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노래

구스타프 말러가 9번째로 작곡한 교향곡, 또는 가곡집[1]

1 작곡 과정

대지의 노래는 1907년과 1908년의 2년에 걸쳐 작곡된 걸로 알려져있다. 말러의 비극적 터닝포인트였던 1907년에 이 작품의 작곡이 시작되었다는 걸 감안해보면 이 작품의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며(또는 체념적인) 분위기의 정체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1907년 6월 말러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감독 하인리히 콘리트로부터 지휘자 제의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1897년부터 11년 동안 이끌어오던 빈 국립 오페라극장과 계속되는 갈등에 지쳐있던 말러는 이미 5월에 사임을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결국 이 제안을 받은 말러는 6월 말, 극장측에 사임 의사를 밝혔고 이는 곧바로 수락되었다. 하지만 후임자를 물색하는데 시간이 걸렸는지, 말러는 그해 시즌이 끝날 때까지 빈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그해 여름에 말러는 어김없이 창작의 산실인 마이에르니히 별장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 해, 마이에르니히에서는 비극이 일어났다. 큰딸인 안나 마리아 말러가 성홍열에 걸린 것이다. 20세기로 넘어오긴 했지만 아직은 유아 사망률이 떨어졌다고 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말러와 알마는 어린 큰 딸을 수술까지 시켜가면서까지 살려보려 애썼지만 노력도 헛되이 7월 말, 안나 마리아는 결국 사망하고 만다. 큰 딸이 사망한 며칠 후, 말러는 심장에 이상을 느껴 마이에르니히의 의사 불루멘탈을 찾아가 진단을 받았다. 불루멘탈에게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말러는 기차를 타고 빈으로 떠나 코바치 교수에게 진찰을 받았다. 코바치 교수는 말러가 태어났을 때부터 심장의 격벽 좌우에 결함이 있다는 걸 밝혀냈다.

결국 말러는 4번 교향곡부터 8번 교향곡까지, 그리고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비롯한 수많은 가곡을 작곡했던 창작의 산실 마이에르니히 별장을 처분하고 그곳을 떠났다.[2] 남은 여름을 말러는 티롤 지방의 실루더바흐로 옮겨가 보냈다. 이때 한스 베트게의 "중국의 피리"라는 중국 고대 시인들의 시를 번역한 시집에 몰두한 말러는 이 시집을 바탕으로 대지의 노래를 작곡하게 된다.

알마는 "중국의 피리"를 얻은 건 수년 전이었다고 말했지만, "중국의 피리"가 출판된 건 1907년이었기 때문에 그 회고는 알마의 착오인 것 같다. 입수경위는 확실치는 않지만 궁정 중개인 친구 테오발트 폴락으로부터 얻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피리"의 정확한 출판시점이 불분명한 탓에 대지의 노래의 작곡 시점도 오락가락 한다. 대체적으로는 "중국의 피리"가 1907년 7월에 출판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다른 자료로는 9월까지도 출판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9월이후에 출판한 것이라면 대지의 노래의 착수시점은 이듬해인 1908년 여름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3] 결국 1908년에 착수했다면 완성시점은 1909년이 된다.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대지의 노래가 1910년에는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듬해 뮌헨에서의 연주를 약속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2 초연

결국 말러는 생전에 대지의 노래의 초연을 할 수도 없었고, 듣지도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말러가 세상을 떠난 건 1911년 5월 18일이었다. 7월에 빌렘 멩겔베르크가 이 곡을 초연하려 했지만 출판인인 에밀 헤르츠카의 개입으로 초연의 영광은 브루노 발터에게 넘어갔다. 1911년 12월(혹은 11월 20일)에 발터에 의해서 뮌헨에서 초연된 이곡의 연주회에는 말러의 젊은 추종자들이었던 베베른과 베르크도 참석했다. 이들은 순전히 이 곡을 들으려고 빈에서 뮌헨까지 달려왔을 정도였다. 브루노 발터는 마지막 곡을 지휘하다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발터는 자신이 초연했던 이 곡에 매우 깊은 애착을 가졌던 것 같다. 발터가 생전 두 번이나 녹음하고 심혈을 기울였던 곡이 바로 대지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3 논란거리

3.1 교향곡인가, 가곡집인가?

대지의 노래에서 헷갈리는 대목은 이 작품이 과연 교향곡인가, 가곡집인가 하는 부분일 것이다. 중간의 2,3,4,5번째의 노래들은 분명 가곡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곡들이다. 그러나 첫번째 곡과 마지막 곡은 가곡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규모가 크다. 첫번째 곡과 마지막 곡은 소나타 형식을 보이고 있고 두번째 곡은 느린 곡이며 세번째 곡은 스케르초를 연상시켜서 교향곡이라는 분석도 있다. 물론 전형적인 교향곡 형식이 꿰어맟추자면 4,5번째 곡은 어떻게 봐야할지는 의문이긴 하다. 말러 자신이 굳이 전형적 교향곡의 형식과 구조에 꿰맞춰서 작곡하지는 않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말러의 교향곡이 전형적이지는 않다는 걸 생각하면 이 대지의 노래는 가곡적인 교향곡, 혹은 교향적 가곡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3.2 말러가 번호를 붙이지 않은 이유

이 곡이 교향곡이라면, 왜 말러는 9번의 번호를 붙이지 않은 걸까? 일각에서는 말러가 9번 교향곡의 저주를 두려워해서 대지의 노래에 9번의 제목을 붙이는 걸 피했다고 본다. 사실 말러 자신도 '그 어떤 위대한 작곡가도 9번 교향곡을 쓴 이후 살아남지 못했다'라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베토벤, 브루크너) 말러가 1907년의 극심한 사건들을 겪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실 말러는 원래 이 곡에 "현세의 불행에 대한 노래-테너, 알토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이라는 제목을 붙이려 했었다. 나중에 이 부제는 "테너, 알토 혹은 바리톤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으로 개정되었지만, 브루노 발터에 의하면 말러는 나중까지도 저음부 솔리스트에 대해 고민했다고 전한다.

3.3 제목의 해석

대지의 노래에서 대지로 번역된 제목은 독일어 원어로는 "Erde"를 말한다. "Erde"는 영어의 "Earth"에 해당하는 단어로, 땅.대지, 지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말러의 교향곡들을 죽 따라가보면 "Erde"가 대지나 지구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지의 노래라는 제목은 얼핏 농부의 농경을 그린 것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겠지만 말러 본인의 진의는 아무래도 "현세"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곡의 원제도 "현세의 불행에 대한 노래"였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말러의 진의에 가까운 제목은 "현세의 노래" 혹은 "지상의 노래"가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데 재미있게도 말러는 4번 교향곡에서 "천국의 삶"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든 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4번 교향곡과 대지의 노래는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4번 교향곡을 감안해보면 "지상의 삶"이 이 작품의 진짜 제목일런지 모르겠다.

3.4 가사의 문제

이 곡은 앞서 말한 대로 한스 베트게의 "중국의 피리"라는 번역 시집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한스 베트게가 중국어 원문을 그대로 독일어로 번역한 건 아니다. <중국의 피리>에 담긴 시의 시대는 방대하여 19세기까지 포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19세기의 중국 시에 대해 베트게는 영어 번역 텍스트를 사용했으며, 고시(古詩)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텍스트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세 가지는 1905년에 출판된 한스 하일만의 독일판 "중국의 서정시"(Chinesische Lyrik), 1867년에 처음 출판된 주디트 고티에르의 불어판 "옥(玉)의 책"(Le livre de Jade), 1862년에 출판된 에르베이-생-드니의 불어판 당나라 시대의 시 "Poesies de l'epoque des" 등이다. 이 저자들 중 한스 하일만 또한 중국 원시를 번안한 것은 아니고 고티에르와 에르베이-생-드니의 두 불어 텍스트와 영어 번역 텍스트를 사용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중역의 중역인 셈이다.

이렇게 중역에 중역을 거쳐 탄생한 베트게의 "중국의 피리"는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어 10판까지 찍을 정도로 잘 팔렸다. 이런 히트의 배경은 역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유럽의 오리엔탈리즘, 이국정서의 유행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푸치니는 오페라 나비부인을 작곡했고[4] 라벨 또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보고들은 아시아, 아프리카의 음악들이 자신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시대에 베트게의 "중국의 피리"가 히트칠 조건은 갖춰져 있던 셈이다. 그러나 중국 원시들의 의도들과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중국의 피리"는 하이틴 로맨스 시집의 취급을 받았다.(여학생들이 열광했던 탓이었다. 귀여니?) 그랬던 이유는 역시나 베트게가 중국 문화에 무지했던 탓에 중국의 원시들을 유럽식의 서정시로 바꿔버린 탓이 클것이다.

말러를 사로 잡은 것도 중국의 원시들이나 다른 어떤 게 아닌 바로 "중국의 피리"였다. 대중들과 열정적인 문학소녀(!)들을 사로잡은 시에 말러도 매혹된 것이다. 그렇지만 말러는 절대 텍스트를 그대로 작곡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교향곡 제2번의 때를 생각해보시라) 물론 말러도 교향곡 8번의 2부에서 쓰인 괴테의 파우스트까지 맘대로 첨삭한 건 아니지만, 이 "중국의 피리"에서 고른 7개의 시들은 말러의 엄격한 첨삭과정을 거쳤다. 심지어 두 개의 시는 하나로 합쳐졌을 정도였으니까.[5]
베트게는 외부의 풍경에서 내부의 심상을 이끌어내는 한시 본연의 의도를 서양적인 어둠과 허무로 바꿔 놓았고, 말러는 이런 베트게의 시를 첨삭하면서 고통을 부각시켰다. 각 악장에 붙여진 제목들은 말러가 곡을 다 완성한 후에 붙인 듯하다.

4 곡의 구성

오케스트라 편성은 피콜로, 플루트 3, 오보에 3(3은 잉글리시 혼 겸함), Bb조 클라리넷 3, Eb조 클라리넷 3, 베이스클라리넷, 바순 3(3은 콘트라바순겸함), 호른 4, 트럼펫 3, 트롬본 3, 베이스 튜바, 팀파니, 베이스드럼, 스네어드럼, 탬버린, 심벌즈, 트라이앵글, 탐탐,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하프 2, 만돌린, 현5부, 독창자 2명(테너/알토 또는 테너/바리톤)이다.

4.1 현세의 불행에 대한 주가(酒歌) <Das Trinklied von Jammer der Erde>

이백(李白)의 시 ‘비가행 悲歌行’에 기초하고 있다. 3/4박자로 주조성은 A단조이다. 텍스트는 전체 4절이며, 이 가운데 1~2절이 제시부, 3절과 4절이 각각 발전부와 재현부에 해당한다. 내용은 간단히 말해 백 년도 못 살 삶인데 무엇하러 욕심을 부리느냐는 것이다.

호른의 호방한 팡파르에 이어 격렬하게 일그러지며 휘몰아치는 현과 금관은 장쾌하면서 동시에 강렬한 비탄을 느끼게 하며, 섬세한 전개부를 거쳐 등장하는 재현부에서는 테너와 관현악 모두 격앙된 태도로 울부짖는다.

코다에서는 호른의 팡파르가 다시 울리고 둔하면서도 단호한 트롬본의 저음이 악장을 마무리한다. 이 악장의 각 절을 마무리하는 행, ‘삶은 어둡고 죽음 역시 그러하다 Dunkel ist das Leben, ist der Tod’는 구절은 이백의 원시에서는 찾을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어두운 색채를 띠고 있는데, 말러는 특히 이 구절에 공을 들여 잊을 수 없는 효과를 이끌어냈다.

4.2 가을에 고독한 자 <Der Einsame im Herbst>

전곡을 교향곡으로 볼 경우 6악장과 더불어 느린 악장에 해당한다. 3/2박자로 D단조이다. 베트게는 원작자를 ‘Tschang-Tsi’로 표기했는데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나라 시인 전기(錢起)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의 시 가운데 이와 비슷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전기의 시로 보는 사람들은 이 가사의 원형이 '效古秋夜長(효고추야장)'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고요히 물결치는 바이올린 음형이 지배하는 A섹션과 비교적 온화하고 풍요로운 악상이 등장하는 B섹션이 교대로 이어진다. 가을날 고독 속에 슬피 울면서 눈물을 말려줄 사랑의 태양을 기다리는 남자의 탄식을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이 악장은 남성 성악가가 노래하는 게 더 실감나게 들릴 수 있다. 실내악적으로 대단히 섬세하게 짜인 악상은 매우 애상적이고 쓸쓸하게 들린다.

4.3 청춘에 대하여 <Von der Jugend>

2/2박자 B♭장조. 베트게의 시집에는 제목이 ‘도자기 정자’로 되어 있으며, 작자는 이백이라 하는데 원시는 확인할 수 없다. 시는 전체 7연이며 2-3-2로 나뉘어 3부 형식을 이룬다. 어느 한가로운 날 작은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에 모여 잡담하는 젊은이들을 묘사한 시와 전곡 가운데 가장 가볍고 산뜻한 악상이 잘 어우러진 악장이다.

4.4 아름다움에 대하여 <Von der Schönheit>

3/4박자, G장조. 역시 3부 형식을 취한다. 3악장과 마찬가지로 5음 음계가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다. 2~3악장과는 달리 베트게의 텍스트에는 많은 변경이 이루어졌는데 원작자와 원시는 일찍부터 확정되어 왔다[6]. 연못가에서 연꽃을 따는 처녀들을 묘사한 다음 말을 타고 못가로 달려온 젊은이들을 비추고 다시 연꽃 따는 처녀로 돌아간다. 여기서는 시상의 추이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악상이 흥미로우며, 음악이 C장조 알레그로로 급변하는 2부는 질주하는 말의 모습이 대단히 박진감 있게 묘사되었다. 이 대목은 지정된 템포를 준수할 경우 어지간한 성악가도 호흡 조절에 애를 먹곤 한다.

4.5 봄에 술취한 자 <Der Trunkene im Frühling>

4/4박자 A장조. 이백의 ‘춘일취기언지 春日醉起言志’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봄이 왔다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술이나 마시련다’라는 내용으로 말하자면 1악장과 마찬가지로 술 노래이다. 조바꿈이 잦고 테너가 ‘저음불가’로 일관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지만 1악장에서 화자가 인생에 대한 무상감에서 술을 마신다면 여기서는 이미 술 자체를 위해 마시는 경지가 되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조성과 각 성부의 혼란스런 교차에서 강한 술기운이 느껴지며 들뜬 악상은 쾌활하다기보다는 차라리 허세로 들린다.

4.6 고별(Der Abschied) - 무겁게

전곡 가운데 가장 긴 악장으로, 거의 30분에 걸쳐 연주된다. 이전 악장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길이이다. 이렇게 길어진 것은 원래 별개였던 두 시를 말러가 하나로 묶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숙업사산방시정대부지 宿業師山房時丁大不至'(베트게는 '친구를 기다리며'라고 옮겼다) 또 하나는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 699?~759)의 '송별 送別'(베트게는 '친구와의 이별'로 옮겼다)이다.

베트게는 이 두 시가 두 시인이 서로 주고받은 것이라고 단언했고, 말러 역시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명치 않다. 베트게가, 그리고 말러가 많은 내용을 바꾸거나 첨삭했기에 굳이 원시의 자취를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4/4박자이며 C단조로 시작해 C장조로 이행한다. 외형상 소나타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구성의 긴밀함은 1악장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5악장의 허풍스런 마무리에 이어 등장하는 호른과 더블바순의 저음, 그리고 탐탐의 무거운 울림은 음산하고 불길한 느낌마저 준다. 이어 오보에가 구슬피 노래하고, 첼로의 저음 위로 알토가 노래하기 시작한다. 워낙 긴 악장이기 때문에 악상 전개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러는 이 악장에서 각 성부 사이에 여백을 많이 둠으로써 실내악적이고 동양적인 느낌을 강조했다는 사실은 지적할 만하다. 내내 C단조로 어둡게 전개되던 악상은 영원한 대지를 찬양하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C장조로 만개한다. 하프와 첼레스타의 아르페지오가 속세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가운데 독창자가 ‘영원히’(Ewig)를 조용히 되뇌면서 곡이 끝난다.[7]
  1. 이것이 교향곡이냐, 가곡집이냐를 두고 논란이 많다. 자세한 것은 뒤에 서술
  2. 당연한 일이지만, 자식이 죽은 곳에서 맘 편하게 작곡할 정도로 말러는 비정한 인간이 절대 아니었다.
  3.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러가 출판 이전의 초고라도 받아본 게 아닌 것이라면 당연히 출판된 책을 기반으로 작곡을 했을 터이다
  4. 여담이지만 말러는 빈에서 푸치니의 오페라들을 초연한 걸로 알려졌다. 그러나 말러는 푸치니의 오페라에 대해서 "요즘은 작곡법만 배우면 누구나 오페라를 쓸 수 있나보군"이라며 비아냥 거렸다고 전한다. 푸치니가 들었다면 발끈할 소리이겠지만, 말러에게 있어서 오로지 위대한 오페라는 바그너의 오페라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긴 하다.
  5. 마지막 악장, 그것도 한 사람의 시도 아닌 두 사람(!)의 시를 합쳤다.
  6. 이백의 '채련곡 採蓮曲'
  7. 해설 출처: 네이버캐스트-오늘의 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