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4세

(루트비히 유아왕에서 넘어옴)

1 동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

893년~911년 9월 24일

별명은 유아왕으로 별명 그대로 어릴적에 단명했다. 동프랑크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으며 부왕 아르눌프의 유일한 적자 였다.899년 부왕이 죽자 겨우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바깥에선 마자르족과 데인족이 처들어오고 안에선 귀족들이 서로 권력투쟁을 하느라 나라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심해젔다.900년 8월 그의 이복 형이자 서출인 츠벤티볼트가 폭동에 휘말려 암살되자 어린 조카들을 제치고 로타링기아도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이 반발하여 제대로 통치는 하지 못하였다.

가뜩이나 몸이 안좋았던 루트비히 4세는 성장하면서 마자르족에 대한 군사원정을 벌이기도 했으나 성과는 좋지 못했고 결국 무리가 겹쳐 18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은 뒤 로타링기아는 서프랑크 왕국샤를 3세에게 넘어갔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아르눌프의 외손이자 루트비히 4세의 외조카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2 신성 로마 제국황제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루트비히 4세카를 4세

1282~1347
로마의 왕(1314.10.20~1347.10.11)
이탈리아의 왕(1327.5.31~1347.10.11)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1328~1347.10.11)
바이에른의 공작(1301~1347.10.11)
라인의 궁중백(1319~1329)
브란덴부르크 변경백(1320~1323)
에노·홈란트·젤란트의 백작(1345~1347)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으로서 최초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교황으로부터 독립된 독자적인 황제선출권을 수호, 이를 이용 자신의 지위를 굳히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제위기간 내내 끊임없는 외교·군사 분쟁을 벌였다.

2.1 초기생애

라인 궁중백이자 상 바이에른 공작이였던 루트비히 2세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자 루돌프 1세의 딸인 메히틸트의 차남으로 이마 성년이였던 형 루돌프가 있었기에 계승권이 없었다. 1294년 부친의 사망후 모친과 형의 보호를 받았으나 독일 왕위 선출에 위한 정치 암투에 휘말렸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는 나사우의 아돌프였으나 전 독일왕이였던 루돌프의 아들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와 대립하는 중이였다.

당시 라인 궁중백이자 상 바이에른의 공작이였던 루돌프는 나사우의 아돌프의 딸 마틸데와 결혼한 계기로 편을 들었고 어머니였던 메히틸트는 자신의 동생인 알브레히트 공작을 지지했고 차남이였던 루트비히를 묀헨에 멀리 떨어진 오스트리아 의 자리잡은 동생의 궁전으로 보내졌고 루트비히는 외삼촌의 궁전에서 외사촌들인 프리드리히·레오폴트와 함께 자라났다. 훗날 그가 황제로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친인척들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하지만 그의 어릴적 성장환경은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1298년 7월 2일 쾰하임에서 알브레히트가 나사우의 아돌프에게 승리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정치에서 그의 형 루돌프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루트비히는 법적으로 자신의 것이지만 그간 형의 방해로 갖지 못했던 정부 내의 직책을 얻었다. 이후 1308년 외삼촌 알브레히트 1세가 영지 문제로 조카인 슈바벤의 요한에게 암살당하면서 형 루돌프와 다시 충돌하였으나 1년뒤 영토를 분할하면서 잠시나마 화해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하바이에른의 사촌들에 대한 후견인 자격을 내세워 분할 협상을 유리하게 타결지을 수 있었으나 하바이에른이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와 반목적인 관계였기에 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분쟁이 일어났다. 1313년 6월 다시 한번 형 루돌프와 타협을 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해 8월 황제 하인리히 7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같은해인 11월 9일에 가멜스도르프에서 합스부르크 가를 패퇴시켰다.

그뒤 그는 하인리히 7세의 사망후 비어버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에 관심을 돌렸다. 그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나 제위는 독일왕이나 황제가 봉어한다면 백작 이상급의 영주들이 후보로 나서 유력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실재로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와 나사우의 아돌프 또한 백작위를 지녔던 인물들이었다. 비록 대공위 기간 이전까지 몇몇 유력 가문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제위를 차지하였으나 가계가 단절될 시에 다시 제후들에 위해 선출되었다. 일단 루트비히 당시에는 백작위를 지닌 영주들은 더 이상 후보 자격에 들지 못했으며 대신 합스부르크 가문과 룩셈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두고 다투고 있는 실정이었다.

허나 1314년 루트비히는 형인 루돌프를 제치고 전대 황제의 아들이자 보헤미아 국왕이였던 룩셈부르크의 요한을 제치고 후보가 되어 외사촌인 프리드리히와 경쟁하게 된다. 1313년에 있던 하바이에른에서의 분쟁에서 패한 합스부르크 가는 루트비히에게 큰 원한을 가져기에 거센 반대를 받았다. 그해 10월 루트비히는 외조부의 난적이었던 마인츠의 대주교 페터 폰 아스펠트의 선동 덕택에 아스펠트를 포함해 트리어 대주교 발두인, 합법적인 보헤미아의 왕이였던 요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 작센의 계승권을 두고 경쟁하던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요한 2세 등을 5개의 표를 얻었다.

경쟁자인 프리드리히 또한 이미 폐위당한 전 보헤미아 국왕이였던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 쾰른 대주교 하인리히 2세, 루트비히의 형인 라인 궁중백 루돌프, 자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 등에게서 총 4개 표를 얻어 근소한 차에 낙선하고 말았다.

허나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했다. 루트비히는 페테 폰 아스펠트의 도움으로 재빨리 아헨에서 독일왕으로 즉위하였으나 프리드리히 또한 하인리히 2세의 도움으로 쾰른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사실상 대립왕이 되었다. 두 왕은 장작 7년 동안의 분쟁을 치루었다.

2.2 합스부르크 가와 교황과의 대립, 그리고 가문 통합

1317년 루트비히는 3년전 경쟁자이자 외사촌인 프리드리히에게 표를 던진 형 루돌프에게 정치적인 보복으로 상바이에른과 라인 강변의 팔츠 지방의 지배권을 물수했다. 이에 다시 한번 두 형제간에 분쟁이 일어나 1319년 루돌프와 1323년 형수인 나사우의 마틸데, 1327년 조카이자 루돌프의 장남 아돌프가 사망하기까지 계속되었다.

1320년 뒤늦게 자신에게 표를 던져준 보헤미아의 국왕 얀에게 상라우지츠를 내주었다. 허나 이듬해 얀은 자기 가문의 여자를 루트비히의 사촌인 하바이에른 공작 대 하인리히와 결혼시키고 방계 친척으로 통해 에게클란트를 얻었지만 만족하지 않아 결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이는 프랑스 영향력 아래에 있던 아비뇽의 교황조차 점차 루트비히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322년 9월 22일 루트비히는 뮐도르프 전투에서 승리, 대립왕인 미남왕 프리드리히를 포로로 붙잡아 가장 긴박했던 문제인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분쟁을 대거 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허나 당시의 교황이였던 요하네스 22세는 교황으로서 이 분쟁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황제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려 루트비히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년후인 1323년 4월 4년전에 후계없이 죽어 그동안 미결정 상태로 놔둔 브란덴부르크의 발데마르의 영지의 지배권을 아직 미성년자였던 큰 아들 루트비히에게 과감하게 넘겨주었고 그외에도 비텔스바흐 가의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으로 마이센과 튀링겐을 통치하던 베틴 가문과 세습 동맹을 맺으면서 점차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1324년 2월 홈란드의 마르가레테와 두번째 결혼을 했다.

2.3 제국의 특권

루트비히 4세는 튜튼기사단의 보호자였다. 1337년 그는 리투아니아러시아를 정복할 특권이 있는 튜튼 칙령을 수여했다. 그러나 칙령은 세 곳의 작은 영토에서만 청원되었다. 다음에 루트비히는 외국 군주들이 영토 분쟁으로 외국 법정에서 재판을 하기 전에 칙령을 금했다.

또 루트비히는 제국 도시들의 경제 개발에 힘을 집중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그가 인정한 특권 때문에 많은 도시 연대기에서 찾을 수 있다. 1330년에는 프랑크푸르트와 뤼벡이 한자 동맹의 가장 강력한 멤버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뤼벡은 제국에서 굴덴 금화의 화폐 주조와 화폐 발행의 특권을 가진 첫 도시들이 되었다.

1342년에 그는 티롤을 획득했다. 티롤의 마르가레테와 요한 하인리히의 첫 결혼을 공허하게 만들고 마르가레테를 자신의 아들인 루트비히 5세와 결혼하게 하여 룩셈부르크 가문을 훨씬 더 소외시키기 위해서였다. 1345년에 루트비히는 에노, 홀란트, 젤란트와 프리슬란트를 아내인 홀란드의 마가렛에게 주었다. 이것은 제후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마가렛의 자매들이 가진 세습 군주국들은 영국의 왕비인 에노의 필립파에 의해 무시되었다. 룩셈부르크의 위험한 적들 때문에 루트비히는 그의 힘을 무자비하게 증가시켰다.

2.4 룩셈부르크 가와의 대립, 죽음

1346년 여름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지원으로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가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제국 자유도시들의 지원과 기사들을 얻어 카를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또한 합스부르크의 공작은 루트비히에게 계속 충성했다. 크레시 전투에서 카를의 아버지인 룩셈부르크의 요한이 사망하고 카를 역시 전투에 참여했으나 탈출에 성공했다.

1347년 10월 루트비히 4세는 묀헨에서 곰사냥을 하던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뮌헨 부근의 프라우엔 성당에 매장되었다. 루트비히의 아들들은 카를에 맞서는 대립왕으로 귄터 폰 슈바르츠부르크를 지원했다. 그러나 귄터가 1349년에 사망하고 룩셈부르크 가가 황제 자리를 탈취하자 다시 비텔스바흐 가문의 소유물은 아들들끼리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3 팔츠 선제후

생애 : 1424~1449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의 아들이다.4번 항목과는 관계가 없다.

4 헤센 대공국의 군주이자 니콜라이 2세의 장인어른

1837년 ~ 1892년

헤센 대공국의 군주 루트비히 3세의 아들, 3번 항목과는 당연히 관계가 없다. 독일 소왕국 출신의 이 양반이 그렇게 유명한 이유는,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과 앨리스 공주와의 8남매 중 4녀가 바로 그 유명한 러시아 제국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였던 것이다.

덧붙여, 장녀 빅토리아(1863~1950)는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그녀의 당숙이다!)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는데, 큰딸 앨리스(1885~1969)가 필립 공의 어머니이고, 둘째 아들이자 막내인 루이스(1900~1979)가 바로 2차대전 당시 해군 제독이자 IRA의 폭탄테러로 사망한 마운트배튼 백작이다. (그래서 훗날 로마노프 왕조 일가 유해가 발굴되었을때 대조를 위해 필립공의 DNA가 제출될 수 있었던 것.)
차녀 엘리자베트(1864~1918)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생인 세르게이 대공(1859~1905)과 결혼했으나,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고 남편은 1905년에 혁명가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수도원에서 자선봉사를 하며 지내다가 러시아 혁명 와중인 1918년에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했다.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20세기의 순교자 10인 조각상" 중 한명이기도 하다.

루트비히 4세가 재위한 헤센 대공국은 독일 제국에 소속되어 있었고,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1세빌헬름 2세가 넘사벽이어서 다소 묻히는 경우가 있긴 한데, 그래도 알렉산드라가 전세계급 인기의 로열 베이비를 낳아서 유명해지는 바람에 사후에 유명해졌다.

1878년 아내 앨리스를 잃었을 때 상실감이 꽤 컸고, 1892년 자신마저 알렉산드라가 결혼하기 전에 죽으면서 결국 딸의 결혼식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루트비히 4세가 죽었던 1892년에는 안습의 절정을 보여준 조카가 죽었던 해였다. 앨버트 왕자가 사실 생전에 사촌 알렉산드라를 사랑했는데, 알렉산드라는 이미 정해 둔 임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