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식

1 구한말의 관료, 일제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

민원식

1886 ~ 1921

구한 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의 관료, 사상가였다. 한일합방 조약 직후부터는 조선인 참정권과 자치권을 주장하였다. 1907년 일본에 방문했다가 조선인을 동물원에 놓고 관람시키는 것에 충격받아 돈을 주고 빼온 뒤 일본정부를 강력 디스했다.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의 친정 조카사위이다. 영친왕의 외삼촌 엄준원의 사위이다.[1]

1.1 생애

고아에 떠돌이로 알려졌지만 그의 친아버지와 양아버지가 모두 1910년대까지도 살아 있었다. 양아버지 쪽으로는 약간 멀긴 하지만 명성황후는 14촌 할머니 뻘이 된다. 어깨너머로 배운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아 관립한성외국어학교의 일본어 교사와 중국어 교사에 추천되었지만 모두 사양했다.

1905년 경무청총순이 되었으나 사퇴했다가 한달만에 다시 임명되었다. 그러나 1년만에 사퇴했다.

영친왕의 관례를 마친 뒤 순헌황귀비를 황후로 책봉시킬 목적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이때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동물원에 놓고 관광객들에게 구경시키는 것에 충격받아, 조선인 남녀를 돈 주고 빼온 뒤 일본 정부에 항의했다. 일본 체류 중 보건, 위생에 관련된 것을 입수하여 귀국 후 대한제국 내부 위생국장, 광제원 병원장 등을 지냈다. 1907년 내부 서기관에 임명되었으나 반년만에 사퇴했다.

한일합방 이후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1926년에 가서야 일본의 평민, 부라쿠민들에게도 참정권, 선거권이 허용됐는데 조선에 허용될 리가 없었다. 민원식은 이규완과 함께 1910년부터 조선참정권, 조선인 자치권 운동을 시작했으나 외면당했다.

1911년 양지군수가 되고 1913년 양지군수에 유임, 1914년 경기도 이천군수, 1915년 7월 고양군수로 부임하였다. 1919년 3.1 만세 운동에 반대하고 무력 시위를 한다고 바로 독립되지는 않는다며 매일신보에 비판적 논조의 칼럼을 실었다. 1919년 11월 고양군수직을 사퇴하고 중추원 부찬의로 전직하였다. 고양군수를 사퇴한 11월부터 12월 일본의 지식인들을 찾아다니며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

1919년 8월과 1920년 1월 조선인 참정권을 요청하는 연명 탄원서인 건백서를 일본 정부와 하원 중의원에 보냈다.[2]

1920년에는 국민협회를 조직하여 참정권, 자치권 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1922년 일본 귀족원(상원)과 중의원(하원)에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을 청원하러 갔다가 제국호텔에서 숙박하던 중, 양근환의 칼에 맞아 죽었다.[3] 양근환은 목수라고 자칭했지만 거친 일을 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고운 손이었던 점이 일본 경찰에게 의심받아 체포당한다.

민원식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숨졌다. 이 사건으로 도쿄를 방문한 방정환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조선 독립이나 민원식 암살 가담자로 지목되어 수사,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당했다.

1.2 공창제 설치

일본에 다녀와서 보건, 위생을 홍보하면서 그는 공창제 도입을 주장해서 실현시킨다.

내부 위생국장 재직 중 1906년 2월 성매매 여성 성병검진을 실시한 뒤, 공창제를 발표하여 성매매여성의 위생, 성병 문제 등을 관리하였다.

1.3 영향력

조선총독부에서는 민원식의 의견을 일단 접수하면서도 묵살했다.

그러나 1936년부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조선인 자원 입대자들이 늘어나자, 결국 조선총독부도 조선인 참정권 요구를 무시하지 못하고 1940년부터는 일본 본국 정부에 조선인 참정권 허용, 자치권 허용을 건의하였다.

결국 1945년 2월에 가서야 일본 상원인 귀족원에 조선인 의원들이 당선되었다.[4]

1.4 기타

민원식은 국민협회를 결성하고 이익을 얻지 못했다.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 대다수여서 호응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재산을 사재를 털어서 활동했다.

독립운동가 김규면은 비루하고 어리석은 사상이라고 평하면서도, 그의 자치권 참정권 활동을 독립운동의 하나로 간주했다.

2 한라중공업, 만도 출신 기업인

1962 ~

1997년 한라중공업 법무담당, 법정관리실장이었고 1999년부터 2014년까지 위니아만도에서 근무했다.

1999년 위니아만도 기획담당 이사가 되고, 만도 기획실장, 기획재무본무장,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2008년 7월부터 14년 11월까지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

3 한국방송광고공사 출신 기업인

1959 ~

한국방공광고진흥공사

1984년 방공광고진흥공사 제4기 공채로 사원으로 입사해서 정책협력국장, 영업2국장, 상근이사 겸 영업본부장까지 지냈다.

  1. 엄준원은 원래 엄진일의 아들들 중 한명인데, 아버지 엄진일의 동생인 삼촌 엄진삼이 아들이 없어 삼촌 엄진삼의 양자로 입양했다. 사촌여동생인 엄귀비의 오빠가 되었다.
  2. 이 영향으로 그가 암살당하고 1년 뒤인 1922년 2월에도 조선인 참정권을 요청하는 지식인들의 탄원서가 일본 하원과 상원, 내각에 보내졌다.
  3. 윤치호는 이를 두고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한 테러행위로 보았다.
  4. 물론 이전에도 1939년 박영효가 일본 천황이 추천하는 천황 몫의 귀족원 상원의원으로 임명된 사례는 있다. 1942년에는 박중양이 귀족원 의원에 추천되었으나, 박중양은 처음에는 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