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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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 Down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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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의 종결을 위해 미군이 구상했던 대규모 일본 열도 공격 작전. 하지만 결국 원자폭탄 투하만주 작전 등으로 인하여 일본이 항복하자 백지화됐고, 일본 점령 작전인 블랙리스트 작전으로 교체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언어로 만들 생각으로 짠 작전.

2 상세

올림픽, 코로셋 작전으로 구성된 본 작전은 일본을 말 그대로 몰락시키기 위해 준비되었다.

동원되는 총 병력은 육해공 총합 1,074,600명 정도이다. 오버로드 작전 이상의 규모. 미국바그라티온 작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상륙전&해상원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생각하면 지상전이었던 바그라티온 작전과는 스케일의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쉬운 예를 들면 북한군의 입장에서는 백령도에 10,000명 상륙시키는 것보다 제주도에 100명 상륙시키고 유지시키는 것이 훨씬 어렵다(물론 제주도가 텅 빈 섬이라고 가정하고). 상륙수송도, 상륙전도 엄청나게 어렵지만 그 후의 병력/군수유지는 훨씬 어렵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 자체가 천조국의 위엄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존의 전략전술을 무시하는, 미국만이 가능한 작전.

2.1 핵폭격

상륙전에 앞서서 미군은 핵폭격으로 일본군의 방어선을 증발시켜버릴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나가사키 핵폭격 직후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은 공병대의 존 헐(John E. Hull) 중장에게 핵폭탄 준비에 대한 보고를 명령했고, 이에 존 헐 중장은 핵무기 책임자이던 라일 시먼(Lyle. E. Seeman) 대령에게 핵폭격 준비 상황을 묻는 전화를 걸었다. 이 통화에서 라일 시먼 대령은 몰락작전 직전까지 최대 7개의 핵폭탄을 준비할 수 있고, 투하 계획과 그 적당한 날짜에 대한 견해 그리고 핵무기 투하 후에는 될 수 있으면 6일 이상 아무리 빨라도 3일은 지나서 상륙 작전을 시작하고, 핵폭격 48시간 전까지는 어떤 병력도 핵폭격 지점에 들어가지 말 것을 권고한 상세한 메뉴얼도 준비된 상태였다. (출처)

2.2 올림픽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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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 남부의 일본군 배치와 미군의 상륙 예정지.

올림픽 작전(Operation Olympic)은 1945년 11월 1일에 큐슈 남부에 14개 사단 250,000명의 보병과 90,000명의 해병대, 지원을 위한 항공모함 42척을 시작으로 전함 24척, 400척 이상의 구축함, 수천 대의 상륙정, 그리고 약 2000기의 항공기를 동원하는 작전이었다.

  • 45년 8월 기준 현역 전함이 23척이고, 아이오와급 5번함 일리노이, 6번함 켄터키가 건조 중이었다. 5번함 일리노이는 건조공정이 늦어 코로넷 작전까지 투입도 불가하고, 켄터키는 총력을 다하면 올림픽은 몰라도 코로넷 작전시에는 투입이 가능할듯 말듯 하다.
  • 미국 외 연합군측 전력인 영국 해군의 종전 기준 전함 전력은 총 11척+1척(순양전함)이다.
  • 이외에 리벤지급 전함 4척이 있으나 3척은 전쟁 중 예비역으로 편입, 1척은 소련에 대여되었고, 아이언 듀크급 전함 1척이 있긴 하지만 역시 지나치게 노후화되어 훈련함으로 쓰이는 중이었다.
  • 뱅가드의 경우 전후인 1946년 8월에 취역했기에 올림픽은 물론, 코로넷 작전도 참여할 수 없다,
  • 단, 영국의 경우 45년 하반기부터 싱가포르 탈환을 목적으로 하는 단독 공세(Operation Zipper)를 계획했기에 보유 전함을 모두 일본 본토 상륙전에 투입할 수 없다.
  • 미군 단독으로 전함 24척 동원은 예비전력 없이 모든 것을 퍼붓는 것으로 가능은 하지만 무리한 일이며, 동맹국 영국 해군의 지원을 감안할 경우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큐슈 남부를 점령하는 것으로 작전은 종료되는데, 이 작전은 코로넷 작전(후술)에 동원될 공군의 기지 확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주요 목표는 가고시마 만과 비행장 건설에 용이한 미야자키 평야 일대로, 이를 신속히 탈취하기 위해서 미야자키 해안에 미 제1군단(육군 제25/33/41보병사단)을 필두로 제11군단(제43보병사단, 제1기병사단, 아메리칼 사단(Americal Div)), 그리고 일본 육군의 강한 반격이 예상되는 큐슈 서부엔 최정예 제5수륙양용 군단휘하 2개 해병사단(제3/4 또는 제2/5해병사단)의 동시 상륙이 예정되었고, 전술한 최소 60척 이상의 항모와 30척 이상의 전함, 350척 이상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대함대가 이를 지원한다.

X-75일부터 일본 본토 전역에 걸친 대규모 전략폭격, 항모 기동부대에 의한 전략요충지 핀포인트 폭격과 기동함대의 대규모 연안 함포사격이 개시될 예정이었다. 이는 간토(혼슈)와의 연락선 차단, 잔존한 일본해군 함정의 격멸, 철도와 도로의 수습점, 중요한 교각이나 터널 등 교통 요충시설 파괴, 상륙지점의 일본군의 손실 도모가 목적이었다.

또한 대륙에 전개한 일본 육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중국 본토 연안부나 시코쿠에서 견제 작전을, 최종적으로 X-4일엔 선발대로 정예 제158연대 전투단의 타네가시마 강습상륙과 제40보병사단의 고시키지마 열도의 상륙도 함께 실행될 예정이었다. X-1일에는 항공폭격 및 주력전함 최소 20척을 동원한 전함의 대지상 함포사격[1]을 상륙지점의 포대와 발화점에 집중하여, 상륙지역 인근 해상과 육상의 모든 장애물을 배제하고 X-day 오전 6시에 맥아더 원수의 진두지휘 아래 지상 주력본대에 의한 대규모 상륙을 개시한다.

상륙 후 각 부대는 X+3일까지 해안 교두보를 확보, X+5일에는 미 제 9 군단(제77/81/98보병사단)이 전략 예비대로 가고시마 만에 추가 상륙해 상륙부대의 손실보충과 부대 교환을 마치며, 이후 상륙군은 큐슈 약 1/3을 가르는 선을 북진 한계점으로 삼아 카와치 북부의 산맥을 방어선으로 설정해 일본 육군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한다는 2단계 작전이 계획되었다.

최종적으로 작전은 X+30일에 종료될 예정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작전이 지연될 때는 코로넷 작전에 투입될 부대를 이쪽으로 돌리거나 원자폭탄, 독가스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계획도 수립되었다.

2.2.1 파스텔 작전

파스텔 작전(Operation Pastel)이라는 올림픽 작전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작전도 준비해뒀다. 하지만 이 작전은 총 8만(!)의 병력을 시코쿠에 상륙시키는 '기만' 이라는 말이 무색한 대규모였다. 참고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D-day에 1진으로 상륙한 병력이 이보다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2.3 코로넷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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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넷 작전(Operation Coronet) 간토 침공작전시 미군 상륙 예상지점과 일본군의 배치.

코로넷 작전은 1946년 3월 1일에 혼슈 지방에 720,000명의 병력과 약 3000기의 항공기를 동원하는 관동 상륙 작전이다. 상륙 뒤 도쿄로 진격한다.

이 코로넷 작전에서는 상륙 예정지역에 대한 대규모 항공 공격, 함상포격이 Y-15일부터로 올림픽 작전(X-1일)보다 길게 잡혀있었는데, 이것은 큐슈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에 일본군도 그만큼 방비를 굳힐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소해와 수상장애물 제거에 투입될 시간도 Y-4일부터로 올림픽 작전보다 길었는데, 물론 이 이후에도 간토 각지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더 밀도 높게 실시될 예정이었다.

Y-day는 1946년 3월 1일로, 주 상륙지점은 쿠쥬쿠리 해안과 사가미 만 두 곳이었다. 쿠쥬쿠리 해안에 상륙하는 부대는 호지스 대장의 미 제1군으로, 작전투입 병력은 Y-day에 미 제24군단(제7, 27보병사단)과 제3해병상륙작전군단(제1, 4해병사단)이 선봉으로, Y+5일엔 제96보병사단과 제6해병사단이, 그리고 Y+30일에는 가칭 B군단(제5, 44, 86보병사단)이 상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사가미 만에는 아이켈버거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8군이 상륙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Y-day에 미 제10군단(제2, 4, 31보병사단)과 미 제14군단(제6, 32보병사단)이, Y+5일에 제37, 38보병사단이, Y+10일에 미 제13군단(제13, 20기갑사단)이, Y+30일에는 가칭 D군단(제4, 8, 87보병사단)이 상륙하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이 밖에 미 제8군은 예비로 제97보병사단을 편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외에도 태평양 방면 육군부대의 예비로(전략예비대도 포함) 가칭 C군단(제28, 35보병사단, 2공수사단)과 가칭 E군단(제91, 95, 104보병사단)이 또 있었다. 이렇게 사가미 만에 상륙하는 미 제8군의 병력은 제1군보다 많았는데, 제8군이 담당하는 사가미만이 코로넷 작전의 주공방면이었기 때문이다.[2]

3 취소된 원인

결론적으로는 원폭을 맞은 일본이 예정보다 일찍 항복해서 취소된 거다. 미국이 지속적인 사상자 증가와 전비부담, 전쟁에 대한 피로 등으로 악화되는 여론 탓에 몰락 작전을 취소하고 핵공격을 감행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핵폭격과 몰락 작전은 양자택일이 아니었다. 만약 일본이 핵공격을 받았음에도 항복을 거부했다면 몰락 작전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미국은 7발의 핵폭탄과 핵폭격 이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메뉴얼도 준비되어 있었다.

오히려 여론에 대한 의식은 몰락 작전보다 맨해튼 프로젝트 쪽이 훨씬 강했다.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20억 달러가 넘는 거금을 투입했는데, 이는 모두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실전에서 핵병기를 쓰지 못한다면 의회와 여론은 당장 20억 달러 어디다 썼냐고 들고 일어설 게 뻔했다.

우선, 1945년 당시 미국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미국의 병력 피해와 인력 소모가 당시 메이저 참전국 중 가장 적었다[3]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 인구 기준으로 미국의 인구는 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 기준 약 1억 3천만 명으로, 5억(!)명의 중화민국과 1억 6천만 명의 소련 다음으로 3위이다. 그러나 인명피해는 병력 피해 40만 7천여 명에 민간인[4] 12,000여 명으로 합쳐서 42만여 명이다. 여기에 대일전에서 포로로 잡힌 병력을 더해야 하지만 수치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미국의 전투중 사망자, 즉 순수 전사자는 292,131명이다. 이중 185,924명(63.64%)이 대서양, 아프리카, 유럽전선 즉, 대 독일/이탈리아 전쟁에서 발생했다. 나머지 106,207명(36.36%)만이 대일전에서 전사했다.

독소전쟁이라는 헬게이트덕에 민간인 포함 약 900만 명을 잃은 독일, 3,000만 명을 웃도는 피해를 입은 소련, 중일전쟁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천만 명 이상을 잃은 중국과는 당연히 비교조차 불가능하고, 영국의 병력 피해는 39만 여명으로 미국보다 적지만 민간인 피해가 10만 명 이상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피해를 본국에 한정하지 않고 태평양 및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의 주축이었던 안작(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ANZAC)군의 피해까지 합하면 미국보다 많아진다. 일찌감치 항복한 이탈리아나 프랑스도 병력피해는 미국보다 적지만 본토가 전장이 되면서 생긴 민간인 피해로 총 인명피해는 미국보다 10만여 명 많다.

즉, 미국은 메이저 참전국 중 인구는 세번째로 많은데 인명피해는 가장 적었던 나라다. 다른 나라에 비교하면 충분히 총력전의 여력이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엔 본토가 전화에 휩싸이지 않았다는 결정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물론 여론이 전쟁에 부정적으로 바뀌어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대일전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여론이 조속한 조기종전을 원했다면 당장 1944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가 낙선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루스벨트의 여유있는 압승.

그리고, 실로 황당하게도 몰락 작전을 단행할 시점의 미국은 동원병력과 투입 전비를 축소시키면서 역으로 대일전에 투입할 전력은 증강시키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이 가능했다.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 전쟁이 종결되었기 때문인데, 미국은 전쟁기간 내내 태평양보다 유럽을 중시해왔다. 유럽 전쟁의 종결로 여유가 생긴 전력의 일부만 돌려도 미국은 몰락 작전을 위한 대대적 전력 증강 + 국내 여론을 달래기 위한 동원병력 축소를 병행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에겐 여차하면 연합군을 투입하는 선택지도 있었다. 위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미군 단독 작전에 기반한 것으로 투입전력은 모두 미군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對독일 전쟁의 종결은 미군의 유럽전 투입여력만이 아니라 연합군, 특히 영국군의 투입을 가능케 한다. 영국도 오랜 전쟁으로 상황이 말이 아니긴 했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 해전 등의 치욕을 갚아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전후 아시아-태평양 국제질서 재편에 참여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미때문에 대일전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실제 독일 해군 문제가 거의 해결된 1944년 하반기부터 윈스턴 처칠은 해군 주력함 상당수를 인도양으로 후퇴한 동양함대와 신설한 태평양함대에 배치하였고, 오키나와 전투 종결 이후에는 영국 공군이 오키나와에 전개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 다음으로 몰락 작전을 준비하는 군 지휘부의 핵병기에 대한 인식. 미국의 태평양 전쟁의 지휘부는 핵병기의 존재조차 몰랐다. 이는 워싱턴 D.C의 행정부 및 군 최고지도부도 비슷해서 최고위급 몇 명 및 맨해튼 프로젝트 관련자 일부만이 핵병기의 존재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당장 핵병기 사용을 승인한 트루먼도 부통령 시절에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행정부의 No.2이자 대통령 승계서열 1위인 부통령조차 핵병기의 존재 사실을 몰랐던 것. 오히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미의 수뇌부에 암약하던 간첩망 덕에 핵병기의 존재를 이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행정부뿐만 아니라, 당장 대일전을 담당하던 더글러스 맥아더체스터 니미츠조차 전쟁 막바지에서나 핵에 대해 통보받았고 일본 본토에 대한 전략폭격을 전담하던 석기시대 마니아를 빙자한 파괴신"대체 왜 최고사령부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교토 등을 폭격하지 못하게 막고 있냐!"며 강력히 항의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핵병기의 존재를 모르는 전선의 지휘부는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최종단계인 일본 본토 침공을 준비했고, 핵의 존재를 알고 있는 최고지도부 역시 이를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당장 몰락 작전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건 오키나와 전투 직후인 1945년 6월경인데,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한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는 7월 16일에 시행되었다. 그 전에는 핵병기의 성공 여부조차 불확실했고, 트리니티의 성공 이후에는 핵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 최고지도부 입장에선 핵을 쓰건 안쓰건 일본 본토 침공을 준비해야 했다. 실제로 핵폭격당한 이후의 최후의 어전회의에서도, 항복에 찬성한 해군 및 외교관료층과 달리 육군은 끝까지 항복에 반대했다. 육군의 항복불가론은 어느 정도 형식적이긴 했지만 최종적으로 그 항복불가론은 히로히토가 아니면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원자폭탄 투하와 만주 작전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일본은 항복해버린다. 비록 상당히 약체화된 병력이지만 당시 관동군의 양은 상당했다. 소련이 무섭다고 거기에 다 박아놨으니. 그리고 그 병력은 일본이 마지막으로 믿고 있던 군대였다. 거기에 소련은 일본에게 마지막 외교적 희망이었으며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다 깨부순 게 만주 작전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몰락 작전 대신 블랙리스트 작전이 실행되어 일본은 미국에게 점령당했다.

몰락작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달랐다는 주장이 나왔다. 확인바람[5] [6] [7]

4 만약에 실행되었다면?

4.1 미군의 예상 피해 규모

미군은 펠렐리우 전투,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를 기초로, 일본 본토 상륙 작전 시 전사자만 10만 명 이상일 것이라 예상하였다. 작전 규모가 규모인 만큼 진짜로 실행되었다면 미군의 전사자도 분명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예상 피해 정도에는 다소의 이견이 있다. 약간 더 설명하자면...

미군은 일본의 저항이 심하면 화학무기를 사용 하기로 결정하고, 엄청난 양의 독가스를 일본 본토에 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8] 실제 미군은 이미 대전 중반부터 일본의 화학 공격을 대비해 화학 포탄은 물론 각 보병 연대에까지 화학중대를 편성하여 언제든 4.2인치 박격포로 화학탄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화학전 준비를 철저하게 해놓고 있었다.

충분한 화학전 능력이 있고, 이오지마/오키나와를 거치며 최전선과 워싱턴으로부터 화학무기 사용의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음에도 미군이 화학전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 화학탄을 쓰지 않은 것도 있지만[9] 무엇보다도 프랭클린 루스벨트지독한 화학무기 반대론자였기 때문이다. [10] 회의석상에서 군인들은 아예 화학탄(Chemical Bomb)의 C자도 꺼내지 못 하는 분위기였다고. 그러나 그는 4월에 죽었고 후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의 피해를 줄일 수만 있다면 화학탄 따위(?)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든 화학탄 도배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참조 - 펠렐리우 전투에서의 화학전, 참조 -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화학전.

첨언하자면 미군이 화학탄을 아무데나 막 뿌리려고 할 정도로 정신 나간 집단도 아니었다. 미군의 독가스 최우선 사용대상은 다름아닌 비행장이었다.[11] 그나마 제일 명중률이 높은 카미카제 공격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전투 기간 내내 일본군의 모든 비행장을 가스로 도배할 생각이었다고. 일본군의 항공전 능력은 사실상 제로가 되는 셈이다. 화학전 능력이 비교할 수도 없이 좋아진 지금도 비행장에 화학탄이 한두 발 떨어지면 작전 재개까지 복구/제독에 하루 이상이 걸린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의 화학전 대비 수준은 처참했다. 애초에 일본군이 정상 수준일 때도 겨우 1차대전 수준의 화학전 능력밖에 없었으며, 전쟁 말기엔 그나마도 물자 부족 등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또한 약물 살포로 논밭을 초토화시킨다는 계획도 세웠으며, 원자폭탄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하기 전에는 올림픽 작전 시 해안에 방어군 제거용으로 투하할 생각도 했다.[12]

오키나와 상륙작전 종료 후, 미국은 본토 상륙전 준비와 함께 원자폭탄의 양산에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월 1~2기 정도의 원폭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진행되었다. 따라서 상륙작전 실행 시 교두보에 원폭을 투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는 시기는 1945년 10~11월 정도로 예상되었으며, 여기에 맞춰서 모든 작전 준비가 진행되게 되었다.

미군의 예상피해 척도가 되는 펠렐리우/이오지마/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의 전략/전술적 차이도 크다. 미군이 큰 피해를 본 이오지마, 오키나와는 '섬' 이다. 섬은 공격자가 전략적으로 우회할 곳이 없으며 일본군은 그 섬들의 크기에 비해 대규모의 병력과 중화기를 꽉꽉 채워넣고 요새화시킨 상황이었다. 따라서 미군이 그 섬들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방어거점을 피하지도 못하고 섬의 구석구석까지 뒤지며 섬멸전을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피해가 그렇게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본토는 이야기가 다르다. 비록 산세가 험하기는 하나 일본 본토는 앞선 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우회할 길목이 얼마든지 있으니, 독일군이 히트쳤던 그 전격전이 가능한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여러 길목에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시킬 수 밖에 없고[13] 훨씬 많은 병력과 장비를 요하게 된다. 실제로 우회할 공간이 전혀 없거나 없다시피 하고 크기 대비 주둔 병력이 엄청 많아 미군에게 막대한 출혈을 강요했던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 비해, 기동공간이 있고 크기 또한 이 두 섬보다는 훨씬 컸던 필리핀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사자 비율 1대 39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이건 필리핀 주둔 일본군이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사실상 차단된 상태에서 장기전을 해야 했다는 점을 참작해야 하긴 하지만 이 점은 이오지마나 오키나와도 크게 다를 건 없다. 당시 제대로 개발된 게 해안 정도밖에 없었고, 크기도 일본 본토보다 작고, 지세는 험준한 필리핀에서 그랬는데, 필리핀보다 훨씬 개발되고 우회할 길목이 많고 무엇보다 영토가 큰 일본 본토에서야...

무엇보다 지상전의 꽃인 전차 전력을 보게 된다면 일본 쪽이 지나칠 정도로 참담해진다. 셔먼조차 제대로 상대할 만한 대전차 화기가 없었던 일본군에게, 미국이 티거 잡자고 작정하고 찍어낸 1000여 대의 M26 퍼싱을 상대할 만한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14] 공간의 제약이 있었던 섬과는 달리 일본의 넓디넓은 본토에 미국이 얼마나 많은 중전차 사단들을 풀어놓고 굴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미군의 피해는 현재의 예상보다도 더욱 극단적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일본군의 장비로는 도저히 격파할 수 없는 수십 톤짜리 쇳덩어리가 수만 대 굴러다니는데 일본 국민이 1억 명이라 한들 그걸 대체 어떻게 막겠는가.

그리고 익히 알려져 있듯 일본군의 병력과 장비는 질과 양 모두 절망적인 수준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한때 일본군의 최정예로 쳐주던 관동군도 이 시점에서는 잡병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더 퍼시픽 8화에서 존 바실론이 괜히 일본군 병력을 칭찬(?)한 게 아니다. 그 동안 남태평양과 이오지마, 오키나와에 투입된 일본군 병력은 대부분이 오랜 훈련과 중국 등지에서 경험을 쌓은 고참병이었기에,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정도나마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나마 쓸만한 병력과 장비는 대부분 중국 본토에서의 광대하고 지리한 소모전에 발목이 잡혀 있었으며, 제공권/제해권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이들을 본토 방어를 위해 재배치시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본 본토가 이오지마/오키나와의 100배니까 미군의 피해도 100배라는 말은 그래서 어불성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군의 전사자를 10만 이상이 아닌 몇 만 이하의 소규모로 잡는 견해도 있다. 후자는 위와 같은 이유들을 근거로 한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으니 미군의 실제 피해는 작전을 진짜로 실행해보았어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예상보다 피해가 훨씬 클 가능성도, 작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다만, 미군의 피해가 어찌되었든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언어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미국 청년층 다수가 군대에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미국이 작전 중 최대 7개의 핵을 날릴 계획을 짜고 있었고, 7주일 정도 뒤 상륙할 계획이었다 해도 이는 광범위한 사회적 방사능 피해로 연결될 수 있었다.

4.2 일본군/민간인의 예상 피해 규모

일본군은 본토 상륙전에 대비해, 일본령을 작전 지역으로 '귀축영미' 를 본토에서 아작내기 위한 방어전, 결호작전을 준비했다. 그래서 결호작전을 두고 '1억 총옥쇄(당시 일본 국민으로 취급되었던 내지 인구+반도 인구)' 라고도 한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미군은 어찌됐든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에게 상상을 초월한 피해가 닥쳤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과 장비를 준비한 연합군에 비해, 일본의 본토결전 전략은 카미카제를 비롯한 자살공격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나마 그 카미카제는 전술적 실효성도 형편없었거니와(카미카제 항목 참조), 비행기를 날릴 비행장은 화학탄으로 무력화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P-51 머스탱, F6F 헬캣, F7F 타이거캣, F8F 베어캣[15], F4U 콜세어, P-80 슈팅스타 등 온갖 미군 전투기와 지원기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을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16]. 물론 그 와중에 B-29의 폭격이 끊어졌을 가능성은 전무하니, 독가스가 비행기를 파괴하진 못하더라도 그걸 조종할 조종사는 타지도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다.

지상전으로 가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진다. 치하를 비롯한 일본의 전차는 미군의 전차와 비교하면 먼지만도 못하니 차라리 없는 셈으로 치는 게 낫고, 일본 본토에서 굴러다니는 미군의 중전차들을 상대할 수단은 기껏해야 대전차 백병전 민간인에게 폭약 들고 달려들게 하는 정도인데, 이런 전술은 이미 미군이 운용하는 수준의 전차에게는 더 이상 약빨이 먹히지 않았다. 기갑전력이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갖춰져 있는 군대와 기갑전력은 커녕 소화기조차 제대로 못 갖춘 군대가 맞붙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매우 뻔한 일이다. 물론 IED[17]로 미군을 죽일 수도 있겠으나 이미 일본군 상대로만 10만 명이 죽어나간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이 천단위쯤의 전사자를 더 낸다고 꺾일 리가 없다.

앞서 설명하였다시피 이미 정예 병력도, 장비도, 물자도 고갈된 상황이라 기껏해야 민간인에게 죽창 쥐어주고 셔먼에 대항하게 하는 수준이었다. 부녀자까지 죽창 들고 훈련하고 있는 상황이니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한편 일본 육군 강경파 미치광이들이 남아 있긴 하였으나, 그들은 능력도 없고 용기도 없는 허풍선이들 뿐이었다. 그나마 전후 전범으로 처형당한 소수를 빼면 그동안의 패전 책임도 제대로 지지 않은 겁쟁이들인데 무슨.[18] 실제로 본토결전이 감행되었을 경우 위에서부터,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줄줄히 항복하며 지휘체계가 붕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상황은 그야말로 막장 헬게이트였다. 쓸 만한 병력도, 쓸 만한 장비도 없고 소위 '천황 폐하의 정강' 인 군인은 먹을 것을 찾아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고 군기를 잡고 치안을 유지해야 할 헌병대마저 '물욕색욕에 기반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으니 무슨 말이 필요한가. 그렇게 찾아대던 정신력, 정신력은 다 어디가고 멘탈이 이미 붕괴한 상황이었다. 역시 세기말적 상황이었던 1945년 4월의 베를린은, 영토는 많이 잃었지만 각지에 수백만 단위로 남아 있었던 야전군의 피해를 줄이겠다고 항복한 거라 이때의 일본과 비교하면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남은 미치광이 일본 육군 강경파들이 강화를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천황 폐하의 정강된 일본 육군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싸울 방법도, 싸울 사람도 없었다.

정말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 작전만 종결하고 난 후,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됐을 것이다.

5 작전 실행 후 각국의 예상 시나리오

5.1 일본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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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압도적인 핵/화학전과 재래식 포격/폭격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의 식량 상황은 정말로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기아 작전만으로도 45년 8월 이전에 이미 충분히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반 년 이상 시간을 더 끌고 본격적인 본토전이 시작되었다면...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 아사(餓死)가 발생하여 핵이나 화학탄보다도 일본인들을 훨씬 많이 죽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일본군이 쉽게 무너짐으로써 조기 점령되어 의외로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문제는 일본이 패배한 이후의 전후처리인데, 미국은 이미 전쟁에 막대한 병력과 자본을 쏟아부은 상황에서 소련에게 동북아전선에 참전할 것을 조르고 있었고, 종전 이후의 점령지 관리에도 부담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영국, 소련, 중국에 제시한 것이 위와 같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분할통치안. 한마디로 땅은 떼어줄테니까 전쟁 좀 빨리 끝낼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종전 후 찾아올 또다른 전쟁을 미리 예견한 영국의 처칠은 미국의 이 분할통치 계획에 반대했고, 미국이 일본을 통치하며 소련 견제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미국을 설득했다. 또한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인한 정책 변화, 핵무기의 등장, 그리고 예상보다 빨랐던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몰락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고 결국 이 분할통치안도 없던 것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일본이 분단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도와준 셈이다.[19]

하지만 일본에게 좋은 점도 있었다. 우선 일본은 서방 열강보다는 뒤떨어졌지만 국민들이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근대 국가였으므로 빠르게 재건할 수 있었는데, 기득권층이 싹 쓸려나가면 백지부터 다시 시작하므로 과거의 유산을 쉽게 청산하고 제대로 된 민주 국가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게다가 한반도가 공산주의의 창끝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 때문에 미국의 집중적인 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20]

5.2 한국의 경우

한반도 전체 또는 일부의 공산화는 막을 수 없었을 테지만, 실제 역사의 대한민국보다 다방면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므로 작전 실행 시의 수혜국으로 볼 수 있다.'[21]

몰락 작전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피로가 누적되어 한반도 정세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한반도는 이곳을 선점한 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세력들이 해방 이후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산주의 국가로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의 북한과는 다르게 냉전 당시 소련이나 쿠바,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베트남, 라오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처럼 공산당 독재정권이면서도 상호견제적이며 분권적인 공산주의 국가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현재의 북한 정치가 김씨 왕조의 1인 독재로 막장화가 된 건 남북분단으로 인한 독자정부 수립과 김일성이 독자정권 수립 이후 무리하게 일으킨 6.25 전쟁의 영향도 있다. 이 경우 냉전이 끝날 때쯤 동구권 자유화의 영향으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동유럽이나 몽골처럼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거나, 하다 못해 베트남이나 쿠바처럼 공산체제를 유지하되 경제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해 나름대로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반도 정부의 법통을 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자유시 참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등으로 김구 등 임시정부의 핵심인사들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과 소련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망명 정부로 떠돌 가능성이 있다. 다만, 실제 역사의 좌우합작운동과 같이 일부 인사가 개인 자격으로 가칭 '조선 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몰락 작전은 핵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을 경우에나 실시되었을 것이므로, 작전 중 일본 본토에 핵을 대여섯 발 떨구고 난 미국이 소련에게 한국의 분할통치를 요구했을 때 스탈린이 "한반도는 이제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라고 배짱을 튕길 수 있을지는 좀 의심스럽다. 그리고 이 작전이 시행되었다면 결과적으로는 소련군도 열심히 싸워줘야 하므로 소련도 상당히 지쳤을 것이다. 일단 독소전쟁에서 소련인이 무려 2900만이나 죽은 이후이기도 하다.

게다가 2차 대전 말기 소련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손에 넣고 싶어했던 지역은 한반도보다는 만주였다. 그 예로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을 때 스탈린이 걱정했던 것은 중공군이 이겼을 경우, 과거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체결했던 <중소우호조약>이 무효가 되어 그때까지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만주의 창춘 철도와 뤼순, 다롄 두 항구의 조차권이 소멸되어 소련군이 이 지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스탈린은 제2차 국공내전 초기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군이 내전에서 이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공산당 측에 적극적인 지원까지는 하지 않았으며, 결국 공산당이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자, 모스크바를 방문한 중국 사절단에게 공식적으로 "내가 잘못 판단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결국 만주에서 소련의 조차권을 보장하던 <중소우호조약>은 1950년 2월 14일에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새로 맺은 조약으로 인해 무효화되고 소련군은 만주에서 철수하게 된다.

다른 예로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의 영향으로 개발살이 난 채 북으로 도망가던 북한 지도부를 스탈린이 적극적으로 구제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에 참전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기는 했지만, 만약 중국도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냥 중국 동북지방에 북한 망명 정부를 세우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스탈린은 기본적으로 공산권의 이웃나라들을 '소련을 지킬 성벽' 정도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직접 개입하는 등 소련에 위협이 되는 행동은 최소화하고자 했다. 스탈린이 한반도를 그리도 소중히 여겼다면 북한이 패주할 때 더욱 직접적인 방안을 마련했을 것이다. [22]

한편 이와는 반대로 미국이 소련과 중국을 지상에서 견제하기 위해서 한반도 분단을 고집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맥아더와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보면, 미국 정부는 블랙리스트 작전을 짜면서 일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요충지를 점령하는 계획도 짜 놓았는데, 이때 한반도의 서울, 인천, 부산, 진해 등은 반드시 미국이 손에 넣어야 한다는 조항을 넣어 놓았다. 즉, 미국은 한반도를 손에 넣을 의지는 있었으나, 그걸 실행할 부대가 한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계 때문에 소련과 타협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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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미국 정부는 한반도 점령 계획에 영국과 중화민국을 끌어들이고자 했는데, 그 계획 중 하나가 위의 일본 점령 후의 분할도와 같은 것이다. 미국은 4개국 분할통치를 통해 미국 단독의 일본 점령으로 인한 부담을 덜고자 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4개국 분할통치안은 당시 국제 사회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없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우익 계열의 한국 정치세력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위의 일본 점령 후 일본 제국 분할도에서 한반도 4개국 분할안을 토대로 검토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점령한 영국은 실제 역사에서 2차 대전 직후 국력이 쇠퇴하여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마저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도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한반도 서북지방에 큰 미련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윈스턴 처칠은 소련을 경계하여 미국에 협조했으므로 영국이 점령한 한반도 서북 지방을 미국 관할로 넘겨줬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와 경상도를 점령한 미국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 넘어가고, 충청남도와 전라도 및 제주도를 점령한 중화민국의 경우에는 장제스가 어떤 행보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거취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선 장제스의 대일본 반격작전은 이미 실행에 옮겨진 후였고 보급도 형편없고 민심도 얻지 못하고 사단 정족수도 채우지 못하던 일본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강력해진 중국군을 더 이상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중화민국의 종전 후 목소리가 더 커지고 한반도를 전리품으로 요구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실제로 국공내전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중화민국은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시코쿠를 통치하기 위해 장교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공내전이 터지면서 시코쿠에 파견한 장교단은 모두 철수시켰고 한반도도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됐다. 만약 장제스가 측근들의 말을 들어 국공내전을 재개하지 않고 산해관을 국경으로 삼아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후방을 탄탄히 해놓은 다음에 중국 공산당을 쳤다면 가뜩이나 소련과 사이도 안 좋았던 공산당은 그냥 국민당에게 쓸리는 것 말곤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될 시에 한반도가 중화민국의 영향력 안에 들어올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설령 만주를 점령한 소련에 의해 공산정권이 들어선다 하더라도 현행 역사대로 중화민국의 지분 요구에 따른 분할점령의 가능성이 있으며 한반도의 공산정권은 자본주의 세력에 샌드위치로 포위되어 개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는 2차 대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은 친한 인사인데, 그게 단순히 그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감격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후의 동북아시아에서 장제스 자신이 지원을 해준 임시정부가 한반도의 정권을 잡았을 경우 신생 대한민국이 중화민국의 위성국으로 편입되는 효과를 누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미루어 본다면 한국인의 반중감정을 살 수 있는 충청남도와 전라도 및 제주도의 식민통치보다는, 중화민국의 점령지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한반도 정부 또는 미국 관할로 넘겨주어 중화민국에 우호적인 한반도 정권을 지원하는 게 더 이득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상황의 남한서독의 경우에서처럼 미, 영, 중 3개국 분할통치지역의 통일로 말미암아 실제 역사의 대한민국보다 다방면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일단 대한민국의 영토가 38선 이북에 걸쳐져 있는 데다가, 38선 이북 영토가 한반도 북부의 인구밀집지역이자 평야지대인 평양을 포함한 서북지방이다. 만약에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전쟁과 같은 내전이 발발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영토나 인구의 역량에서 실제 역사와는 비교가 안 되게 남한이 유리하다. 여기서 북한이 지배할 영토라고 해봤자 함경남북도가 전부인데, 이곳에는 한반도 최악의 혹한지대인 개마고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농사를 지을 만한 토지가 거의 없어 식량 생산에도 불리하며 인구도 적다. 그나마 이점이라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설치한 함흥, 흥남 등의 중화학 공업지대 정도인데 이것만으로 북한의 경제력을 떠받치기엔 역부족이다.

설령 북한이 공산권으로부터 지원받은 군사력으로 실제 역사에서와 같이 남한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다가 남한과 주한UN군의 반격으로 위기에 몰린다고 해도, 남한 정부가 굳이 북한의 영토인 함경도를 점령하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할 명분도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실제 역사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군에게 "38선을 넘지 말라"고 수차례 경고를 했으나 유엔군이 이를 무시하고 북진한 것을 자국에 대한 심각한 안보적 위협으로 받아들여 참전을 결정했는데, 여기서는 이미 전쟁 전의 대한민국 영토가 38선 이북에도 있으니 그런 명분을 내세우기도 어렵다. 38선 이북의 대한민국의 영토 수복을 위해 유엔군이 진입하는 것이니 국제사회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진군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중국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유엔군의 함경도 진입에 대해 경고하는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당초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의 대외적 목표는 대만 점령이었지 북한의 구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도 중국의 고위층 인사 대다수의 한국전 참전 반대 입장에 부딪혀야 했던 마오쩌둥의 참전 지지 입장은 실제 역사에서보다 영향력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대신에 압록강 남안에 배치될 한국군 또는 유엔군을 경계하여 한중 국경지대에 상당한 군사력이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중국이 북한과 연계하여 수시로 남한과 국경충돌을 벌였을 가능성은 있다. 그래도 이럴 경우 남한은 북한과의 체제경쟁을 이기면서 시작한 거나 다름없기에 냉전이 종료될 시점에 북한이 자동적으로 체제 붕괴되어 남한에 흡수통일됐을 가능성이 높다.

5.3 미국의 경우

피로스의 승리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안 좋다.

예상 피해 규모는 유동적이지만 미국이 더 많은 전사자를 껴안아야 한다는 것 당연한 대가이다. 그리고 지나친 장기전은 집권당의 미국 국내 정치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아무리 영광의 승전을 거둬봐야 총선, 대선에서 깨지면 무슨 소용 거기에 재주는 뭐가 넘고 돈은 누가 챙기는 격으로 소련만 '동아시아에서의 엄청난 영향권' 이라는 선물을 챙겨갈 뿐이니 국제정치적으로도 매우 불리하다.

미국이 비상륙/봉쇄전으로도 일본을 끝장낼 수 있었다. 제공권/제해권을 완전 장악한 지 오래되었으니 일본 주위의 전 해역을 기뢰로 봉쇄하고(Operation Starvation : 기아작전) 주요 도시는 네이팜 폭격으로 일본의 산업생산력을 고갈시키며 느긋하게 기다리면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소멸' 시킬 수 있었다. 이미 일본은 식량 상황이 거의 한계에 다른 상황이기도 했다.[23]

일본 열도는 한반도보다도 더 산악지가 많은 지형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바닷길이 험해지면 전국 각지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연안 해운의 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나라가 일본이었으며 2차대전 당시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로/철도가 여기저기 만들어지고 나라 전체가 연결된 건 한국에 비해서도 그리 오래 되지 않은 현대의 일이다. 원자폭탄보다도, B-29의 융단폭격보다도 이 기아 작전이 훨씬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다. 21폭격부대의 출격의 5.7%(1529소티)만 가지고 침몰톤수 30만톤에 파손톤수 40만톤을 내었고 세토 내해의 그나마 멀쩡한 대형 항구이던 고베라든지 오사카항의 물동량을 대폭 감소시켜 버렸다(예 : 고베항의 경우 3월달의 물동량은 32만톤 정도였는데 이 기아 작전이 이루어진 후인 7월에는 4만 4000톤으로 감소하였다고 함).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이런 봉쇄전도 선택지가 되기 힘들었다. 태평양 곳곳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상자와 오랜 전쟁에 국민들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고 반전여론도 점차 거세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존 바실론 등 슈퍼스타를 이용한 세일즈등 국채를 이용한 미국의 재정 충당도 이미 한계였다. 그래서 정치권과 합동참모본부는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만 하는 부담이 점차 증가했다. 그나마 싸움박질하기 좋아하는 군부조차 예상 사상자에 대한 분석자료를 받아들고는 큰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상륙을 하든 안하든 미국으로서는 이래저래 비용지출이 너무 컸다. 괜히 몰락 작전이 쓰고 싶지 않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던 것.

다만 미국의 이득도 없는 건 아니다. 이 경우 일본은 말 그대로 전후 청산이 아주 철저하게 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냉전 시기, 그리고 그 이후 중국과의 대치 상황에서 골칫거리로 작용하고 있는 아베 신조의 극우화 같은 문제에 시달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일본을 완벽히 2인자화 하여 중국과 소련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역을 넘겨줘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24] 또한 중국이 21세기 현재처럼 급성장하리라는 예상은 아무도 하지 않고 있었다.

5.4 소련의 경우

몰락 작전을 실행했을 경우의 최고 수혜국.

몰락 작전이 실행된다는 것은 일본과의 전쟁이 매우 장기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은 일본군의 소탕을 핑계로 만주, 한반도는 물론 중국 방면으로도 진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미국의 눈치도 있고 장제스의 중화민국도 있으니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중국 본토도 스탈린의 마수로부터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마당에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가 사실상 확정된다.

거기에 홋카이도에까지 소련군을 구겨넣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45년 8월 일본 항복 이전에도 소련은 홋카이도를 공격할 여건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아직 관동군이 각지에 산재해 있었으며 미국 역시 몰락 작전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연합국과의 관계를 우려하던 스탈린에 의해 홋카이도 공격은 시도되지 않았다. 물론 몰락 작전이 시작되고 미국이 사상자 수에 염증을 느끼고 소련에게 본토 공격을 요청하게 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홋카이도를 성공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상륙함이 모자랄 뿐만 아니라 상륙작전을 아예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크림반도를 빼놓고 이야기 하자면 사상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수 있다. 가장 가능성 있는 계획은 소야와 이시카리에 협공을 하는 건데, 워낙 지형이 위험하고 일본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우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물론 소련 입장에서도 얼마 없는 해군으로 그렇게 하긴 힘들겠지만, 일본 해군은 제해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송 문제는 미국에게 손을 벌려 해결하는 수도 있다. 피를 대신 봐주기를 바라는 미국으로서는 거부하기 힘들 테니까. 실제로 미군은 소련의 참전을 원했고, 1945년에는 만주 작전과 일본 공격을 위해 소련군에 함선을 지원하는 훌라 계획(Project Hula)을 진행했다.[25]

소련군이 미군의 병력 규모를 보고 쫄아서 그냥 아쉬운 침만 흘리고 말 거라는 사람들도 있으나, 미국의 전략과 국제 정치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전쟁은 스타크래프트 컴까기 하고 나서 지들끼리 팀 풀고 싸우는 게 절대로 아니다. 어쨌거나 당시 소련은 '동맹국' 이었다. 몰락 작전을 실행했다면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피를 많이 흘린 미국은 소련의 지원을 요청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히틀러가 좀 더 오래 싸워줘서 극동 지역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면...' 이라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훨씬 현실성 있다. 이런 문제는 병력 규모 등 가시적인 요소로 판단할 사안이 절대 아니다. 거기다 몰락 작전을 실행한 미군은 당연히 전력 소모와 분산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모양새만 놓고 보면 스탈린은 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는 꼴이다. 소련의 이런 넋살 좋은 태도는 애초에 소련에 돈은 돈대로 꿔주면서 쓸데없이 손을 벌려 명분과 약점만 잡힌 전임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책임이 크다.[26][27] 소련의 태평양 전쟁 개입의 명분도 분명히 미국이 먼저 준 것이 사실이다.[28] 대소강경론자인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훨씬 일찍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았다면 애초에 소련이 극동에 끼어들 여지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29] 결과적으론 루스벨트가 우리나라 분단을 일으킨 셈이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소련의 일본 본토 상륙 여부와는 상관없이, 몰락 작전의 실행 자체가 소련이 엄청난 이득을 보는 상황이다.[30]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미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2900만의 피를 흘려서 한반도 남부까지 계속 진격하게 될 경우 피를 더 흘린다는 말도 있다. 거기다가 일단 한반도 남단까지 진격했으면 필연적으로 일본 본토 상륙에도 참가할 수밖에 없는데[31] 기본적으로 상륙작전은 공격자의 피해가 큰 작전인 데다가 일본이 진짜 정신 차리고 요새를 구축하고 방어전을 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즉 소련의 입장에선 더 이상의 인구손실이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더 인구를 처박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결국 국력은 인구이기 때문에 몰락 작전이 수렁에 빠질 경우 소련의 국력이 크게 저하되었을 가능성 역시 없진 않다.

하지만 위의 일본의 상황을 보면, 일본이 저항해서 소련에게 피를 흘리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기에[32] 어찌되었던 소련이 가장 큰 이득을 본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애초에 만주 전역 종결 후의 일본이 소련에게 피해를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당시의 한반도와 홋카이도는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였고, 소련군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지역들이었다. 관동군이 완전히 망해버린 시점에서 이들 지역에는 소총만 간신히 남아있는 알보병 소수, 심지어는 죽창 든 일본인들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미국이 몰락 작전으로 일본 본토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소련이 이들 지역을 집어삼켰을 가능성이 컸다.

6 각종 매체에서의 몰락 작전

가끔 일본대체역사물격인 가공전기에서 이런 전개를 다루기도 한다. 매저키즘인가 보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5분 후의 세계 및 속편 5분 후의 세계: 휴가 바이러스는 바로 이 몰락 작전이 시행되고 4개국의 점령하에 들어간 평행세계 설정이다. 저 위의 지도 그대로 일본인은 거의 전부 각국의 혼혈화가 되어 우민정책 아래 노예 취급을 받으며 각국 본토인들 거주지역과 대비되는 대규모 슬럼가를 형성해 살아가고 남은 순수 일본인 26만명은 지하세계를 세우고 저항한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그 세계의 일본인들은 RPG로 장갑차를 한 명당 한 대씩 잡는 교환비를 세우는 전투종족(...).[33] 좀 종잡을 수 없는 소설이며 극우파맛이 깃들었다고 읽는다 전쟁소설 및 대체역사물로서도 별로 가치는 없다. 애초 그쪽으로 중점을 두고 쓴 물건도 아니고. 소설로서는 그저 평작이다.

HOI2의 시나리오로 구현되었는데 이쪽의 연합군 목표는 소련군이 일본에 상륙하기 전에 일본의 모든 군대를 분쇄하고 일본의 빅토리 포인트[34], 즉 대만과 일본 전역을 점령해야 한다. 일본의 VP가 단 1점이라도 남아있으면 게임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다만 일본에게 엄청 유리하다. 일본의 모든 영토에 주둔병과 민병[35]이 2~3사단씩 있는 데다 소련은 수송선이 얼마 없고 그나마 상륙 가능한 포인트가 홋카이도인데 여기서 본토 공격해봤자 삿포로→센다이 도강 페널티 먹어서 안습. 연합국은 대만부터 섬 하나하나 다 찍고 올라와야 하는 데다 육군이 얼마 없다. 반면에 일본은 그냥 상륙 포인트에 이동 가능한 사단 전부 꼴아박아놓고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면 이긴다. 물론 일본이 실제로 이랬다면... 소련이 이길 경우 당연히 한반도는 적화되며[36] 연합국이 이길 경우 그냥 일본 항복, 일본이 이길 경우 싸대기를 맛깔나게 후려맞은 연합국이 일본인의 끈기에 감복하여 협상해준다충공깽스런 결말. 본토까지 탈탈 털리고 VP 1포인트만 남아도 이런다?

겁스 관련 TRPG 웹진인 피라미드에 소개된 적이 있는 겁스 무한세계의 예제 세계관 중 케츠고가 있다.[37] 이 세계관을 꾸밀 때 제안할 가능성으로는 당연히 일본 본토에 대한 여러 번의 핵 폭격. 미국이 방심한 사이에 스탈린(을 위시한 공산세력)이 한반도 전역과 홋카이도를 점령한다거나 일본의 분단, 1948년에도 공화당이 미국의 정권을 잡는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코에이 사의 대전략류 게임인 '개가의 호포' 는 몰락 작전이 시행되고 승전국의 점령하에 쪼개진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각 점령국의 지원하에 쪼개진 일본을 통일하는 것이 목표. 여기서도 자위대 무기는 어디 안 가서 최악의 가성비를 자랑. 육해공 공통으로 어중간한 성능에 비해 쓸데없이 가격이 높다.

일본라이트 노벨 원작으로 하는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주인공 케이지가 수백, 수천번 죽어 나가는 상륙 작전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세가새턴판 1995년작 월드 어드밴스드 대전략~강철의 전풍~에 수록되어 있다. 게임판의 맵은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일본군과 미국, 소련군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일본군의 공중전 전력이 미국에 비해 좀 더 강하게 설정되어 있다. 고증에 충실하면 밸런스가 안드로메다로 간다. 스탠더드 모드에서는 단독 맵으로 즐길 수 있으며, 캠페인 모드에서는 미국 시나리오 분기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다. 색적모드를 On으로 할 경우 공격하는 미군이나 방어하는 일본이나 피칠갑이 되는 격렬한 맵. 소련 극동방면군은 니가타 방면에서, 미 1군 및 8군은 실제 계획대로 쿠쥬쿠리 해안과 사가미 만에서 내륙을 향해 진격하며 일본 36군은 마에바시, 12군은 내륙 깊숙한 마쓰시로를 거점으로 방어한다. 엔딩에서 일본 수뇌부는 미소 연합군에 함락 직전 마쓰시로 대본영과 함께 자폭하여 일본제국은 소멸한다. 이후 일본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도호쿠 이북에 소련이 극동아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며, 미국은 소련과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일본의 남은 절반을 위임통치 하에 두는 것으로 시나리오는 끝난다.

별이 펄럭일 때에서도 나오는데, 차이점이라면 하는 건 미국이 맞는데 맞는 건 추축국 포지션의 판타지측 국가다. 첫 단계부터 최고의 숙련병만 모아서 통신을 마비시킨 수도와 군항을 폭격하는 비범한 작전.
  1. 전함 하나의 화력은 현대 러시아군의 포병 사단 하나와 거의 맞먹는다. 즉 20개 포병 사단과 맞먹는단 소리. 참고로 전성기 때 소련의 포병 사단이 16개였다
  2. 사실 상륙작전에 적합한 곳은 쿠쥬쿠리 해안 쪽이었는데 그곳은 해안가의 면적도 넓고 근처에 여러 항만이 있어 상륙 후 교두보 확보에는 좋았지만 문제는 그곳에서 간토 내륙으로 향하려면 에도가와나 아라카와 등의 하천하구가 있어 이후 진격에 꽤 어려움이 있으리라 에상되었다.
  3. 소련,영국,미국,중국,항복한프랑스
  4. 주로 상선단에서 발생한 피해.
  5. 저 주장의 원문은 http://strategicstudiesinstitute.army.mil/pubs/parameters/Articles/1994/1994%20silkett.pdf
  6.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사이트의 http://www.history.army.mil/books/wwii/macarthur%20reports/macarthur%20v1/ch13.htm 와 비교해서 읽어보는게 좋을 듯
  7. 다만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1945년 말의 일본은 애초에 미군한테 미군이 예상했던 만큼의 피해를 줄 만한 여력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고 일본 본토는 이오지마나 오키나와와는 달리 매우 넓어 전략적으로 우회할 길목이 얼마든지 많았다.단적으로 걸프 전쟁 때 미군은 최소 몇만단위의 사상자가 나올거라 예측했지만 예측과 실제 전쟁 상황은 매우 달랐다.
  8. 화학무기의 군사적 이용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1925년의 제네바 화학전 금지협정에는 일본과 프랑스가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이 두 나라에 대한 화학전 자체는 국제법상 불법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그리고 서로 악에 받힐대로 받힌 상황이었으니...
  9. 중국의 국민혁명군홍군을 상대로 썼다는 증언은 있다. Yuki Tanaka, Poison Gas, the Story Japan Would Like to Forget,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October 1988, p. 16-17
  10. 물론 그 지독한 화학무기 반대론자를 상대로 일본이 화학탄을 썼다면 미국의 반응은 상상에 맡기겠다.
  11. 그것은 지금의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군이 괜히 3군 중에서 화학전 훈련을 제일 빡세게 하는 게 아니다. 비행장을 무력화시킬 만한 수단으로 화학탄만한 게 없다는 걸 우리 군도 북한군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만일 전쟁이 발발한다면, 접경지역의 비행장은 국제법이고 자시고 화학탄의 집중포화를 받을것이다.
  12. 당시 미군 지휘부는 원자폭탄의 방사능 위험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방사능 피해가 있어봤자 X-레이 몇 번 찍는 수준의 엄청나게 강력한 슈퍼폭탄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계획이다. 미군이 방사능 피해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되는건 전후의 여러 핵실험 및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해 사례를 종합하면서부터이다. 실제로 개발 초기엔 원폭 투하후 참호에서 나와 폭심지로 진격하는 훈련도 했었다.
  13. 군사학에서는 이를 공격자의 이점이라고 한다.
  14. 심지어 미군은 대일전에 '진정한' 포탑 중전차 T29, T30, T34와 비포탑 중전차 T28를 벙커 및 거점 파괴용으로 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송비용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했다.
  15. 타이거캣과 베어캣은 참전을 위해 항공모함에 실리기는 했으나 전쟁이 빨리 끝나버리는 바람에 실제로 참전하지는 못했다.
  16. 간단히 육군 항공대가 시행한 도쿄 대공습의 해군 버전인 구레 군항 공습만 봐도 답이 나온다.
  17. 보통 이라크 전쟁으로 유명하지만 IED 자체는 폭발물이라는 게 만들어진 시점부터 있었다.
  18. 실제로도 항복 선언 후 사무라이처럼 할복 자살까지 한 군인들은 그렇게 많지도 않다. 목소리를 높인 건 그냥 체면치레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봐야 한다.
  19. 단 이 시점에는 이미 미군이 대규모로 전개하고 있었기에 소련이 개입했어도 홋카이도 이상 점령은 불가능했다.
  20. 그런데 사실 미국이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을 안거는 늦긴했다 언제 인지 알면 추가바람
  21. 왜 그런가면 밑에 서술하겠지만 저 정도 작전을 펼친 미국한테 개길수는 있을지
  22. 모택동은 북한이 무너지면 치명타지만 스탈린은 만주가 버티고 있기에 상황이 나았다.
  23. 반딧불의 묘에서도 처절하게 묘사된다.
  24. 사실 미군 역시 한반도에 상륙작전을 벌이거나(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오는 지원을 막기 위한 것임을 들이대면 명분이야 충분하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에서 써먹었던 원폭을 가지고 소련을 위협하면(소련은 핵무기가 없으니까) 남쪽은 차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소련도 미국의 원자폭탄을 보고 열심히 연구해서 빠른시간 내에 핵무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몰락 작전으로 미국이 일본에 묶여있는 기간을 생각한다면 미국 측에서 핵 우위를 가지고 소련을 위협할 만한 시간이 거의 없다는게 문제다. 게다가 애치슨 라인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이 한반도의 중요성을 어떻게 인식했는지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25. 1945년 7월까지 100척의 함선이 소련으로 보내졌고, 이 시점에서 180척을 더 지원하는 방안이었다. 수백 척의 함선을 일본 공격을 위해 지원했으니 일본은...
  26. 대표적인 대소 유화론자이기도 했다.
  27. 하지만 루스벨트의 정관(政觀)만 탓할 게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본군이 질기게 저항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누적되는 막대한 인명손실에 대한 부담이 루스벨트로 하여금 소련의 개입을 바라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소련도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소련 인민은 미국 대통령 선거권이 없다. 루스벨트로서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자명했을 것이다.
  28. "전쟁을 속히 종결시켜야 된다는 판단에서 미국 내부의 반공주의 인사들의 반대에도 그는 소련에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의사가 있음을 전해왔고..."(위키백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9. 앞서 표현된 '100만 대군을 보고 쫄아서' 는 개입할 명분을 주지 않았을 때나 소용 있는 말이다. 스탈린은 '흥분한 100만 대군' 앞에서 말없이 밥숟가락 얹을 정도로 멍청한 자도, 용감한 자도 아니다.
  30. 그래서인지 밑에서 서술할 HOI의 전투 시나리오에서도 소련이 남하하는 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만 한다라고 쓰여있다.
  31. 그렇지 않으면 미국을 극도로 자극하는 꼴이 되므로.
  32. 실제로 만주 전역에서 소련은 매우 적은 손실로 70만의 관동군을 제압하였다.
  33. 고대 기독교 카타콤의 현대판스러운 거대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숨어들어 살고 있으며 그런 주제에 기술력도 킹왕짱이라 저항세력이 세계 최초로 컴퓨터를 발명한 것으로 되어있는 등 정신 나간 묘사가 일품이다. 한마디로 일본판 국뽕(...)
  34. 하지만 이 시나리오에서 일본은 물론 45년 당시 일본이 붙잡고 있던 마지막 영토까지도 전부 빅토리 포인트로 지정되어 있다.
  35. 영구적으로 이동 불가 설정이 되어있는 방어용 민병이며 주둔병에게 주는 하리츠케 사단의 이름이 붙어있다.
  36. 시작부터 북한 지역은 소련군이 점령해있다.
  37. 결호작전에서 이름을 따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