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삼국지)

  • 후한 말의 영릉태수인 劉度는 유탁 항목 참조.

劉陶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 ~ 255?)

자는 계치(季冶). 유엽의 아들.

회남 사람으로 명성과 칭송이 훌룡했고 뛰어난 구변이 있어 조상이 선부랑으로 삼았고 등양이 이윤, 여상이라고 칭송했으며, 부현에게 공자는 성인이 아니라면서 어떻게 내가 그걸 아느냐면서 현명한 자는 나라를 도모한다고 했다.[1] 부현이 당혹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서 천하의 본질이라는 것이 변하는 것으로 일정치 않다면서 그대가 궁지에 빠진 것을 볼 것이라 했는데, 조상이 패망하자 고향으로 돌아갔고 부현에게 그 말이 지나쳤음을 사과했다.

255년에 관구검이 거병할 때 사마사가 물을 때 대답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해 일정치 않았고 사마사가 화를 내면서 그대는 평생 나와 더불어 천하의 일을 논하면서 오늘에 이르러서도 아직 다 못한 거냐고 했으며, 평원태수로 내쫓겼다가 추격을 받고 죽었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전투외편 4-3 마지막 부분에서 순욱의 아들 순찬과 함께 짧게나마 언급된다.

2 후한 말의 인물

(? ~ 185)

자는 자기(子奇). 제북정왕 유발의 후손.

영천 영음 사람으로 위(偉)라고도 하며, 부유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았고 뜻이 맞는 사람이면 가난한 자라도 어울렸다. 같은 종족인 유개는 유도에 대해 높이 평가했으며, 유도는 태학에서 학문을 배우고 대장군 양기가 정치를 제멋대로 하자 이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환관 조충이 아버지가 죽자 옥갑[2]을 사용해 법도를 어기면서 기주자사 주목이 이 일을 조사해 묘를 파헤쳤다가 환제의 진노를 사서 좌교로 보내져 노역하게 되었으며, 유도는 이 일을 알고 주목을 변호해 사면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주목이 사면될 수 있었다.

주목, 이응 등을 황실로 불러 황실을 보좌하게 해달라고 상주했으나, 환제는 이를 살피지 않았다. 백성이 빈곤한 것은 화폐가 가볍고 얇기 때문이라 대전으로 고쳐 주조해야 한다고 상주하는 의견이 나오자 환제는 태위부, 사도부, 사공부, 대장군부에서 논의하게 했으며, 유도는 오늘날의 근심은 화폐가 아니라 백성이 굶주리고 있다는 의견을 밝히는 상소를 올리자 화폐는 개정되지 않았다.

후에 효렴에 올라 순양장이 되었고 현에는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많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모아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을 조사했으며, 병으로 순양장에 물러날 때 다시 순양장이 되어달라는 말이 나왔다. 상서, 춘추에 밝았고 사섭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시어사가 되었다.

장각이 태평도를 전파하자 태위 양사가 장각을 체포하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유도는 사도부의 연리를 지내면서 악송, 원공 등과 함께 상소해 작위를 주는 조건으로 장각을 토벌할 사람을 모집하자고 했다. 그러나 영제는 마음에 두지 않았고 유도에게 춘추조례를 정리하게 했으며,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영제가 옛 일을 기록한 상소를 열람하다가 양사, 유도 등이 올린 장각에 관한 상주문을 보고 유도를 능향후에 봉했다.

상서령에 임명되자 자신을 과거에 효렴으로 천거한 사람이 상서라 다른 관직을 부탁해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영제에 간언을 하다가 권력있는 자들이 그를 꺼려해 경조윤이 되었다. 유도는 관직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해 병이 있다고 했으며, 영제는 관직을 사는 것을 거절한 것을 용서하고 유도를 건의대부에 임명되었다.

185년 10월에 유도는 나라의 혼란에 근심해 상소했는데, 변장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은 지리, 전투에 밝아 하동, 풍익을 나와 함곡관과 통하면 낙양이 위험할 것이라 했다. 낙양이 위험한 것은 환관이 원인이라 했는데, 환관들은 유도가 황건적과 통한다고 무고했다. 유도는 황문북사옥에 갇혔다가 스스로 숨을 쉬는 것을 막고 죽었으며, 유도의 저서는 많았다고 한다.
  1. 원전에 玄이라고 적혀있어 하후현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일화가 실린 사료가 부현(傅玄)이 지은 부자(傅子)이고 하후현과 유도는 같은 조상 일파라 저런 논쟁을 했다해도 유도에게 궁지 운운할 이유가 없었다.
  2. 황제, 왕후의 장례식 때 사용하는 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