에는 습수라는 사람이 "부자가 저렇게 노니 참 대단하구나."라고 말하자 누규가 평소 버릇을 못 버렸는지 "세상에 태어났으면 스스로 그렇게 되야하는데 그저 남을 지켜볼 뿐이라니!" 라고 탄식했다가 습수가 조조에게 그것을 말하자 주살당했다고 한다. <오서>에 따르면 야망의 일단을 드러냈다가 이를 경계한 조조에게 주살당한 것이다.

3 연의

경조 출신으로, 종남산에 숨어 살고 있는 '누자백' 또는 '몽매거사(夢梅居士)'라는 도호를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마초와의 전투에서 조조가 진채를 구축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누규가 '학 같은 모습에 소나무 같은 자태를 하고 있는 신선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조금 있으면 날씨가 추워 질 것이니 모래로 성을 쌓고 물을 뿌려두면 얼음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조조에게 간언한다.

이를 실행하여 큰 효과를 본 조조가 기뻐하며 상을 내리려고 하자, 누규는 거부하고 떠났다. 이후 그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4 미디어 믹스

4.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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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0,11
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는 지력은 항상 조조의 감탄을 샀다는 점과 얼음성의 임펙트 때문인지 꽤 높게 나오나 매력이 한자리수로 매우 낮게 나와서 그가 마땅히 죽을법한 인물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사실 야망도 높은데다 그걸 제대로 숨기지 못해 죽어 처세술이 좋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매력을 낮게 책정한 것이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다.

젊은시절 친구들의 비웃음을 산 것도 있고 그의 행적을 살펴봐도 상당히 독하고 거친 인물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지만 똑같이 젊어서 주위에서 비웃음을 사고, 사람 막 죽여대기로는 독보적이었던 조조의 행보가 인간을 뛰어넘은 초인에 가깝게 미화되고 젊은 시절의 평판은 '봉황의 뜻을 모르는 참새들' 식으로 일축되며, 심지어 보잘것 없었던 외모마저 훌륭한 미남으로 버프되어 최상위급의 매력을 받는 것과 비교했을 때, 이런 식의 평가는 심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삼국지 시리즈의 매력이 외모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미화야 당대 미의 기준이 현대와 다르기도 하고 어차피 삼국지 인물들의 얼굴을 정확히 아는 자가 지금까지 있을리도 없으니 미화라 하기도 그렇고 조조 자신의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대군이 따르지도 않았을테니 생각해보면 딱히 부당하지도 않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4/무력 19/지력 88/정치력 69/매력 8로 기술특기도 있고 군사특기도 있기 때문에 약소세력이라면 여러모로 쓸 만하다.

삼국지 11 PK 하진포위망 시나리오에서 군주로 등장하는데, 부하인 괴량, 괴월의 능력치는 꽤 좋으나 문제가 본인의 매력이 20대도 안 되니 능력연구로 매력 증가를 연구해 시급히 육성시키는 게 좋다.

삼국지 12 일러스트는 얼음성의 계책을 만들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인지 고드름을 들고 있다. 매력이 없어진 본작이라 혜택을 받은 인물. 능력치는 통솔력 52/무력 13/지력 87/정치력 67이며 전법은 잉여한 지력상승이지만 수집, 인맥 다 들고 있고 변설특기도 있어서 구인소나 외교에 제격이다. 그의 정사에서의 행보를 봤을 때 상재와 군사 특기도 부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4.2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는 누규라는 이름 때문에 더 후의 피트 타운샌드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조조가 가장 싫어하는 촐싹 천재형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위의 일러스트에도 나왔듯이, 조조의 얼음 벽돌 계획을 폄하하고 자신의 자랑거리인 얼음 성의 계책을 말하는데 조조가 "누자백의 계책은 나도 미칠 수가 없구려." 라고 말 풍선도 없이 작게 나온 다음 묻힌다.

4.3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조조전에서만 등장한다. 삼국지연의의 설명대로 선인으로 나오며 고유조형에 고유직업 선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웬 듣도 보도 못한 몽매로 나온다. 누군지 아니까 상관은 없지만 좀 아쉬운 부분.
  1. 삼국지연의의 복양 2차전에서 여포가 조조를 건드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2. 이각곽사가 장안을 점령한 뒤 그들에 의한 형편없는 통치가 중앙에서 이루어지던 도중 그들이 정치적인 주도권 다툼을 일삼아 일대가 초토화된 사건으로, 30만 가구가 넘던 경조지역의 인구가 2년 사이에 사실상 전멸했다.
  3. 누규의 고향인 남양군이 형주 북쪽 경계지역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