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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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Nilsen

"나는 내가 한 짓 때문에 잠을 못 이루거나 악몽을 꾸진 않아."

1 개요

영국 역사상 손에 꼽히는 연쇄살인마.

1945년 11월 23일생. 스코틀랜드의 한 시골에서 출생.

성향은 동성애자이며, 또한 네크로필리아로 추정되는 증세를 보였다. 15명 가량의 남성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시간#s-2하는 등 천인공노할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을 뿐이지 가히 제프리 다머[1]존 웨인 게이시에 비견할 만한 인간 백정.

군대에서 10년간 복무한 경력이 있다. 경관으로 근무하다 그만둔 후, 공공 직업 안정소의 중간 관리직이 되었다. 대인관계가 서투르고 고독하게 지내면서 위험한 망상을 키웠다. 이후 5년간에 걸쳐 15명의 남성을 살해(재판에서의 확정수는 6명)했는데 동기는 「외로우니까」였다.

해럴드 시프먼이 나타나기 전까지 영국 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범으로 기록되었다. 25년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판결받았으며 당시 나이는 38세였다.

2 일생

2.1 출생과 어린 시절

닐슨의 부친은 노르웨이 군인이었고, 모친은 스코틀랜드인으로 부모는 1942년에 결혼하여 3명의 아이를 낳았다. 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적은 없고, 데니스 닐슨 본인과 남매들은 모친의 친가에서 자랐다. 부친은 거의 찾아오지 않았고 수년 후에는 정식으로 이혼했다.

가정은 궁핍했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평온한 가정이었다. 조부모와 모친은 닐슨을 귀여워하는 한편, 종교적으로는 엄격하게 교육했다. 다만, 원리주의와 같이 과격한 사상을 가르친 흔적은 없다. 조부는 영화을 싫어했지만,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서는 그것이 이상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소년기의 닐슨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은 조부였다. 그렇기에 1951년에 조부가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을 때, 일곱 살의 닐슨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외가쪽으로 정신 장애 병력이 여러 명 있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조부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을 치르며 데니스 닐슨이 네크로필리아 증세를 처음으로 보였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그저 추측일 뿐이다.

한편 데니스 닐슨은 이후 악명높은 살인자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어린 시절에는 살인자가 될 증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연쇄살인자들이 어릴 적부터 동물을 학대하는 등 이상 행위를 보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례. 오히려 동물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등 온화한 모습만을 보였을 뿐이었다. 비둘기 을 부화시켜서 애지중지 키우기도 했는데 동물에 대한 깊은 애정은 어른이 되고 나서도 바뀌지 않았다.

2.2 청년기

중학교에 다닐 무렵, 데니스 닐슨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고 자신이 동성에게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하고 고민한 듯 하다. 15세에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61년에 16세의 나이로 육군에 입대하였다.

닐슨은 병참부대에 배속되었으며 한때 중동이나 독일 등에 주둔했던 적이 있다. 닐슨은 병참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취사병이 되어 뼈에서 고기를 발라내는 작업을 하였는데 이는 훗날 살인 행각을 벌일 때 상당히 유용한 기술이 되었다고 한다.

군대에서의 근무 태도는 성실했지만,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며 그 무렵부터 시체에 흥미가 생기는 등 슬슬 네크로필리아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즈음에 그는 몸에 흰 파우더를 바르고, 푸른 립스틱를 칠해서 스스로 시체로 분장하는 등 기행을 벌였다.

군에 입대한지 2년이 지난 후에 닐슨은 자신과 동갑인 한 사병과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닐슨과 사귀었던 애인은 닐슨이 시체에 집착하는 등 해괴한 취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대인배였는지, 혹은 취향이 이색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잠자리에서 일부러 숨을 참고 시체 흉내를 내주었다고 한다(...).[2]

이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3]」에 불만을 품고 27살이 되던 해에 육군을 퇴역(계급은 하사)하였다.

2.3 공무원이 되다

군생활을 정리한 데니스 닐슨은 경찰전직했다. 그러나 겨우 8개월 만에 경찰을 그만두게 되었다. 당시 그와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경찰 생활을 하는 중에 시체 보관실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공공 직업 안정소의 직원이 되었다. 일하는 태도는 성실해서, 얼마 가지 않아서 관리직으로 승진했으며 노동조합의 활동에도 열심히 임했다. 그의 개인적인 사상은 반전(反戰)-좌익(左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즈음부터 닐슨은 더이상 애인을 사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더이상 산 사람에게는 성적 흥미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네크로필리아 증세가 깊어졌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외로움마저 생겨나 더이상 견디기 힘들어진 닐슨은 본격적인 인간 사냥에 나섰다.

2.4 살인행각

1978년 12월 29일에 데니스 닐슨은 술집에 갔다가 스티븐 홈스라는 14세의 소년과 만나게 되었다. 닐슨은 홈스를 유혹해서 집으로 데려와 성관계를 가졌다. 요즘 같았으면 살인죄가 아닌 미성년자 성추행 행위로 종신형을 먹었을 것이다 다음날인 30일 새벽에 홈스는 일을 마치고 잠들어 있었는데, 닐슨은 홈스를 쳐다 보다가 갑자기 넥타이목을 조르고 욕조에 담긴 물에 머리를 박아 살해하였다.

닐슨은 살해한 홈스의 시신을 깨끗이 씻긴 후 그것과 다시 성관계를 가지는 등 실로 말로 못할 기이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후로도 식사를 하거나 TV를 볼 때에도 홈스의 시신과 함께 하였으며, 외출할 때에는 마룻바닥에 숨겼다.

이런 식으로 7개월이 지나 홈스의 시신이 부패하여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닐슨은 이웃 사람들이 이를 맡고는 자신을 의심할까 두려워 하였다. 시신을 정원으로 끌어내 불태웠는데, 일부러 타이어를 함께 태워서 살이 타는 악취를 감추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데니스 닐슨은 아무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았다. 데니스 닐슨은 평소에 친절한 행동을 하여 이웃들에게도 평판이 좋았으며, 더불어 외모가 준수한 축에 속했던 것도 그가 의심을 피해갈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었다. 그의 연인이 되었다가 살해당한 남성들도 그의 잘생긴 외모와 겉으로 드러난 친절하고 따뜻한 모습만을 보고 의심없이 접근했다가 무방비로 살해당한 것이다. 데니스 닐슨에게 살해당한 이들은 대개가 20대를 전후한 청년들로 체격에 있어서는 데니스 닐슨에게 무력하게 살해당할 정도로 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시작된 닐슨의 살인 행각은 1983년 1월 26일, 마지막으로 20세 청년을 살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8년에서 1983년 사이에 닐슨은 15명의 젊은 남성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시간하고 은폐하는 등 기이한 범행을 저질렀다. 그 가운데 7명은 여전히 신원이 미상이다. 이후 10월 24일에 살인 행위로 체포되어 그 만행과 죄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2.5 덜미를 잡히다

데니스 닐슨은 살인 행각을 저지르면서도 곧 단독주택에서 아파트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그의 살인 행각이 드러나게 되었다. 닐슨이 별 생각없이 시신의 조각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는데, 아파트의 하수도가 단독주택의 그 것과는 구조가 달라서 곧 버티지 못하고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드러난 것은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1983년, 막힌 하수도를 조사하러 온 배관 회사의 직원이 깊이 3.5 m의 맨홀 바닥에, 썩어서 잔해만 남은 대량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당초에 조사한 직원은 이러한 시체가 무엇이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경찰에 연락한 것은 다음날이었다.

경찰에 연락이 갈 때까지 닐슨은 시체를 정리했지만 그래도 유해 일부가 남았다. 법의학자가 감식한 결과 이것들이 인체의 일부인 것이 확인되었고 경찰은 주변의 탐문수사에 들어가 곧바로 닐슨을 지목했다. 자택을 급습하자 닐슨은 곧바로 죄를 인정했다.

방안에는 토막토막낸 남자 시체를 담은 비닐 봉투, 삶은 남자 머리 부분이 담긴 냄비, 칼질한 사체의 조각들을 어지럽게 넣은 궤짝 등이 발견되었다.

당연히 시체들은 부패했기 때문에 악취가 심했다. 시체를 늘 보아서 익숙한 백전노장의 형사들조차 몸서리쳐지는 광경에 뒷걸음질 쳤을 정도였다. 닐슨은 대량의 시체들과 함께 살면서 공공 직업 안정소의 공무원으로 성실하게 묵묵히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 수사에서 닐슨은 취조에 협력적이었다. 범행의 세부사항을 상세하게 털어놓았으며 책임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전에 살고 있던 장소에서 12명의 남자를 살해하고 절단해서 구웠다고 자백. 닐슨이 묻었다고 한 장소를 경찰이 파헤치자 8명의 남자 뼈 등이 발견되었다.

살해된 남자들은, 친척이 없는 동성애자나 노숙자들뿐이고, 행방불명 신고도 없었기 때문에 체포가 늦었었다. 닐슨은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술집에 나가 유혹해서 집에 데리고 와서, 자고 있을 때 밧줄이나 끈 등으로 교살했다. 동기는「그들이 돌아가는 게 외로워서」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마루 밑에는 가출 소년들의 사체가 묻혀 있었다.

재판중에도 협력적인 태도는 변함없었고 책임을 피하지는 않았다. 변호측, 검찰측, 양쪽 모두 정신과 의사에게 감정을 의뢰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배심원은 닐슨의 완전 책임 능력을 인정. 종신형이 확정됐다[4].
  1. 실제로 이 사람 별명 중의 하나가 "British Jeffrey Dahmer(영국판 제프리 다머)"이기도 하다.
  2. 이는 실제 네크로필리아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성욕을 해소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3. 1972년 런던에서 테러가 연발하고 있다는 빌미로 영국군이 평화롭게 시위하는 가톨릭북아일랜드 일반 시민에게 발포하여 20여 명이 사망한 사건.
  4. 여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