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역치

동북역치
東北易幟

1 개요

파일:장제스와 장쉐량.jpg
장제스장쉐량이 같이 찍은 사진.

1928년 장쭤린의 뒤를 이어 만주의 지배자가 된 장쉐량이 국민당에 형식적으로 복종함으로 장제스의 북벌을 완성시킨 사건을 말한다.

2 배경

2.1 장쭤린의 죽음과 장쉐량의 집권

장제스의 북벌 항목 참조. 펑위샹, 옌시산과 연합한 장제스의 2차 북벌에 북경을 중심으로 화북을 장악하고 있던 장쭤린은 북경을 내주고 자신의 본거지인 만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1] 그런데 만주에 대한 야욕을 불태우고 있던 관동군은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을 심양 인근 황구툰(황고둔)에서 기차를 폭파시킴으로 암살했다. 중상을 입은 장쭤린은 병원에 실려가다가 숨졌다. 우선 봉천 군벌들은 장쭤린의 죽음을 비밀로 부치고 그저 상장군이 부상을 입었다는 발표만 하였다. 관동에 있던 장쉐량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봉천으로 귀환한 다음에 6월 19일 봉천군무독판대리에 취임했다. 장쉐량은 취임하면서 난징 정부와 회담할 의사를 밝히며 당장 통일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분리독립할 뜻도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장쉐량이 우려하고 있던 것은 국민당이 화북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만주까지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거기에 장쉐량은 여러 계파로 사분오열된 국민당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국민당 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장제스를 대화 파트너로 선택하여 접촉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반일 성향이 짙은 국민 정부가 동북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일본 제국의 이권을 저해하는 행위로 간주, 장쉐량과 접촉하여 장제스와 관계를 가지지 말 것을 요구했다. 6월 25일 일본의 봉천총영사가 장쉐량을 만나 일본의 뜻을 전달했다. 6월 30일 장쉐량은 봉천독판대리에 취임, 장쭤린의 죽음을 발표한 다음에 내전의 정지, 우방과의 친목, 대내방침을 발표한 후 일본에 자신들의 방침이 친일이며 남방과 타협할 생각이 없다고 전했다. 장쉐량은 일본에 자금 지원을 대가로 일만 협력을 제의했다. 만약 일본이 4억엔의 차관을 제공한다면 만몽의 철도를 만철에 합병해주겠으며 일본과 전면적인 정치, 경제 분야의 합작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만철과 관동군은 이 제안에 매우 긍정적이었으나 다나카 수상은 4억엔이나 되는 돈을 주었다간 장쉐량이 먹튀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장쉐량은 일본에 합작 중지를 통보했다. 7월 3일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난징 국민정부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동북 3성 보안사령관의 자리를 내주었고 이에 장쉐량은 장제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장쉐량은 봉천을 찾은 국민당 인사들에게 자신이 국민당에게 복종할 뜻이 있음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치의 수단이 국민회의를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2.2 장쉐량의 딜레마

"나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동으로도 갈 수 있고 서로도 갈 수 있는데 아침에는 이쪽으로 기울고 저녁에는 저쪽으로 기운다."

장쉐량

흔히 아버지를 죽인 일본에 대한 반일 감정에 불타던 장쉐량이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는 식으로 쉽게 설명되지만 실제론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쉐량의 영지인 만주는 압록강만 건너면 바로 일본제국령 조선과 맞닿아 있었고 일본은 러일 전쟁 이래로 만몽 지역에 대한 이권 확보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었다. 인접한 열강인 일본을 그리 자극한다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만주의 여론도 분열되어 있었다. 장쉐량의 경쟁자인 만주 신파는 일본의 침략 야욕에 대항하기 위해 청천백일기를 게양함으로 국민정부에 대한 복종과 민족주의의 대세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장쉐량의 지지층인 구파는 만주의 자치를 주장하고 있었다. 솔직히 장제스와는 얼마 전까지 전쟁을 하던 사이였고 일본은 반공을 빌미로 만주의 반공 군벌들을 회유하고 있었다. 장쉐량의 입장에선 장제스를 전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대책없이 의존하는 것 역시 불안하기 그지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중국의 여론이란 청일전쟁 이래로 중국을 침탈해온 일본에 대한 적대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고 섣불리 친일 정책을 취했다간 정권에 위협이 갈 정도였다. 만약 장쉐량이 일본과 손을 잡았다간 만주는 물론 전 중국의 민중의 비난과 반발을 사는 것은 물론, 만주의 반일 인사들에게 정권을 찬탈당할 결정적 계기를 제공할 수 있었다. 고심 끝에 장쉐량은 장제스를 선택하게 되었지만 장제스라고 마냥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장제스에 대한 접근은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거기에 일본을 지지하던 만주 구파에 대한 배려 역시 동시에 진행되어야 했다.

3 장쉐량과 국민당의 접촉

일단 장쉐량은 역치 쪽으로 가닥을 잡긴 했지만 섣불리 방침을 발표하진 않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에겐 불리했다. 일본을 선택했다간 민족주의적 광풍과 남방의 대규모 반발을 부를 것이고 남방을 선택했다간 일본을 자극할 것이었다. 이에 장쉐량은 역치를 즉시 시행하지도, 그렇다고 독립도 하지 않는 방침을 결정하고 신중한 행보를 밟았다. 7월 2일 장쉐량은 장제스, 펑위샹, 엔시산, 탄옌카이, 리례쥔 등 국민당의 거물들에게 화평통전을 보냈고 국민당과 대치 중인 봉천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는 7월 6일 국민당의 최고 거물인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4인의 탕산 회담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4군장은 군사 문제와 동북 문제를 논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자극했다간 국민혁명군이 베이핑을 함락한 여세를 몰아 만주로 몰려올지도 몰랐다. 따라 장쉐량은 4군장에게 봉천의 사정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측근들을 급파, 봉천이 삼민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나 공산당, 일본과의 관계를 놓고 아직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역치를 시행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하지만 국민당에 거스르지 않는다는 표시로 산해관 안쪽의 봉천군은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탕산회의에서 4군장은 중국의 모든 군대는 중앙의 통제를 받으며 병력을 80만으로 감축, 동북 삼성 문제는 중앙의 결정에 따라 처리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장쉐량에게 국민당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장쉐량은 7월 15일에 회의를 열고 동북지방 보안위원회에게 국민당의 요구를 전달한 다음에 7월 17일에 수뇌회의를 열어 이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의했다. 만주의 수뇌부들은 중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으나 열하(러허) 성의 만주 귀속, 국민혁명군의 만주 불침을 요구했다. 이에 난징과 베이핑에서 동시에 국민당과 접촉이 시작되었다. 베이핑에선 장제스와 남북타협이 시작되었고 난징에선 동북의 사정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였다. 동북 문제에 대해선 펑위샹이 특히 강경하였는데 펑위샹은 만주의 확실한 복종을 요구하고 있었다.

4 일본의 반발

장쉐량과 남방의 접촉이 급진전되자 일본은 크게 불안해했다. 하야시 봉천 총영사가 7월 9일에 다시 장쉐량을 찾아 우려를 표했다 이에 장쉐량은 역치를 해도 국민혁명군이 산해관 쪽으로 조금 오는 것 뿐이라면서 일본을 안심시키려 하며 그간의 진정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모든 교섭 자체는 톈진을 점령한 펑위샹 일파가 북평을 떠난 후에 재개할 것이며 이후의 문제는 국민당과 차근차근 교섭을 통해 결정될 것이란 것이었다. 당시 장쉐량과 장제스의 합의는 대략 이 정도였다.

1. 만주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한다.

2. 역치는 통일의 대의에 합의한 것이지 국민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회의를 열어 결정해야 한다.

3. 열하를 봉천파에 귀속시킨다.

4. 산동군을 남군으로 개편하면 봉천군은 탕산 동쪽으로 이동한다.

허나 분치합작에 불과하다는 장쉐량의 설명에도 일본은 7월 12일 장쉐량의 남방과 어떠한 형태로든 접촉하는 것 자체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고 7월 16일 국민당의 외교정책과 일본의 이익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라면서 국민당이 만주에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경기를 했다. 일본은 남방과의 합작은 일본에 대한 반기로 알겠다고 경고했다.

5 교섭의 진전

이때 장제스도 상당히 관대한 조건으로 동북 삼성을 다시 통합하는 것에 대해서 국민당을 설득하고 있었다. 펑위샹과 국민당원들은 동북 삼성을 사실상 별개의 자치구역으로 놔두는 역치에 대해 반발했으나 장제스와 국민정부 수뇌부는 동북 삼성의 국방상의 중요성과 만주의 일본의 오래된 침략 실태를 지적하면서 동북 삼성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반대파들을 설득했다. 자칫했다간 만주가 동아시아 전체를 태울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현재 중국이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일본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방식으로 역치를 이룩하고자 했다. 7월 17일엔 장쉐량이 기자회견을 열고 남북타협이 상당히 진전되었으나 구체적인 문제가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면서 삼민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굴복하느냐 굴복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과 공존공영할 수 있을 것이란 입장을 설명했다. 장쉐량은 일본이 아니라 공산당이 중국의 적이라고 지적하며 장제스와 타협하고 일본을 안심시키려는 양다리 전략을 구사하려 했다.

6 역치의 합의

7월 중순 장제스는 동북의 대표단과 베이핑에서 회담을 가졌고 장쉐량은 7월 16일 봉천 총영사에게 역치의 결정을 통고하며 일본과의 친선관계 유지 의사를 전달했다. 장쉐량은 동북삼성의 관민이 모두 지쳐 장제스와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설명하며 만주의 주민들이 순박하며 일본과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 남방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삼민주의를 실시하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장쉐량의 방침은 7월 24일부터의 역치의 시작이었는데 장쉐량은 시범적으로 7월 19일 열하성에서만의 역치를 시행했는데 이는 열하성에 대한 봉천파의 지배를 확고히하고 역치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하야시 총영사가 다나카 수상에게 앞으로의 대응에 대해 문의하자 다나카 수상은 청천백일기와 삼민주의는 그것이 형식적인 것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다나카 수상은 자신들이 만주에 대해 너무 호의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장쉐량이 자신들을 물로 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나카 수상은 하야시 총영사에게 강경한 모습을 보며 일본의 무서움을 알게 해주라고 강경한 대응을 지시했다. 허나 장쉐량이 다시 보경안민의 정책과 난징과 일본 사이의 중립을 고수한다면 일본이 장쉐량을 지원할 것이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7월 19일 하야시 총영사가 장쉐량에게 남북타협 중지를 권고했다. 7월 20일에는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가 장쉐량을 만나 역시 남북타협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장쉐량에게 당신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으니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했는데 이는 협박이 아닌 일본의 말을 잘 들으면 일본이 장쉐량 정권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우호적 제스처에 가까웠다. 장쉐량은 남방과 일본 사이에 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역치가 자신의 뜻이 아닌 부하 장령들과 민의에 따른 것이라며 자신이 하야할 수도 있다며 일본을 설득하려 했다. 장쉐량은 7월 20일 국민당과 접촉, 일본의 압박이 너무 거세다고 어려운 사정에 대해 호소했고 7월 21일에는 장제스에게 역치를 당장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면서 직접 만나서 얘기할 것에 대해 청했다. 그리고 역치의 진행 방법에 대해 8월 8일에 열릴 5차 국민당 대회 이전에 다시 한번 사람을 보낼 것이라 말했다. 장쉐량은 이렇게 일본의 압박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이 선호하는 지도자인 자신의 하야 문제를 거론하면서 설득을 시도했고 장제스에게는 일본의 압박 문제를 내놓으며 동북 삼성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기민하게 행동했다.

장제스는 장쭤린 사망 직후의 혼란한 상황과 일본의 압박으로 인해 삼민주의 준봉, 청천백일기 게양 등이 즉시 시행하긴 어려운 문제라고 양해를 구했고 이를 장제스가 수용하면서 논의는 진전되었다. 7월 22일 양측은 역치 실행에 완전히 합의했다. 장쉐량은 동북 삼성과 열하의 통치권을 보장받았으며 동부정무위원회 주석이 되어 국민당으로부터 열하의 지배권과 동북 삼성의 자치를 보장받는다는 안건을 확실하게 처리했다.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구실로 동북과 남방의 통합은 점진주의 방침에 따라 천천히 하게 되었으나 장쉐량의 기반과 자치는 매우 안정적인 것이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일본의 압박 때문에 역치를 시행하면 아무래도 자신이 사퇴해야겠다면서 장제스를 압박했고 이를 통해 역치 시행의 연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장쉐량은 23일과 24일 양일에 걸쳐 보안위원회를 열고 역치 연기를 결정한 후 이를 하야시 총영사에게 통보했다. 장제스는 이에 역치를 포기하지 말 것을 장쉐량에게 다짐시켰고 장쉐량은 자신의 국민정부에 대한 복종 의사를 드러내며 이것이 일본 때문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7 일본의 발악

한편 다나카 내각은 민정당을 비롯하여 대중국 외교를 비판하는 내부 움직임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민정당은 다나카 내각의 중국에 대한 호전적 외교가 많은 피해를 불러오고 있으며 다나카 내각이 장쉐량의 역치를 저지하려 한 것은 일본의 외교방침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야시 총영사를 비롯한 만주의 일본인들도 장쉐량이 역치를 시행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하며 실리외교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지만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켜 괴뢰정부로 삼은 후 소련과의 완충지대로 쓰려던 다나카 내각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다나카 내각은 만주에 대한 강경한 외교 방침을 고수했다. 한편 장쉐량은 다나카 내각이 정치적 공세를 받는다는 걸 알고 다나카 내각의 붕괴를 원했고 섣부른 역치가 다나카 내각에게 힘을 실어줄 것을 걱정하여 역치를 미루는 것에 더 확신을 두었다. 하지만 역치 연기와는 별개로 국민정부와의 협상은 계속되어 7월 27일 길림성 의회에서 삼민주의와 국민정부의 외교정책을 계승한다는 방침이 발표되었다. 장제스와 바이충시는 각각 자신들의 대리인을 장쭤린의 장례식에 보냈고 장쉐량도 난징에 사람을 보내어 협상했다.

하지만 장쭤린의 장례식이 치뤄질 무렵 일본 민정당이 분열되어 국내의 반대파가 없어진 다나카 내각은 장쉐량이 남방과의 협상을 지속한다는 걸 알고 장쭤린의 장례식에 대표단을 보내 압박했다. 마침 일본은 난징 정부와의 중일통상조약 연장 문제 때문에 충돌하던 시점이라 강경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일본 대표단은 장쉐량에게 보경안민을 하면서 8월 4일부터 9일간 4차례 만남을 가지고 남방과 단절될 것을 요구했다. 하야시 총영사는 다나카 수상의 지시를 받고 장쉐량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위협하며 만주 구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권을 세울 수도 있다는 카드를 들이댔다. 8월 8일 하야시 총영사는 장쉐량에게 만약 장쉐량이 남방과 계속 접촉하면 일본이 일본의 기득 이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러한 협박에 장쉐량은 분노하여 당신이 잊은 것이 있다. 내가 중국인이란 것이다 라고 쏘았으며 자신이 중국을 본위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하야시 총영사는 밤새도록 장쉐량을 설득하려 했지만 장쉐량의 입장은 단호했으며 그는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8 역치의 단행

하야시 총영사의 회담 결렬 이후 장쉐량은 동북보안회를 소집했다. 장쉐량에게 회담의 결과를 들은 보안위원들은 모두 격분했고 역치의 실행에 찬성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의 위협에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역시 두려워하여 장제스와의 화의를 3개월 연기하기로 하였다. 8월 12일 장쉐량은 하야시 총영사에게 국민정부와의 화의결정을 3개월 미뤘다는 것을 알렸다. 장쉐량은 장제스와 일본의 모든 양보를 끌어내어 마찰없이 역치를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장제스에게선 얻어낼 걸 다 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매우 요지부동이었다. 게다가 일본 민정당이 외교문제로 탈당사건이 터져 와해되면서 일본의 내부 사정의 변혁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에 굴복하는 것은 장쉐량의 정권이 유지될 수 없는 선택지였다. 결국 장쉐량은 역치로 완전히 가닥을 잡고 일본과의 최악의 선택만은 피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남북협상은 재개되었다. 과거 장쭤린과 한편이었던 장쭝창의 직로연군이 문제가 되었다. 1928년 8월 25일 장쉐량은 총사령부 회의에서 9월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하고 장쭝창의 처분을 장제스에게 맡겼다. 장쉐량은 장쭝창을 말로 해결하여 국민당에 예속시킬 것을 청했지만 국민정부는 장쭝창을 무력으로 토벌했다. 이에 국민혁명군과 봉천군의 연합작전으로 장쭝창은 9월 23일 궤멸되었고 장쭝창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장쭝창은 직로군의 해체와 장쭝창 토벌이 삼민주의와 통일의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며 장쭝창에게도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1928년 10월 10일 국민정부는 장제스를 국민정부 주석 겸 육해공 총사령관으로 추대했고 장쉐량은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난징에서 국민정부위원 취임식을 가질 것을 요청하며 역치의 시행을 촉구했다. 장쉐량은 이를 둘다 사정이 어렵다고 거절했고 국민당 내부에선 역치도 시행하지 않은 장쉐량에게 이런 높은 자리를 주는 것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다. 장제스는 통일의 대의와 동북의 개발을 말하며 반대파를 설득했다. 한편 국민정부는 북벌 이후 장제스와 바이충시, 리쭝런, 펑위샹 등 다른 파벌들이 슬슬 알력을 벌이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데 장제스는 장쉐량을 확실히 국민정부에 복속시킴으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 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서한을 전달했다.

1. 장쉐량은 국민정부에 복종하고 국민정부 위원에 취임하며 동북 삼성에 위원제를 실시할 것.

2. 중앙정부는 장쉐량을 동북 삼성 정부위원 주석에 임명하고 기타 위원은 장쉐량의 추천에 따라 임명할 것.

3. 동북 삼성의 정치는 장쉐량의 의견을 존중하여 행할 것.

장쉐량은 자신의 동북 삼성에서의 통치권을 완전히 보장해준 장제스의 서한을 받고 크게 만족하며 동북 삼성의 위원제를 개편하고 역치 문제를 행할 것이라 표명했다. 만주에서 장쉐량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양위팅은 장쉐량이 모든 것을 해먹을 까봐 노심초사했고 장쉐량이 정부위원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크게 불만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이 위원이 되는 것은 만주 구파의 반대로 불가능했다. 장쉐량은 자신이 정부위원에 앉았다간 만주의 사정이 혼란해질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사임했다. 어쨌거나 장제스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낸 그는 다시 일본과 접촉했다. 한편 일본은 전 세계의 열강이 중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차례로 청산하는 와중에 정치, 외교적 궁지에 몰리고 있었고 이에 중국에 대한 유화적 태도로 선회하고 있었다. 일본의 정계와 언론계는 일본의 외교적 고립과 중국에서의 손해를 추론한 다나카 내각을 질타했고 전열을 정비한 민정당도 정치적 공세를 재개했다. 일본은 8월 15일 만몽 철도 문제를 재논의하기 시작했고 난징 국민정부의 존재도 인정하게 됨으로 역치를 반대할 명분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 전역의 항일 분위기는 만주에도 번졌고 민의를 따라 역치를 시행한다고 하던 장쉐량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한편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 덴노의 즉위식이 열리자[2] 실제 장쉐량은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반응을 엿봤다. 장쉐량 대표단은 다나카 수상과 접견했고 장쉐량 대표단이 역치의 실행을 다음해에 시행할 것이라 전하자 다나카 수상은 공산당을 막아야 하니 곤란하다고 하면서도 역치 자체는 중국 내정문제임을 인정하며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였다. 다나카 수상은 장쉐량에게 독립하라고 부추겼으나 장쉐량이 역치의 불가피함을 설명하자 그러면 깊이 생각해보라는 말만 하고 더 이상 압박하지 않았다. 장제스, 일본의 입장을 모두 확인한 장쉐량은 국민당 중앙과 타협하기 위해 난징에 사람을 보냈다. 타협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1929년 정월에 역치가 시행될 것이란 합의가 도출되었다. 장쉐량은 분치합작과 장쭤린에 대한 효도 등을 모두 언급하며 자신의 포부를 밝혔고 민족주의적 열풍, 동북의 현상유지란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예정대로 1929년부터 역치가 시작되었고 일본의 만몽분리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야욕은 근절된 것이 아니었으니 역치 이후 불과 2년이 지난 1931년 대사건이 터지게 된다.

9 관련항목

10 참고문헌

  1. 북경은 6월 8일에 함락되었고 장제스는 북경을 북평으로 개칭한다.
  2. 다이쇼가 죽고 쇼와가 즉위한 것은 1926년 12월 25일이다. (물론 쇼와는 그 전부터 섭정하고 있었음). 참고로 현재 아키히토도 즉위한 것은 히로히토가 죽은 1989년 1월 7일이지만, 즉위식은 1990년 11월에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