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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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지 말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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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마리 장바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 1900년 6월 29일 ~ 1944년 7월 31일[1])

현재 독일기에 격추되어 추락했음이 격추한 독일 조종사에 의해 밝혀졌다.
격추한 그 조종사는 그의 팬이었다고..

1 개요

프랑스의 작가 및 공군장교. 무엇보다 어린 왕자 작가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

1.1 일생

리옹 시에서 태어났다. 1917년에 보쉬에 고등학교와 생 루이 고등학교에서 해군 사관학교 입학을 준비하였으나 1920년 징병으로 공군에 입대하여 1922년 1월에 남불 이스트르에서 육군 비행 조종 학생이 되어 군용기 조종 면허장을 땄다. 그 해 10월, 예비 소위에 임관되었고. 첫 저서인 <비행사(L'aviateur)>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제대하고 소레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여 앙드레 지드, 장 프레보와 사귀었으며 이때 발레리, 지로두, 아인슈타인 등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1926년부터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지배 하에 있었던 현 모로코카사블랑카, 현 세네갈다카르간의 정기 우편 비행에 종사하며 이듬해인 1927년에 <남방 우편기(Courrier Sud)>를 집필하여 작가로 데뷔하였고 3년 뒤인 1930년에 이를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하였으며 그 해 6월에는 <야간 비행(Vol de Nuit)>를 집필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1월에 고메즈 까리요라는 신문 기자의 미망인 콘수엘로 슁생과 결혼하였고 12월에 <야간 비행>로 페미나 문학상을 받았다. 1933년 민간 항공 회사인 라테코에르 사에 입사하여 테스트 파일럿이 되어 생 라파엘 만에서 수상기를 테스트하는 중에 사고를 일으켰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1939년 2월에 <인간의 대지>를 출판하여 그 해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하였고, 육군 정찰기 조종사가 되었다. 하지만, 1년 뒤인 1940년 <성채(Citadelle)>의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 때문에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되어 다 완성하지 못하고 12월에 미국 망명을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1개월 뒤인 1941년 1월 뉴욕에 도착하여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를 집필하였으며 2년 뒤인 1943년 4월에 그 유명한 어린 왕자를 출간하였다. 5월 4일, 연합군에 합류하여 북아프리카 공군으로서 우지다에 집결한 최초의 민간 프랑스인으로 알제리에 도착하여, 7월에 튀니지 부근의 라 마르사 기지에서 미 제7군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1944년 5월 16일, 사르데뉴 섬의 알게로 기지에서 2-33 정찰 비행 대대로 복귀하였고 7월 31일 오전 8시 30분에 리트닝 기지를 출발하였으나, 프랑스 본토로 정찰을 떠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고 실종자가 되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그는 약 반 세기만에 사망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남기는데...

1.2 죽음을 둔 논란[2]

항상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어했던 생텍쥐페리는 결국 1944년 7월 31일, 지중해 상공에서 P-38 라이트닝을 몰다 실종되었다.[3] [4] 그리고 1998년 4월 마르세이유 남동쪽 해저에서 어부 장 클로드 비앙코가 우연히 그물로 그의 이름이 적혀진 팔찌를 건져올림으로서 그의 행방이 드디어 밝혀졌다. 수중탐사장비로 바다 깊숙히 가라앉은 라이트닝 정찰기를 발견함으로서 그의 최후도 밝혀진 셈. 하지만 이해가 안가는 게 그동안 제기되어 온 독일군에게 격추당했으리라는 짐작과 달리 비행기 겉에는 총탄 자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비불량이나 아니면 일부러 마지막 비행에서 스스로 추락한게 아닌가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2008년 3월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에게 훈장도 받은 공군 에이스 조종사인 호르스트 리페르트(Horst Rippert. 1922-2013)가 생텍쥐페리를 격추했다고 주장하며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더불어 프랑스에서 건져올렸다는 팔찌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시각이 많다. 생텍쥐페리의 아내인 콘수엘로 순신 산도발(1903~1979) 집안 사람들은 비웃었다. 마지막 비행 지점으로부터 200km 이상 떨어진 곳이었기에 결국 자살한 거 아니냐는 주장으로 조작했다며 일절 믿지 않았다. 하지만 해저 탐사로 잔해를 발견했다는 잠수부 뤽 반렐은 자살설을 믿었으며 무엇보다 당시 드 골에게 나치 협력자로 몰리고 여러모로 고달펐던 생텍쥐페리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주장을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텍쥐페리의 친한 친구인 기욤을 비롯한 이들도 그가 마지막 얼마전까지 굉장히 말이 없었고 우울했었다는 증언을 했으며 죽기 하루 전인 7월 30일 비행전에 친구들과 같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어느 여인(전혀 모르는 여인이었다고)에게 "나와 함께 수영하지 않을래요? 내일이 되면 난 여기에 없을지도 몰라요.”라며 쓴웃음짓는 바람에 친구들이 불길한 농담 말라고 한 일화까지 있다.

가정적으로도 그는 매우 고민했다. 아내인 콘수엘로는 엘살바도르 출신 여성으로 이미 나이 27살에 남편을 2번이나 여의거나 이혼한 과부였다. 지방귀족 출신으로 좀 보수적인 생텍쥐페리 집안은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아서 1931년 결혼하고 13년동안 그녀를 무시해왔기에 그의 고민은 늘어갈 수 밖에 없었다. 둘이 서로 사랑하고 사이도 좋았지만... 두 사람 다 불같은 열정과 때론 확 식어버린 냉기로 갈등하다가 잠깐 별거하는 듯 하더니 다시 불같이 합쳐지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한다. 어린왕자 때문에 순수하다고 사람들이 오해한다는 편견이나 인식과 달리 그는 매우 정열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고 그의 집안에선 콘수엘로를 내쫓아서 그녀는 어린왕자의 유명세와 달리 잊혀졌다. 원래 돈많은 과부라서 경제적으로 어렵진 않았지만 그녀는 이후 여러 다른 사람들과 사귀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텍쥐페리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하여튼 상당히 드라마틱한 인물이었다.

2 대표작

제목연도
비행사(L'aviateur)1922
남방 우편기(Courrier Sud)1927
야간 비행(Vol de Nuit)1931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1939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1941
어린왕자(Le Petit Prince)1943

3 여담

[5]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유로화 채택 전까지 고유 화폐인 프랑스 프랑#s-4.4을 사용했는데, 그 중 4차 형태의 50프랑에는 생텍쥐페리의 얼굴과 그의 비행선, 그 비행선의 이동경로, 어린왕자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그려져 있었다.

Aviation Week & Space Technology지에서 뽑은 항공 우주 분야에서 손꼽히는 인물 100인 중 공동 25위에 꼽혔다.(다른 한명은 크리스토퍼 크래프트. 제미니 계획부터 초기 우주왕복선 계획까지 유인우주선 계획을 총괄 관리한 인물) 어린왕자, 야간 비행 등 항공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집필한 것이 크게 작용한 듯 하다. 참고로 생텍쥐페리 바로 아래의 순위는 어느 석기시대 매니아.

  1. 정확하게는 실종된 날이다. 1990년이 되여서야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행기 잔해가 발견되어 실종된 당일에 추락사했다는 설이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다.
  2. 이 문단은 어린 왕자에 먼저 실렸던 것이다(...)
  3. 이케르 중장에게 끈질기게 부탁하여 정찰기로 5번의 비행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그가 지원한 임무는 여러모로 위험했으므로, 이를 이유로 하여 비행허가가 쉽게 나지 않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긴 했지만 상륙 직후 약 2달간은 연합군의 진격이 더뎠으므로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은 아직 나치 독일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게다가, 그가 탑승한 P-38 라이트닝 정찰형의 경우 해당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비무장에다 비행성능도 압도적이지 않았다. 그런 판에 동료기를 대동하지 않는 단독 비행이었으므로 독일군의 공격에 매우 취약할거란 건 뻔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날고 싶어하여 장군은 3번을 추가로 더 허락했고 8번째 마지막 비행을 하던 와중에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4. 하지만 나중에 드러난 사실은 바로 샤를 드 골과 생텍쥐페리 사이가 나빠서 비행을 허락하지 못했다는 게 드러났다. 드 골은 생텍쥐페리가 1943년 나치와 손잡았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2차대전이 끝나고 드 골은 자신이 잘못 알았다며 작은 사과를 한 바 있다.
  5.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