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찬

1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1

留贊
(183[1] ~ 255)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 자는 정명(正明). 유략, 유평의 아버지. 회계 장산 출신이다.

적을 만났을 때 머리를 풀어헤쳐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는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 뒤에 나가 싸워 백전백승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전적이 뛰어난 인물이지만 결국 73세의 나이로 전사하는 슬픈 인물이기도 하다.

1.1 생애

젊어서 군리가 되어 황건적의 난 때 황건적의 두목 오환과 싸워 직접 그를 죽였는데, 싸우는 도중에 상처를 입은 다리가 결국 덧나 다리가 굽어 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황건의 난은 184년이고, 유찬의 생년이 183년이라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황건적의 난이 아니라, 이후에 싸웠다고 봐야 옳다. 1살이 군리가 되서 황건적 두목을 죽이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장수가 될 것을 포기하지만 매우 열렬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는 책을 읽더라도 병서와 삼사[2]만을 읽었는데, 매번 명장이 전공을 세우던 형세를 보면 책을 보며 홀로 탄식하였다. 어느 날, 그는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 모은 다음

지금 천하가 어지럽고 소란하며, 영웅과 호걸이 나란히 일어나는데, 과거의 일을 두루 살펴보니, 부귀는 보통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건만, 나는 앉은뱅이가 되어 평민의 동네에 있으니, 죽으나 사나 달라질게 없소. 지금 내가 내 다리를 자르려는데, 다행히 죽지 않고 다리가 펴지면, 아마 다시 쓰임을 얻을 것이나, 죽으면 그걸로 끝이오.

라고 하며 자신의 다리를 자르려고 하자 친척들이 모두 그를 막았다.

하지만 이 똘끼 충만한 유찬은 틈이 생기자 기어이 칼로 다리의 근육을 자르니 피가 콸콸 흘러 한동안 기절한다. 집안 사람들이 매우 놀랐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일이 이미 일이 끝난 뒤라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결국 다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가 상처가 낫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능통이 그를 청해 만나보고 기이하게 여겨 표를 올려 유찬을 천거해 기용되었으며, 유찬은 거듭 전공을 세워 둔기교위까지 승진한다. 하지만 매번 시사득실에 대하여 간언을 하고 아첨을 하지 않고 직언만을 하니 손권이 그를 꺼렸다.

252년에 위나라가 제갈각이 쌓은 성을 공격하기 위해 제갈탄호준에게 7만명을 주어 적을 공격하게 했는데, 유찬은 제갈각의 명을 받아 여거, 당자, 정봉과 함께 선두 부대가 되어 파견된다. 당시 동흥의 위나라의 호준을 비롯한 장수진은 유찬 등의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두건과 칼, 방패만 갖춘 상태에서 술을 마시며 크게 웃고 떠들며 군대를 엄격하게 정돈하지 않았다.

유찬의 군대는 쉬진 않고 해안을 따라 올라가 산을 따라 서쪽 위로 간 다음에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적을 마구잡이로 베니 위나라 군대는 흩어져 부교를 건너려다 수만 명이 익사했으며, 낙안태수 환가가 익사하고 이 때 자신의 아비 한당의 시체까지 들고 위나라에 항복한 아들 한종을 붙잡아 참수하게 되니 이 공으로 유찬은 좌장군에 임명된다. 이때 유찬의 나이 70세.

255년에 관구검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좌호군이 되어 여거와 함께 손준을 따라 수춘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길에서 병에 걸리니 손준은 유찬에게 수레와 치중을 거느리고 먼저 돌아가도록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들은 제갈탄은 놓치지 않고 장반을 보내 유찬을 습격하게 하니 255년 2월, 결국 고파에서 유찬의 군대는 장반이 보낸 4천의 군사에 따라잡힌다.

유찬이 병이 깊어 진을 정비할 수가 없어 질 것을 깨달아 곡개와 인수를 풀어 조카에게 주고 말하길

내가 장수가 된 이래로 적을 파하고 기를 빼앗았지만 일찌기 진 적은 없었다. 지금 병이 깊고 병사는 약한데다가 수 또한 비교할 수 없으니 너는 어서 가거라. 모두 죽는 것은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다만 적을 쾌하게 할 뿐이다.

하지만 조카가 받지 않으려 하자 유찬은 칼을 뽑아 베려 하니 그제서야 조카는 곡개와 인수를 받아 떠났다.

거기다가 유찬이 걸린 병이 깊어 3년 전까지만 해도 팔팔하게 적진을 종횡무진으로 돌파하던 유찬은 자신이 평소에 즐겨하던 머리를 풀며 노래를 부르고 적으로 돌격하는 것도 못 하는 상태였으니 결국 패배를 맞게 되자 탄식하면서

내 싸움엔 항상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 이처럼 병이 깊으니 진실로 천명이구나!

라 외치며 손릉, 장수 등과 함께 전사하니 그의 나이 73세였다. 그의 죽음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깊이 안타까워했다.

그의 사후 장반은 전투에 승리하여 유찬의 목을 수도로 보내는데 그때 유찬의 관인과 부절도 함께 보낸다. 결국 그가 살리려고 한 조카도 죽게 되었다는 것.

1.2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무력, 통솔 70대에 나머지도 모두 60대를 기록하고 있는 준수한 무장. 심지어 수명도 길다. 다만 자가치료 기능은 아쉽게도 딸려있지 않은 것 같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3/74/64/58. 분투, 몽충을 가지고 있다. 아들도 가진 노병계 병법이 없어 아쉽다. 연의 때문인가 싶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4/75/66/55/65로 좋다고 말하기엔 애매하지만 훈련특기가 있으니 훈련셔틀로 쓰면 적어도 밥값은 한다. 근데 여기에 고증 오류가 있다. 정사대로라면 육손과 동갑인데, 10에서부터 생년을 172로 설정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 사실 생년이 183년이라면 중반기이나 후반기에 가면 쓸만한데 황건의 난, 군웅할거에 등장하지않은 유찬이 그렇게 설정이 되었으니 게다가 안 고쳐지고 최신작인 13편까지 이어진다.무슨 짓거리야. 그나마 9편은 육손과 동갑이지만. 이건 뭐...

삼국지 11의 특기는 눈물이 있을 정도로 잉여스러운 추진. 안습 그래도 능력치는 좋은편이니 특기를 갈아 버리거나 성장시키면 된다.

삼국지 12의 일러스트는 그가 머리를 풀고 고함을 지르며 싸웠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무력이 81로 전작에 비해서 정봉보다 높은 무력치을 찍었다!지못미 정봉 전체능력치는 통/무/지정/ 78/81/64/57에 특기는 병심,연병,호걸, 전법은 전공격강화. 다른 건 제쳐두고라도 삼국지의 모든 장수를 통틀어서 단 4명밖에 없는 호걸 궁병(태사자,황충,하후연,유찬)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등용해서 후회하지 않을 인재. 아쉬운 점이라면 생몰년이 명확한 인물이라서 활약했을 때는 분명히 노익장이었음이 분명한데, 일러스트는 청년이라는 괴리감이다. 물론 유찬의 동년배인 육손의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나온 것이지만...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동일하고, 전법은 속방지휘. 두예, 조비와 같은 전법이다. 좋은 전법이지만 주군인 손권의 견수지휘가 상위호환이라서 묻힌다.

삼국전투기에선 드래곤 길들이기의 스토이크로 패러디 되었다. 바이킹인 스토이크로 패러디된 것은 병에 걸렸음에도 싸우다 전사한 그의 최후와 바이킹의 생사관[3]을 감안한 패러디인 듯.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2

劉纂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 손권의 사위로 손권의 둘째 딸[4]을 맞이한다. 후에 부인이 죽은 뒤, 주거가 죽자 손노육의 남편이 된다.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235년에 여릉의 이환, 노합과 회계의 수춘, 남해의 나려 등의 도적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키자 유찬은 당자와 함께 여대의 지휘 아래 이들을 무찌르면서 236년 수춘을 항복시켜 유찬은 이환을 사로잡고 당자는 노합을 사로잡아 이들을 참수한다.

256년에 거기장군을 지낸 유찬은 손준문흠이 위나라를 공격하자는 건의에 대해 여거, 주이, 당자와 함께 적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손준이 죽자 취소되었다. 그러나 여거, 등윤이 손준의 뒤를 이어 손침이 정권을 잡은 일에 반발하자 문흠, 당자와 함께 여거를 공격한다.

266년 사마소의 장례식에 다녀온 정충이 익양을 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자 육개는 그 일에 반대하는데 유찬은

하늘이 오행을 낳았는데, 누가 전쟁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거짓 수단에 의지하여 서로 다투는 것도 종래에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누설하는 것이 있다면 어찌 놓칠 수 있겠습니까 ? 마땅히 첩자를 보내 그들의 정세를 관찰해야만 합니다.

라고 말해 정충의 의견에 찬동했는데, 손호 또한 마음 속으로는 유찬의 의견이 맞다고 여겼지만 결국 육개의 의견에 따라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행적을 보면, 어딘가 묘한 점이 있다. 주거가 죽고 난 후 손노육의 재혼 대상이었고, 후에 손노육이 누명을 쓰고 살해당할 때 전혀 연좌되지 않았으며, 그러면서도 직위는 손호 시절[5]까지 쭉쭉 승진한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3 삼국시대 촉나라서진의 인물

劉瓚
(? ~ 311)

삼국시대 촉나라서진의 인물

삼국시대 촉한의 황제 유선의 넷째 아들로 정사 후주전에서 유선의 아들들이 허봉 제도로 준 왕들의 봉작을 나열할 때 잠깐 나오며, 256년에 강유가 성도로 돌아올 때 신평왕이 되면서 대사면이 행해졌다.

당연하지만 유찬이 받은 지역은 허봉 제도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유찬이 지배한 곳이 아니라 유찬이 허봉으로 받은 신평은 옹주 서쪽에 있는 지역 중에서 하나이며, 263년에 촉이 멸망하자 일가와 함께 나라로 이주하여 지내다가 311년에 유요, 유종, 유순, 유거 등과 함께 영가의 난으로 유요, 왕미 등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고 한다.

유영의 손자인 유현만 살아남은 것으로 볼 때 후손은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밑의 인물과는 별 관계는 없지만 살해당한 것이 밑의 인물이 황제가 된 국가인 전조가 이끄는 군사다.

4 삼국시대 오나라서진의 인물

兪贊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의 인물.

오나라의 영도독으로 272년에 보천이 진나라에 항복해 서릉성이 진나라에게 넘어가자 육항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는데, 진나라에서는 양호를 보내 보천을 구하게 했다. 육항이 각 군영에게 지시해 보천을 포위하는 상황에서 양조까지 보천을 구원했으며, 유찬은 주교와 함께 진나라에 투항했다.

유찬이 투항한 것을 안 육항은 유찬이 우리 군대 안에서 옛날부터 관리로 있었으므로 군의 허실을 안다면서 자신은 항상 이민족의 병사들이 평소 정련되지 못해 만일 적군이 공격해 포위한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이곳부터 손에 넣을 것이라 걱정해왔다고 말하면서 밤에 이민족 백성들을 이동시키고 노장들로 모두 대체시켰다.

결국 양조가 이민족 병사들이 지키던 곳을 공격했다가 육항의 반격을 받았으며, 양조는 1개월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가 추격을 받아 패배했다.

4.1 미디어 믹스

삼국전투기에서는 육항이 보천, 양조 등과 싸우는 상황에서 주교와 함께 불만을 터뜨리다가 양조에게 투항하는데, 유찬은 양조에게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육항의 포위벽을 무너뜨릴 수 있고 육항의 포위망은 상당한 크기라 정예군이 이 범위를 모두 커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라면서 정예병들이 배치된 곳을 알려준다.

또한 나머지는 훈련도 제대로 안된 이민족 병사들과 군복만 입힌 지역 백성들이 섞여있다면서 특히 남서쪽 부근의 이민족 병사들과 늙은 백성들이 지키고 있는 취약 포인트를 알려주며, 양조가 오늘 바로 야습을 거는 것을 이야기하자 바로 무너진다고 했다. 그러나 야습을 한 곳이 무시무시한 병사가 있는 것을 보고 양조가 당황하자 유찬은 당했다면서 육항은 우리들이 이 곳을 공략할 것을 예상했다고 말한다.

5 오호십육국시대 전조의 황제

유찬(전조) 문서 참조.
  1. 육손과 동년이다!
  2. 사기, 한서, 동관한기
  3. 바이킹들은 전사하지 않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병사나 자연사하게 될 경우는 자신을 칼로 찔러 죽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4. 손노반의 동생이자, 손노육의 언니가 된다.
  5.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손휴의 황후였던 주거와 손노육 사이의 딸 주부인을 핍박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