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자스-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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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Alsace-Lorraine (알자스-로렌)[1]
독일어: Elsaß-Lothringen (엘자스-로트링겐)

1 소개

프랑스독일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의 행정 구역들[2]. 중심 도시는 스트라스부르.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주요한 분쟁지역이었다.

2 왜 알자스-로렌이 중요한가?

2.1 자원

라인강과 보주산맥 사이에 위치해 있는 알자스는 기후가 온화하여 포도주를 비롯한 농산물과 목재가 풍부하고, 알자스 북서쪽에 위치한 로렌은 평야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로렌 지방은 석탄과 철광석 때문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철광석의 90% 이상이 알자스-로렌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인접한 독일의 루르, 자르 지역은 독일 석탄의 50% 이상이 매장된 대표적인 석탄 생산지여서, 양 지역의 철광석과 석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두 나라의 노력은 끊임없는 충돌로 이어졌다.

출처는 이곳

간단하게 말하면 '꿀땅'. 프랑스 철광석 90% 이상의 매장량에서 말 다했다. 아래의 역주에서도 나오는데, 1913년 독일 철강산업이 필요로 하는 철광석의 35%가 로렌에서 산출되었다. 로렌의 철광석이 저품위에 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만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랑스든 독일이든 이 지역을 상실할 경우 경제계에 미칠 파장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독일은 35%였지만 프랑스에는 90%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보다 프랑스의 천연자원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프랑스에게 더더욱 절실한 땅이다. 덤으로 이곳은 이미 관련 산업시설들이 잘 발달된 곳이다. 즉, 땅만 얻으면 저 풍부한 자원을 바로 개발된 상태로 사용 가능.

2.2 지리학적 중요성

알자스와 로렌은 유럽의 젖줄인 라인 강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면 라인 강과 아르덴 고원이 프랑스 동쪽을 방어하는 천혜의 장벽이 될 뿐 아니라 라인 강을 관통하는 독일의 교통로를 단절시켜 전략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알자스와 로렌을 점령하면 라인 강을 통해 직접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링크)

즉, 독일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라인강을 건너는 수고로움 없이 프랑스지역으로 진출이 가능하고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라인 강을 방어선삼아 프랑스지역을 방어 할 수있다.

3 역사

알자스-로렌이 비교적 동질한 한 지역처럼 다루어지고 있지만, 역사, 문화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 지역이다. 로렌(독일명 로트링겐)은 세 주교령을 제외하면(로렌영역의 25%) 대부분 로렌 공국(로트링겐 공국)의 영토로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주교령과 합스부르크 영지들로 잘게 나누어진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지만 17세기에 프랑스가 점령했기 때문에 근대에 그 귀속을 놓고 많은 문제가 있었고 복잡한 사연이 있다.

프랑크 왕국 분열 당시 알자스-로렌은 중앙의 로타르 왕국의 중심지였다. 라틴어로 로타르의 왕국(Lotharii Regnum), '로타링기아Lotharingia'라고 불리는 이 왕국이 이 지방을 가리키는 어원이 된다. '중부 프랑크 왕국'이라고도 불리는 왕국인데, 엄밀히 말하면 로타르 1세의 왕국이 중부 프랑크 왕국이며, 로타르 1세는 자식들에게 분할 상속을 했는데 각각 루트비히 2세의 이탈리아 왕국, 로타르 2세의 '로타링기아 왕국', 샬를의 '프로방스 왕국'이다. 이 가운데 샤를이 제일 먼저 죽어서 프로방스 왕국이 이탈리아, 로타링기아로 분할되었고, 다음으로 로타르 2세가 죽자 로타링기아가 동서 프랑크 왕국에 분할되었다.

독립된 왕국은 소멸했지만 '로타링기아 왕'이라는 칭호는 869년 부터 922년 까지 서 프랑크 왕이 차지한다. 922년 부터는 동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물론 알자스-로렌지방은 동 프랑크의 영토이다.

이 영토는 신성 로마 제국 산하에서 상로트링겐(上) 공국과 하로트링겐(下) 공국으로 갈라졌는데, 하로트링겐 공국은 이후 유명무실화되면서 브라반트 공국[3]으로 변하고 상로트링겐 공국이 살아남아 로렌 공국으로 불리운다.

로타르 왕국이 있던 지역을 로타링기아로 부르는데, 중세 후반기에서 근세의 시점에서 로타링기아가 독립국으로서 거의 부활할 단계까지 갔었다. 이것은 발루아 왕가의 왕자로서 부르고뉴 공작(왕자령으로서 받았다)이었던 필리프 3세(선량공)과 샤를(용담공)의 노력으로서 백년전쟁 후반기에 필리프 3세와 프랑스왕 샤를 7세가 아라스에서 필리프의 영국지원을 중지시킨 대가로 샤를이 필리프에게 사실상의 독립을 허용한 일에서부터 이루어 지기 시작하여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와 부르고뉴 백작령(현재의 프랑스 영토인 프랑쉬-콩테 지역)을 정복하면서 로타링기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두 발루아 왕가 출신 부르고뉴 공작들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로렌과 알자스로, 샤를은 로렌의 정복에 대한 명분축적과 프랑스-정확히는 루이 11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신성 로마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에게 "로타링기아(부르고뉴)의 왕"이라는 칭호와 대관을 받으려고 시도하였고 거의 성사직전까지 갔었다.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로타링기아 왕국이 부활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태가 되는 것이었지만,황제가 대관식에 나오지 않아서 자동적으로 파기되었다. 그리고 로렌의 격렬한 저항에 봉착한 샤를이 드디어 전사함으로써 '로타링기아'의 부활은 프랑스 왕가가 핵심지역 중 하나인 부르고뉴 공작령을 남자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회수함으로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18세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가문의 상속자가 되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오스트리아 대공위와는 상관없이 신성로마제국의 제위 계승은 불가능했으므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으로, 로렌 공작이었던 프랑수아 에티엔(프란츠 슈테판)[4] 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가 되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세력다툼 끝에 로렌은 1736년 옛 폴란드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Stanisław Leszczyński)[5]에게 사후시 영토를 다시 프랑스에게 환수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주어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와 프랑스간의 거래로 인해 사위였던 프랑수아는 자신의 땅을 포기해야 했고, 보상으로 이탈리아토스카나 대공국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1766년 마지막 로렌 공의 죽음 이후 프랑스에 환원된 이후로 로렌 공국은 최종적으로 프랑스령이 되었다.

메스와 베르됭 등 이미 로렌 지방의 일부는 앙리 2세 시절부터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는데 반해, 알자스 지역은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이 지역과 알자스의 부분적인 병합이 인정되었으며, 1697년에는 프랑스가 전쟁을 통해 알자스 전역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이 이후 전후로 치면 200년 동안 프랑스화가 이루어졌고, 프랑스 대혁명을 프랑스와 같이 치르면서 프랑스란 국민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그 뒤 나폴레옹시기 때 그러한 프랑스 국민의식이 확고해져 독일제국이 강탈한 이후 1887년 까지 이 지역에서는 합병 항의파들(시위대+카톨릭)이 제국의회에 의원으로 선출될 정도였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패배하고,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알자스의 대부분과 로렌의 일부를 독일 제국이 강제로 합병했다. 독일어를 쓰는 지역 뿐만 아니라 주요 철산지도 강제병합해[6] 프랑스의 국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친프랑스적 기조에서 마지막 수업을 썼다.[7] 알자스 지역 주민들의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했던 정황은 마지막 수업의 내용에도 여실히 드러나긴 한다. 이 때문에 독일도 독일-프랑스어 사용정도에 따라 영토를 새로 나누는 프랑크푸르트 조약에서도 역사적+@의 이유로 프랑스어 구사자가 많은 메츠 시와 Château-Salins 시, 그 주위를 가졌지만 로렌지방은 25%만 자국령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프랑스의 영토로 인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패배하여 점령되자, 나치 독일은 북프랑스와 함께 알자스-로렌을 전격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강점하였다. 전황이 좋은 초기에는 전후 유럽을 이끌 파트너로 비시 프랑스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영토적인 합병은 하지 않았다가 1943년 공식적으로 합병한다. 전황이 악화되자 충성심이 의심스러워 징집하지 않았던 알자스-로렌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하는 비극도 나왔다.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다시 프랑스가 돌려받았으며, 프랑스 정부는 1차대전 이후 시도했던 많은 프랑스화 정책을 포기하였고 이는 알자스-로렌 주민들의 반발을 누그러트리는데 일조했다. 결국은 주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3.1 알자스-로렌과 한국의 연관성?

역사적으로 주변 세력에 끊임없이 시달렸다는 점에서 이 지역을 프랑스가 차지해 온 역사와 한국의 식민시절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한국과 일본이라는 형태의 국가로 각기 수백년간 서로의 영역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아왔다가 20세기 초에 겪은 식민화 경험을, 수백년간 인적·물적·문화적 교류와 대립을 겪었고 여러번 영토의 주인이 바뀌기도 한 알자스-로렌에 그대로 대입시키기는 무리가 있다. 애시당초 저 지역의 역사가 한국-일본의 역사와 매치되질 않는다.

물론 알자스 지역에서 많이 쓰였던 알자스어는 독일어의 한 사투리이고 알자스-로렌 일대가 독일 제2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것은 의문의 여지도 없다. 또한 전부터 이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었고 결국 30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개입이 독일 국가에 대항한 침략적 행위가 아니었던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프랑스가 그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이렇게 점유를 하려한 노력의 영향으로 로렌과 알자스의 귀족들은 중세 후반기 이후로는 분열되고 약화되버려 말만 로마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보다도 프랑스 왕국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던 샤를 용담공의 기도를 로렌의 귀족들이 전쟁을 통하여 좌절시킨 것과(샤를이 전사하기까지 했다!), 기즈 공작 가문으로 기즈 가문은 애초에 로렌 가문 소속이다. 로렌에 본거지를 둔 기즈 가문은 위그노 전쟁에서 프랑스 가톨릭 진영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근대 이전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선이었던 알자스 로렌지방은 보불전쟁 후의 알자스 로렌의 독일합병은 애초에 비스마르크도 반대했을 정도로 19세기 중반에는 이미 프랑스에 많이 동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외교적인 명분을 들어 비스마르크는 합병을 반대했다. 그나마도 독일령 알자스-로렌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로렌 지방은 25%만 남기고 프랑스에게 줬는데도 친프랑스적이었다.

어쨌든 알자스-로렌이라는 분쟁지역이 없었다면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 요소가 현격히 줄었을 것이므로, 어쩌면 역사 자체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즉 이 작은 지역은 19세기와 20세 초반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쟁점지로 꼽혔다. 현재 알자스-로렌에 대한 인식은 2차 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프랑스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에서 벗어나고 독일은 전쟁에 두 번이나 져버리면서 데꿀멍해버려 양국 학계에서 연구된바 유럽 내에서 독일도 프랑스도 아닌 고유의 문화 지역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8]

이렇듯이 역사란 보는 관점과 후대의 평가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4 주요 산업

4.1 알자스(Alsace) 와인


와인
와인/색상화이트 와인 · 레드 와인 · 로제 와인
와인/용도식전주 · 테이블 와인 · 디저트 와인
와인/종류스파클링 와인 · 귀부 와인 · 아이스 와인 · 셰리 · 포트 · 토카이
와인/국가와인/프랑스 · 와인/이탈리아 · 와인/독일 · 와인/스페인 · 와인/칠레
와인/프랑스보르도 · 부르고뉴 · 샹파뉴 · 론#s-2.1 · 알자스#s-4.1 · 프로방스 · 랑그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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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이트와인의 대명사.

4.1.1 알자스(Alsace)와인의 특징

알자스 지방은 프랑스와 독일어권 문화의 접점지대였으며 본래 독일어권이었던 지역인 만큼, 타 프랑스 지역처럼 다양한 품종을 블렌딩한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단일 품종으로 와인을 양조하며 라벨에 그 품종을 명시하는 점에서 독일/오스트리아 와인 양조 문화와 유사점이 나타난다[9].

이 것 말고도 플뤼테(Flûte,플루트)라고 불리는 날씬한 긴 전통 와인 병과 전통 와인잔이 있는데, Vin du Rhin(라인강 와인)이라는 플뤼테의 이명처럼 독일의 라인강 일대 와인산지에서도 같은 모양의 전통 병과 잔을 찾을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라인강 건너 독일 등지에서는 통에서 갓 꺼낸 와인(Fasswein)을 판매할수 있지만 알자스에선 법적으로 병에 담겨진 와인만을 판매할수 있는 등의 차이가 있다. 화이트와인을 주로 생산하며 품종 또한 유사하지만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스위트 와인 계열을 흔히 볼수 있는 것에 반해 '알자스의 화이트 와인은 거의 드라이 계열이란 점에서 당연히 구분점이 있다. 물론 알자스 산 스위트 와인이 없는건 아니고 불어로 방당주 타르디브 (Vendanges Tardives, VT)라고 불리는 늦은 수확 와인이나 셀렉시옹 드 그랭 노블(Selection de Grains Nobles, SGN)라고 불리는 귀부 와인이 작황에 따라 전통적으로 극소량 생산되기도 한다. 소량 생산에 생산방식이 복잡한거라서 비싸다

4.1.2 알자스(Alsace)의 와인역사

알자스의 와인 양조는 로마 이전의 시대에 켈트족에 의해서 시작된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본격적인 활황기를 맞이하나 5세기의 게르만족 대이동에 의해 로마가 멸망하는 것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하여 알자스의 와인 문화는 무너진다.

그 뒤 다시금 알자스에서 와인 양조 문화가 성행하게 된 것은 수도회에 의한 것이었다. 9세기 경 그들이 기록한 문서에 따르면 160개 이상의 마을에서 와인 양조가 체계적으로 이뤄졌다고 하니 이를 통해 재건 되었음을 확인할수 있다. 이것이 16세기에 이르러선 절정에 이른다.

오늘날 와인용 포도 재배 면적의 약 2배 가량의 면적에서 와인용 포도가 재배되었으며 지금도 남아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와인 관련 당시 건축물에서도 그 영광을 확인할수 있을 정도로 번영했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리크위르(Riquewihr)(독:Reichenweier)의 와인 양조자 연합회에서 자발적으로 수확시기와 사용된 품종을 명시한 라벨을 붙이는 것을 관행화하는 등 현 AOC 제도와 거의 비슷한 문화가 정교하게 자리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성기는 17세기 30년 전쟁을 거치며 알자스에 기아와 페스트가 발생하고 지역이 황폐화되며 끝이 나게 된다. 사실상 모든 포도밭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40여년에 걸쳐 알자스는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되며, 혼란이 종식된 후 재차 산업 중흥에 박차가 가해진다. 19세기 초 3만 헥타르 가량의 면적에서 와인용 포도 재배가 이뤄지며 부활하였으나, 필록세라가 찾아오고 노균병이 횡행하는 시기를 거쳤고 철도의 발달로 저렴한 맥주의 소비가 대량으로 는 것에도 영향을 받았는지, 19세기 후반 알자스가 독일 제국에 강제 병합될 때에는 이것이 약 9,500 헥타르 수준으로 줄게 된다.

장기간 동안 알자스의 와인은 정립되어 있는 독일 와인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으며, 다시 프랑스로 알자스가 넘어왔음에도 그것은 현대 프랑스 와인 문화와의 결합된 모습으로서 알자스 와인 고유의 특징으로서 생산과 포도 품종 등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4.1.3 알자스(Alsace)와인 AOC등급

- AOC Alsace / AOC Vin d’Alsace
- AOC Alsace Grand Cru
- AOC Crémant d’Alsace
- AOC Klevener de Heiligenstein

4.1.4 알자스(Alsace)의 주요 와인

  • Schlumberger
  • Zind-Humbrecht
  • Marcel Deiss
  • Weinbach, Hugel
  • Trimbach
  • Leon Beyer
  • Rolly Gassmann
추가 예정

5 출신 인물

  • 잔 다르크 - 그녀가 전장에서 사용했던 십자 문양은 '로렌의 십자'로 알려져 자유 프랑스가 상징으로 쓰고 다녔다.
  • 기 사예르 - <잊혀진 병사>의 저자
  • 니콜라 빌렘 신부 - 안중근 토마스 의사 및 그의 집안과 친밀했던 프랑스인 신부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할 때 고해성사를 집전해 준 신부이다.
  • 아르센 벵거 - 아스날 FC의 감독
  •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
  • 에밀 뒤르케임(혹은 뒤르켕) - 사회학자. 문제는 이 양반이 주로 활동했던 국가는 프랑스인데, 당시 프로이센에 점령된 로렌 출신이었다는 것. 그래서 이 양반의 이름을 프랑스식인 뒤르켕으로 부를 것이냐 독일식인 뒤르케임으로 부를 것이냐를 가지고 한국 사회학계가 미친 듯이 싸운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뒤르켕이 대세였으나, 최근에는 출신 당시의 국적을 인정하여 뒤르케임으로 바뀌어가는 중이다.
  • 에밀 베낭트 - 프랑스의 축구선수

6 여담

주민들의 성씨는 다수가 독일계다. 또한 스트라스부르에는 유럽 의회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과 TGV 고속철이 부설된 것을 핑계로 삼아서 그랑제콜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ENA)가 파리에서 이전해왔다. 주민들은 프랑스보단 독일 쪽에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고, 그쪽으로 인적, 물적자원 교류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교통로도 독일과 가까운 편. 실제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자전거로 20분 밟으면 독일이다(…). 또한 이 지역의 철도는 일반적인 프랑스식의 좌측통행이 아닌 독일식의 우측통행이다. 심지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루프트한자 리무진 버스가 이곳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로렌 북부(모젤 데파르트망), 특히 메스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룩셈부르크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이는 룩셈부르크 국경 쪽 벨기에, 독일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룩셈부르크의 초월적인 임금수준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벨기에에 직장을 가진 경우도 꽤 있다. 이 모젤 데파르트망 지역은 대우그룹이 망하기 전까지는 대우그룹의 공장들이 원활하게 돌아갔던 지역으로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나서 지역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경험이 있다. 특히 벨기에 국경의 롱위 시는 이 때 당시 노동자들이 갈 곳을 잃어서 실업난이 꽤 극심했던 편이다. 이후 프랑스 물류기업들이 대거 들어오고 룩셈부르크란 대안을 찾으면서 상황은 나아진 편.

Strasbourg는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스트라스부르'로 표기하고 있지만, 프랑스 관광청 공식 한국어 페이지에는 '스트라스부르그'라 표기되어 있다.

Metz는 프랑스어로는 '메스' 이고 물론 우리나라의 프랑스어 표기법으로도 동일하지만 간혹 해외기사에 등장할 때 독일어식 발음인 '메츠'로 표기될때가 많다. 현지에서 '메츠'라고 발음하면 현지인들과 갈등 빚을 소지가 많다. 2016년 4월 7일 프랑스-독일 정상회담 기사 참고로 독일과 프랑스 두 정상 양쪽에게 있어 가장 접근하기 쉬운 도시가 메스이다. 파리에서 TGV로 1시간 반도 안걸리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면으로도 TGV노선이 연결되어있다. 파리에서 룩셈부르크를 갈 때도 메스를 거친 뒤 룩셈부르크로 넘어간다. 스트라스부르의 경우 독일 입장에서는 상당히 남쪽에 치우친 도시라 수도나 중심도시들과는 거리거 있는 편이며(다만 슈투트가르트와는 가까운 편) 파리에서도 TGV 기준 두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애초에 프랑스 동부방면 TGV 노선은 파리-메스-스트라스부르 순으로 지나간다.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하여 브뤼셀까지 가는 노선도 스트라스부르-메스-룩셈부르크-브뤼셀 순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노선에 유럽연합 본부가 세워져있는 도시들이 무려 3곳이나 된다.(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 브뤼셀)

알자스 사투리프랑스어의 영향인지 몰라도 발음체계가 심히 괴악하게 변해버렸다. 본디 독일 남부 사투리는 무성음-유성음 대립보다는 유기음-무기음 대립에 가까운데 무기음만 존재하는 언어의 영향으로 인해 k, g구별을 제외하고 파열음 음운이 애매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p-b, t-d 구별이 안된다) 근거자료(프랑스어)

알자스지방의 알자스어 뿐만 아니라 로렌지방에도 알자스어와 같은 로렌지방만의 사투리적인 언어가 존재한다. 다만 알자스어만큼 사용인구가 많지는 않은 편.

2011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 지역에서 농민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불공정한 거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독일 영토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해 파문이 일고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백두산을 중국 땅이라고 발언한 격이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사르코지 대통령도 이민자 출신이라 극우 민족주의가 다시 득세하는 프랑스의 정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세계맥주 점 같은데 가면 볼 수 있는 파란색 병의 프랑스 맥주 크로넨부르크(Kronenburg, 프랑스어로는 Cronenbourg(크로넝부르))는 스트라스부르가 원산지이다. 정확히는 주변의 작은 위성도시에 양조장이 존재한다.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의 주인공이 통치하는 지역이 바로 이곳의 이름을 땄다. 다만 현실의 알자스와 달리 자원이 많거나 하지는 않고 그냥 작은 변두리 지역이다.

미야자키 하야오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은 알자스의 소도시인 콜마르를 모티브로 하였다. 콜마르의 작은 시내공간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순간 바로 "아 여기가 모티브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콜마르는 지금은 독일과 프랑스 전국에서 유명해진 '크리스마스 마켓(Marché de Noël)'의 원조인 도시이다. 애초에 신성로마제국 시절 알자스에서 시작된 이 크리스마스 관련 행사가 신성로마제국의 후신인 독일과 알자스를 획득한 프랑스 전국으로 퍼져나가서 지금은 겨울철 독일과 프랑스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주요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1. 1차대전 후 프랑스에서는 Alsace-Moselle (알자스-모젤)로 불렀고 현재는 알자스 레지옹과 로렌 레지옹의 모젤 데파르트망이 되어있다. 로렌 레지옹은 모젤 데파르트망 이외에도 3개의 데파르트망이 더 있다.
  2. 독일 제국 소속일때 한 행정 구역이었고 프랑스 소속일땐 여러 행정 구역들로 나뉘어져 있는 지역일 뿐이다. 프랑스인들은 그 지역을 묶어서 알자스-로렌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안부른다.
  3. 현재의 벨기에 지역으로 벨기에 왕세자는 브라반트 공작이라고 불린다.
  4. 당시는 이미 로렌 공작 작위를 상실하고 토스카나 대공이었다.
  5. 루이 15세의 장인.
  6.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프랑스 양국에서 거의 동시에 나온 로렌의 철광석과 자르루르의 석탄을 우호적으로 공유하자는 제안이 수용되면서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창설되고 이것이 지금의 유럽 연합으로 발전한다.
  7. 근데 사실 여기는 예로부터 알자스어(Elsässisch, Alsacien)가 쓰여오던 곳인데, 알자스어는 고지 독일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지금도 알자스어는 이곳에서 조금씩 쓰이고 있다.
  8. 독일-프랑스 공동교과서
  9. 이는 비슷한 처지의 룩셈부르크 와인 역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