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트루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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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
(Rafael Leónidas Trujillo Molina)
생몰년1891년 10월 24일 ~ 1961년 5월 30일
출생지도미니카 산크리스토발
사망지도미니카 산토도밍고
정당도미니카당
종교가톨릭
배우자마리아 마르네티스 데 트루히요

1 개요

도미니카 공화국독재자이자 대통령. 육군사령관으로 있다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이 되어 32년간 독재정치를 폈다. 수도 재건을 비롯하여 산업의 진흥, 여러 시설의 확충 등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남미 일대에서 악명을 떨친 독재자로 현재까지도 그 악명성이 남아 있다고 한다.

2 생애

산크리스토발에서 백인+흑인의 혼혈아로 태어나 가난한 소년시절을 보내고 군대에 들어가, 1927년 육군준장이 되어 대통령 H.바스케스 밑에서 육군사령관으로 있었다.

미국은 1904년, 먼로 독트린에 따라 도미니카에서 유럽 채권단을 배제하고 미국의 절대적 지배력을 추구했다. 미국은 1916년,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도미니카를 점령해 내정 간섭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젊은 시절부터 미국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미국 해병대의 훈련을 받은 육군사령관 트루히요는 1930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 그해 대통령선거에 당선한 이래 도미니카에 독재정권을 구축하였으며 미국의 후원 아래 도미니카 민중들을 제멋대로 억압하면서 32년간에 걸친 독재 정치를 폈다. 그리고 수도 재건을 비롯하여 산업의 진흥, 여러 시설의 확충 등을 실행하였으며 1932년 국회로부터 대원수의 칭호를 받았다.

트루히요는 자신의 정당인 도미니카당을 도미니카 공화국 유일의 합법 정당으로 삼고 모든 공무원들로부터 급여의 10%를 도미니카당에 기증하도록 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1930년 대통령에 당선된 트루히요는 반체제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전면적인 테러를 실시했다. 라파엘 트루히요가 참여하기도 했었던 파울 리노가 이끄는 폭력 조직인 42단이 도미니카 내에서 온갖 테러를 자행했다, 일명 죽음의 차에 총으로 무장한 폭도들을 태우고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고 하며, 트루히요는 보다 철저한 독재를 위해 군정보부 SIM(Servicio de Inteligencia Militar)를 만들어 정보 수집과 도미니카의 야당 인물등과 자신에게 반항하는 정치인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거나 고문한 뒤 살해하였다. 또한 트루히요는 군정보부로 언론을 통제하여 재갈을 물리고 도미니카 공화국에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또한 재임 중에는 약 2~3만명의 아이티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트루히요는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도미니카 전체 농경지의 3분의 1이 트루히요 가족의 재산이었다고 하며 트루히요의 가족은 대규모 가축 농장과 토지를 소유하며 고기와 우유, 소금, 설탕, 담배, 목재사업도 독점했다고 한다. 또한 트루히요 정부는 군 복무를 거부하는 사람과 정부가 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구든 투옥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트루히요 통치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미라발 자매사건"이다 의사이자 부유했던 카브랄의 딸이었던 미네르바, 마리아 테레사, 파트리아이다의 세딸들의 운명이 트루히요에 의해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사탕수수밭에서 죽임을 당했던 사건으로 반 트루히요를 결성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처음 사건은 파티에서 트루히요와 미라발 자매 중 첫째가 만나며 시작됐다. 트루히요에게 성추행당한 첫째는 그 자리에서 트루히요의 뺨을 때렸다. 그 후 미라발의 아버지가 잡혀가 결국은 죽임을 당했고, 미라발 자매는 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반독재 투쟁을 시작한다. 그렇게 수십년간 반독재 투쟁을 하다보니 자신의 남편이 교도소에 투옥되었고 이 세 자매는 교도소에 있는 남편을 면회하고 돌아갔는데 이 세 자매는 돌아가는 중 정보부요원들에게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고 시체는 암매장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트루히요 정권의 잔악성이 폭로되었고 결국 그녀들이끝까지 싸운 결과 결국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1][2] 그래서 이러한 독재 정치와 고문 학살로 인해 도미니카 공화국하면, 바로 트루히요가 연상될 정도로 그의 독재는 아주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트루히요의 반인륜적인 독재 정치에도 반공주의 정책을 펴는 트루히요를 이용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계속해서 지원을 해주었다. 특히 일본 제국이 진주만 공습을 실시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히요는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또한 전후에는 미국을 따라 유엔의 창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친미정책으로 인해 중남미의 코스타리카, 베네수엘라와 같은 사회주의 성향의 국가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히요는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 니카라과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등의 독재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서로서로 협조했다고 한다. 1952년에는 동생 헥토르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으나 여전히 실권을 쥔 독재자로서 계속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치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막대한 재산과 이권을 독점하는 동시에 자신의 친척이나 가족들을 주요 공직에 앉히고 자신의 반대파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집권 말기에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1961년 5월 30일, 고향 산크리스토발의 농장을 달리던 도중 무장괴한의 기관총 사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3 야구

본인이 야구팬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야구를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부의 상징인 극소수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 야구팀을 만들 것을 권장해 수많은 지역 팀이 탄생했다. 이렇게 도미니카의 야구 인기와 저변이 갈수록 굳건히 자리를 잡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4 기행

  • 1936년, 수도 산토도밍고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트루히요로 개칭했다. 물론 그의 사후 다시 산토도밍고로 바뀌었다.
  • 도미니카 공화국의 최고봉인 피코 두아르테(Pico Duarte, 해발 3,098m)도 그의 통치기간 중 피코 트루히요(Pico Trujillo)로 개칭되었다.
  • 도미니카 공화국의 모든 차량 번호판에 '트루히요 만세(Viva Trujillo)'라고 적게 하고 모든 교회에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지상에 계신 트루히요님'이라는 기도를 올리게 강제했다.
  • 트루이효는 피부를 표백하고 키높이 구두를 신었으며, 나폴레옹 시대의 복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 자신의 세살 짜리 아들을 대령으로 임명했고, 그 아들이 10살이 되자 장군으로 진급시켰다.
  • 가신들의 부인이나 정부를 강간하는 일도 있었다. 공공연한 비밀처럼 행해진 일들인데, 그의 권력에 공포를 느낀 가신들은 분노하면서도 반항하거나 전말을 따지고 들 수 없었다.

5 기타

  • 트루히요는 생전에 일본을 몹시 흠모하여 국화꽃과 일본도에 심취했고, 메이지 천황을 존경했다고 했다. 그는 10대 소년 시절, 러일전쟁에서 동양의 소국이 러시아 제국을 패배시킨데 감격한 이후부터라고 일본에 열광적이 되었다고 한다.
  •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 <염소의 축제>가 트루히요 암살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 2013년 영화 독재자를 죽여라(Kill the Dictator) 가 트루히요 암살 사건을 소재로 했다.
  • 트루히요가 시행한 정책 중 훗날 도미니카에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끼친 정책이 있는데 바로 녹화사업이다. 트루히요는 환경주의자를 자칭하면서 벌목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습지대를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였으며, 국립공원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각종 댐 건설 및 도로 공사를 취소하였다. 이 녹화사업은 사실상의 후임인 호아킨 발라게르 정권에도 이어졌고 이 결과 도미니카의 산림은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이전부터 녹화사업의 중요성을 연구한 발라게르와는 달리 트루히요의 경우 환경 정책을 추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다. 순수한 개인 취향일 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1. 현재는 도미니카공화국의 200페소 화폐에 그들의 모습이 남아 있다. 또한 미라발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잘 살고 있으며, 정치권에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2. 국제연합은 미라발 자메사건을 바탕으로 결의안을 통해 11월 25일을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로 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