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Victoria Adelaide Mary Louise
영국의 공주이자 독일 제국의 황후.

1 소개

영국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장녀. 프로이센 왕국의 왕비, 독일 제국의 황후이자 영국 역사상 4번째 프린세스 로열[1]로 태어났다.

아들을 기대한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에는 맏이인 빅토리아 공주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으나, 이내 빅토리아 공주를 무척 사랑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공주는 형제들 중 가장 총명했고, 당대의 지성인 중 하나였으며, 엄친딸 특히 아버지의 사상을 물려받아 자유주의를 지지했다.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 부부는, 빅토리아 공주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항상 아쉬워했다고 한다. 당시 영국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남동생 에드워드 7세가 누나 빅토리아 공주를 제치고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2]

2 결혼과 양육

빅토리아 여왕은 딸을 항상 곁에 두고 외국에 시집 보내고 싶지 않아했으나, 앨버트 공의 의향으로 프로이센 왕세자와의 혼약이 체결되어 1858년 1월 25일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했다.

프로이센 왕실에서는 두 사람이 베를린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했지만, 워낙 아꼈던 딸인 데다 빅토리아 여왕의 독단적인 고집까지 맞물려 빅토리아 여왕은 프로이센 대사를 불러 "영국 이외의 장소에서는 결혼식을 할 수 없다"고 통보해 결국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3]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았고, 4남 4녀를 낳았다. 프리드리히 3세 또한 아내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자였기에, 결혼 생활은 행복한 편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부장적인 프로이센에서 똑똑한 자유주의자인 빅토리아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특히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의 정치적 대립이 심각했다고. 거기에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자의 미덕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 아우구스타는, 총명한 며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아우구스타는 손자 빌헬름 왕자를 빅토리아 왕세자비에게서 빼앗아 자신이 양육했고, 할머니 아래에서 자란 빌헬름 2세는 부모의 성향과는 반대되는 군국주의자로 자라났다.

이런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모자의 불화는 당대에도 유명했다. 빌헬름 2세는 어머니를 반쯤 영국의 스파이로 여겼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자마자 어머니 빅토리아가 영국 왕실의 일원들과 가족 서신이라는 명분 하에 주고 받은 반역적인 편지와 서류들을 찾아내겠다며 어머니의 처소를 폐쇄해 버리고 개인 서신까지 전부 검열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이다.

또한 대영제국의 첫째 공주라는 높은 신분과 친정의 위세 역시, 빅토리아의 프로이센 궁정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일부 프로이센 귀족들은 영국이 빅토리아를 통해 내정간섭을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앞서 언급된 비스마르크는 물론이고 아들인 빌헬름 2세마저 공유했던 의견이었다.

실제로 빅토리아는 정치적으로는 시아버지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의 견제에 밀려 딱히 친영국적 행보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녀들을 키울 때 철저하게 영국인 가정교사의 손을 빌려 영국식 교육법을 고수하고, 주치의를 선별할 때도 독일 의사들을 제치고 영국 의사들을 최우선적으로 신임하는 등, 일상적인 궁정습관이나 가정생활에서는 철저히 친영국적이었다. 영국풍을 선호했던 남편 프리드리히 3세는 아내의 이런 습관들을 좋아했지만, 안 그래도 외국인 왕족이 껄끄러운 귀족들이나 신민들 입장에서는 곱게 보일리가 만무. 이런 탓에 빅토리아는 평생 "영국 여자"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재정적인 면에서도 빅토리아는 독일 궁정에서 푸대접을 받았는데, 추정 왕위계승자였던 시아버지 빌헬름 1세가 형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고 남편 프리드리히 왕자도 정식으로 왕세자가 되어 신분이 완전히 바뀐 뒤에도 연금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프리드리히와 빅토리아 부부가 연유를 묻자 "왕세자에게는 이미 엄청난 영국인 부자 마누라가 있으니까 연금을 올릴 필요가 없음"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이는 아들 부부가 자신과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던 빌헬름 1세가 안 그래도 부유한 그들에게 연금까지 올려주면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에 반하는 정치 세력을 거느리게 될 것을 염려한 노골적인 견제였지만, 빅토리아의 신분과 재력이 독일 정계에서 어느 정도로 위협적이었는지 반증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덕분에 빅토리아 왕세자비는 왕세자의 체통에 맞는 궁정을 운영할 경비가 부족해서 지참금과 개인재산을 써야 했고, 부부 동반이 당연한 공무여행에마저 공금이 안 나와서 제대로 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빅토리아를 딸들 중 가장 사랑했던 친정아버지 앨버트 공은 딸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그들(독일인들)이 빅토리아를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며 화를 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고.

3 사망

1888년 3월 9일, 시아버지 빌헬름 1세 사후 남편 프리드리히 3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황후로 등극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 전부터 심각한 후두암에 걸려있어서 빅토리아 황후가 남편 대신 온갖 정무를 처리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3세의 후두암 치료를 둘러싸고 영국독일 의료진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고, 결국 프리드리히 3세는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즉위 3개월만에 사망했다.[4]

아들의 즉위 이후 빅토리아 황후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지내다가 유방암에 걸려 1901년 8월 5일[5] 6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 Princess Royal. 왕이 재위 중 얻은 첫째 공주에게 주어지는 칭호.
  2. 오늘날 그 오늘날이 2015년부터라는 게 함정 영국 왕실에서는 남녀 구별 없이 출생 순서에 따라 왕위 계승 순서가 정해진다.
  3.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도 아버지 앨버트 공의 뜻으로 헤센 대공국에 시집갔고, 그 때문에 더 이상 딸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은 남은 딸들을 절대로 외국에 시집 보내지 않았다.
  4. 덕분에 1888년은 '세 황제의 해(Dreikaiserjahr)'로 불린다.
  5.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약 7개월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