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시게사부로

파일:Attachment/미야자키 시게사부로/miya.jpg

宮崎繁三郎
1892~1965

일본 육군 장성. 최종 계급 중장.

1 개요

임팔작전의 총 지휘관인 금지어 사령관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보여준 인물. 당대 일본 육군 중에는 흔치 않은 제대로 된 인물. 참고로 나무위키에 등재된 일본 육군 인물 중에는 사토 고토쿠, 쿠리바야시 타다미치와 함께 보기 드문 개념인이다. 타다미치와 달리 사관학교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전투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전투교범에 충실하였다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무라 마사토미와 비슷한 듯.

2 할힌골 전투

할힌골 전투에서 16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주코프 장군의 대공세로 시게사부로의 부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맡은 지역을 잘 지켜내었다. 시게사부로는 주둔지에 널부러진 바위에 자기 부대의 이름을 파놓았는데 이는 만주-몽고 국경을 확정지음에 있어서 일본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3 임팔 작전

때는 제15군 사령관이 임팔 전선에서 대한독립을 열망하며 분투하던 기생들과 노닥거리던 시절...

3.1 테니스 코트의 전투

사토 고토쿠 중장 휘하 임팔 작전의 최우익을 담당한 제31사단의 임무는 2가지였다. 코히마의 점령과 임팔로의 증원군 저지이다. 코히마는 인도 아삼주의 수도 디마푸르과 친스키아 방면에서 오는 도로가 합쳐져 임팔로 향하는 요지로 따라서 코히마를 점령하는 것은 임팔로의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제31사단이 친드윈 강을 건넌 것은 3월 15일이었다. 당시 31사단 보병단장이었던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58연대로 구성된 좌익돌진대를 맡아 4천명의 병력으로 코히마를 향해 본대와 나뉘어 돌진했다. 미야자키 부대가 아라칸 산맥으로 접어들었을 때 그는 병사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인도로 가는 원정길이니 염불을 외며 산을 올라가라' 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해냈고 그의 명령에 일본군은 염불을 외며 아라칸 산맥을 넘었다(...).

미야자키 부대가 코히마 외곽에 도달한 것은 4월 5일이었다. 여기서 휴식한 미야자키 부대는 6일 새벽 4시 반에 코히마를 기습하였고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자신들의 계산보다 2주일이나 빨리 일본군이 나타난 것에 당황하여 코히마에서 부근 고지로 철수했다. 이때 미야자키 연대장은 부하들의 총을 몽땅 버리게 한 다음 노획한 영국군 무기를 장비시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현명한 조치였다.[1] 97식 전차의 방어력을 올리기 위해 철판을 덧댄 지휘관이 '덴노의 하사품을 훼손한 죄(...)' 로 보직해임 당한 사례가 실제로 있었던 일본군에서 보직해임이었으면 천만다행이다. 이건 대놓고 모가지를 걸고 한 일이다.

그와중에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테니스장 양 끝에 서로 참호를 파고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수류탄 던지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투는 캐망한 임팔 작전에서 그나마 벌여본 전투다운 전투였다.

결국 압도적인 영국군의 화력에 부대는 밀려버렸고 공방전 10일만에 일본군은 절반으로 줄었고 식량도 다 떨어졌다. 일본군은 이제 영국군의 수송기가 뿌리는 보급 낙하산이 자기네들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미야자키 부대의 병력은 5월이 되자 원래의 1/4로 감소해 있었다. 미야자키 부대는 굶주림과 백병전으로 전멸해버린 중대가 3개나 되었다.

3.2 후퇴 작전

임팔 작전에서 아군의 비참한 실태에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이 15군 사령관의 독단적이고 비현실적인 돌격 명령과 보급 약속 위반에 격분하여 단독 사단 후퇴를 감행했다. 사토 사단장이 후퇴하는 31사단의 후미 엄호[2] 를 위해 라즈라 방면에서 선전하던 미야자키 소장의 지대를 선정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앞서 말했듯이 미야자키 지대는 5월에 이미 원래의 병력의 1/4 수준에 불과했고 후퇴를 결행할 당시에는 4천명에 달하는 연대 병력이 600명으로 줄어 있었다.

말이 엄호지 사실상 거기서 죽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미야자키 지대에게 남겨진 장비는 사단에서 쓰는 대전차포 몇 문이 전부일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당시 미야자키 지대가 막아야 하는 영국군은 4개 보병사단과 전차 1개사단으로 이뤄진 슬림 중장의 14군이었다. 제공권마저 빼앗겼기 때문에 상황은 그야말로 망했어요.

하지만 이러한 악재 속에서 미야자키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된다.

3.3 옥쇄금지!

이러한 극단적인 열세 상황에서 미야자키 지대장의 명령은 바로 "옥쇄하지 말 것!" 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옥쇄를 부르짖으며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던 당시 보통의 일본군 지휘관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미야자키 부대는 우선 영국군의 주기동로상에 주방어거점을 만들고 영국군이 방어거점 양쪽을 포위하도록 유도했다. 산악지대에서의 양익포위는 생각보다 많은 전력 소모를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집요한 전술로 시간을 번 미야자키 지대는 후방에도 다른 진지를 만들고 포위되기 직전 빠져나오는 식의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며 지연전을 펼쳤다.

거기에 정글 밀림 곳곳에 취사를 하는 것처럼 연기를 피워 영국군이 실제 병력을 파악하지 못해 여전히 31사단이 집요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화용도 결국 영국군은 미야자키 지대의 기만술에 속아 온 밀림을 뒤지면서 전력을 낭비했고 지대는 밤만 되면 영국군의 보급 거점을 기습하여 식량과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다. 오오 처칠 급여!! 덕분에 그들은 영국군의 무기를 들고 영국 레이션으로 배를 채우며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잠깐, 영국 음식을 먹었다고? 굶어 죽는 것보단 낫잖아

한편 미야자키 지대를 잡기 위해 영국군은 공군의 지원하에 맹공을 퍼부었지만 매번 수세에 몰려 전전긍긍했고 무려 1,260명이 넘은 사상자를 냈다. 여기서 14군 사령관 슬림 중장이 교체되었다고 일부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루머이다.

윌리엄 슬림 중장의 행적을 살펴보면 경질은 커녕 임팔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동남아시아 연합부대 사령관의 직위에 올라 태평양 전쟁 내내 버마-인도 방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거둬 최종적으로 육군 원수까지 진급하였고 전후 우리나라의 육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제국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호주 총독 등을 역임하는 등 몽고메리 못지 않은 전쟁 영웅 대접을 받은 인물이다. 일단 전쟁 초기 패퇴를 거듭하던 버마-인도 방면의 영국군을 성공적으로 재정비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실제로 1942년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도-버마 전선에서 활약했다. 슬림이 교체되었다는 낭설은 전쟁 말기 그를 시기했던 상관 올리버 리즈 장군이 슬림을 말레이로 진격하기로 되어 있던 14군에서 후방 주둔인 12군 사령관으로 교체해 버리려고 했던 사건이 와전된 것이다. 이후 오히려 리즈가 해임되었고, 슬림이 진급하여 리즈의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어쨌든 600명에 불과했던 미야자키 부대는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린 셈이었다.

뒤늦게 일본군의 실제 병력이 극소수라는 점을 간파한 영국군이 일본군을 따라다니는 전술 대신 주기동로의 방어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술을 바꾸면서 결국 영국군은 일본 15군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일본 15군은 퇴각에 성공한 이후였다. 이후 미야자키 지대는 영국군의 저지선을 돌파하여 대부분의 지대 병력을 유지한 채 곳곳에 남겨진 부상병들과 31사단, 15군의 낙오병마저 수습하면서 퇴각에 성공했고 이 전공으로 미야자키는 중장으로 진급한다.

4 종전까지

임팔 작전 후에 제54사단장이 된 미야자키는 1945년 4월에 이라와디 강 하류 부근에서 방위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4월말 상급부대인 버마 방면군 사령관인 인간모양의 폐기물이[3] 사령부를 내팽개치고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지휘계통을 잃어버린 미야자키 사단은 적 한가운데에 완벽하게 고립되어 버렸다. 전멸 직전에 중장비를 방기 및 폐기하고 적진에 분산 돌파를 시도, 이라와디 강 지역 베그 산맥의 대나무숲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분산 돌파 이후 압도적인 병력 차이 때문에 하급부대가 모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진데다, 상급부대와의 보급도 통신도 끊어진 54사단은 전군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어찌나 고생했는지 20년 뒤에 숨을 거두면서도 이때 흩어진 부하들을 걱정하는 말을 남겼을 정도. 7월 하순에 다시 부대를 분산하여 적진 돌파를 시도했지만 장병 대다수가 사망, 목적지였던 싯탄 강까지 도착한 것은 반수 이하였다. 미야자키는 싯탄 강을 도하하지 않고 끈질기게 방위전을 계속하던 와중에 종전을 맞이한다.

5 전후

이후 전쟁이 끝나고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2년 이상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하였다. 시게사부로는 수용소에서 부하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대해 항의하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 후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자 시게사부로는 도쿄 근교의 소도시에서 그릇 가게를 차려 생계를 이어갔다. 1965년 8월 30일 향년 73세로 숨을 거두기전 혼수상태에서 "적중 돌파로 분리된 부대를 어떻게든 장악해야 한다" 라는 말을 남겼다. 몇몇 사람은 시게사부로가 소련군의 종심타격 전략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였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이 말은 54사단장이 된 후 15군 사령관네 족속들 버마 방면군 사령부가 모두 야반도주, 지휘계통 붕괴로 연합군속에 고립된 뒤 일점돌파가 어렵자 이라와디 강 지역에서 분산돌파로 우군지역으로 올 때 베그산 근방에서 분단된 부하들을 평생 마음에 두고 살았던 까닭에 나온 것이다. 어찌 보면 PTSD.

맡은 바의 일을 잘 수행하였던 훌륭한 군인이 저 세상으로 가던 날 옛 상관이라는 작자주체할 수 없는 개그 본능을 발휘하여 임팔 작전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찌라시를 돌렸다. 유가족과 조문객은 상갓집에서 개드립을 친 죄로[4] 이 저주받은 불청객을 폭언과 멱살잡이로 맞아주었다.
그리고 2년 후 위의 이유로 상갓집에서 멱살 잡혔던 분은 "임팔 작전의 실패는 내 잘못이 아닌 부하들의 잘못이었다"라는 말을 끝으로 숨을 거둔다.(...)끝까지도(...) 아아 그는 참된 예능인....

6 평가

임팔 퇴각전에서 미야자키 지대장은 진지 구축 작업과 최전선 전투 현장을 직접 챙기며 부하들과 늘 함께 했고 항상 선두에 서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모범적인 군인의 모습을 보였다. 또한 무모한 작전과 반자이 돌격으로 많은 장병들을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게 만든 대부분의 육군 지휘관들과는 달리 절대로 반자이 어택이나 옥쇄 같은 자살 행위를 금하였으며 항상 부하들과 함께 하며 한 명의 부하라도 살려서 돌아가려고 최선을 다했다. 일본 육군 내에서는 그야말로 별종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을 뜨기 전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부하들을 구해야 한다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 이 사람이 얼마나 부하들을 아끼는 상관이자 대인배인지 짐작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노획무기는 지속적 노획을 하지 않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해서 집단으로 이를 사용하는 것은 큰 문제지만, 이 때의 일본군은 자기네 무기를 써봤자 보급이 안왔다(...)
  2. 일본은 전국시대 부터 이런 부대를 신가리라고 불렀다.
  3.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금지어사령관학살은 안했다.
  4. 이건 단순한 개드립과는 격이 다르다. 고인드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