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선수 경력

1 KBO 리그 시절


사직 아이돌의 깜찍한 포즈. 안녕하세요! 이대호예요!

1.1 데뷔부터 2005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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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살이 홀~쭉했을 때. 아니 저거 이대호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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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 벌려 등심 패스트볼 들어간다 누..누구세요

원래는 위에 나와 있듯이 투수 출신이다. 경남고 시절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어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야구대회추신수, 김태균, 정근우 등과 함께 출전, 결승전에서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다. 참고로 저 선수들은 모두 절친한 친구 관계이며[1], 추신수정근우는 이대호와 같은 부산 출신이다. 또한 추신수정근우는 둘 다 부산고등학교 동기생이다. 추신수와 이대호는 수영초교 동기동창이었으며, 이대호는 경남고 출신.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1년 롯데 자이언츠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그 해 1차 지명은 추신수가 받았지만, 추신수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를 거친 후 2005년에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추신수미국행에 대해서는 당시 롯데 자이언츠 구단의 섭섭한 대우 및 턱없이 낮게 부른 계약금 때문에 여러가지 실망이 겹쳐 내린 선택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당시 롯데 자이언츠가 그렇게 막장은 아니었으며 시애틀 매리너스의 계약금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것은 추신수 문서 참조.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앞에는 신생 팀 SK 와이번스가 2차 1순위 우선지명 3장을 들고 있었는데 이대호를 거르고 택한 선수가 투수 김희걸, 조형식[2], 내야수 김동건. 이들 중 현재 1군에서 모습을 비추고 있는 선수는 김희걸밖에 없다. 근데 김희걸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후에도 두꺼운 선수층에 밀려서 1군서 패전처리나 하는 중이니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런 김희걸도 2014년에는 애니콜 소리 들을 정도로 애매한 상황에 마구잡이로 등판 중이다

롯데 자이언츠에 우완투수로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으나 덩치에 비해 공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전지훈련에서 어깨 부상을 당한 후 구속이 더 떨어지게 되자 우타자로 전향하였다. 그 외에도 속사정이 있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이대호에 대한 기대치는 투수 쪽보다 타자 쪽이 높기도 했기 때문이다.[3] 불우한 가정사를 알던 이상구 당시 롯데 단장이 계약금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 주기 위해 투수로 입단시킨 후, 바로 부상을 핑계로 타자로 전향시킨 사정도 있다. 이상구 단장이 칭송받는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 이대호의 회고에 의하면 '몇 달만에 잡는 방망이가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며, 10개를 던져 주었는데 그 중에서 8개를 담장을 넘겼다고 한다.

입단 첫 해인 2001년에는 타자 전향 훈련으로 인해 2군에서 주로 하위 타선에 배치되었다. 그러다가 시즌 막바지인 9월 18일, 펠릭스 호세마산 삼성전에서 참교육 "헤이! 영쑤!"사건을 저지르며 잔여경기 출장 정지 크리를 먹었고, 우용득 당시 롯데 감독대행이 호세를 1군에서 말소하고 이대호를 1군으로 불러들였다. 고로 호세 때문에 1군에 데뷔하게 된 것. 다음 날인 2001년 9월 19일 1군에 처음 등록되어, 4번 타자로 첫 데뷔를 했다. 그러나 신인 1년차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결국 2001년 1군 6경기에 출장하여 8타수 4안타 1타점에 그쳤다. 5할인데?

당연히 같은 해에 입단하여 신인왕을 먹은 동갑내기 김태균에 비해 초라한 성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2002년 시즌 중 감독으로 부임한 백인천. 이대호가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위해 그에게 지시한 것이 쪼그려뛰기[4]사직 야구장 스탠드를 오리걸음으로 오르내리기. 이런 무식한 훈련을 수행한 이대호는 당연히 무릎 부상을 당했고 그 후 계속 재활 치료를 해야 했다. 이 때 부상으로 운동량이 떨어지고 실의에 빠진 이대호는 술과 야식, 그리고 쿵쿵따[5]으로 세월을 보내 지금과 같이 30kg 정도 체중이 불었다 한다. 여기에는 자신과 같은 부류인 최준석과 열심히 야식을 먹은 것도 컸다고...[6][7] 그래도 2002년에는 1군 74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78에 8홈런 32타점을 기록해 신인 2년차 + 타자전향 2년차 치고 나쁘지 않았다. 당시 2001년에 26홈런을 때려 낸 조경환2002년에 삼진 머신이 되어 버린 후 7월에 박남섭 등을 상대로 SK 와이번스트레이드되었고, 용병이라고 데려온 제로니모 베로아는 끔찍하게 삽을 퍼다가 그 해 4월 30일웨이버 공시되면서 방출당하는 등 롯데의 공격진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에는 무릎 부상 때문에 1군 54경기 출전에 그치며 .243 4홈런 13타점으로 홈런과 타점이 반토막나고 말았다. 양상문 감독이 취임한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이대호는 풀 타임 출전을 하면서 점차 타격이 성장세를 그리게 된다. 타율은 낮았지만 파워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2004년 .248 20홈런 68타점을, 2005년엔 .266 21홈런 80타점을 기록하며 조금씩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문제는 병살머신이었다는게 문제였다.치면 무조건 병살,홈런 정도여서 교타력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래서 밑에처럼 무한까임을 당하게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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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04년[8] 당시 갈매기 마당의 모습. 페레즈, 박기혁등 추억의 이름들이 보인다.

이 시기 이대호는 어느 머리 큰 포수만큼이나 갈마 아재들에게 미친 듯이 까였다. 아무래도 밑에서 두 번째는 돈을 날린 것 같다. 저때까지만해도 그냥 힘만 좋은, 얻어걸리는 타자 수준에서 머무는가 싶었는데.

1.2 2006 시즌

실력이 만개한 것은 강병철 감독 산하의 2006년. 당시 이대호는 불어난 체중을 빼기 위해 양산시에 있는 통도사에 들어가 식이요법과 운동에 매진했다. 매일 산을 타면서 정신수양도 하고 살도 뺐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강 감독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못해서 오히려 강 감독이 이대호를 만나러 그 절로 찾아갔던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고.

15kg가량 감량하고 돌아온 이대호는 선구안이 비약적으로 개선되면서[9] 타율, 타점, 홈런 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1984년 삼성 라이온즈 소속의 이만수가 세운 이후 22년 만의 트리플 크라운. 이때서부터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괴물 신인 투수였던 류현진도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했던 터라 MVP는 류현진에게 뺏기게 된다. 여기에 30대도 아니고 20대 홈런왕이라고 까인 건 덤. 나이가 아니다! 2006년은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투고타저였던 해로서, 이대호의 홈런이 26개로 역대 최저 2위의 기록이었던 반면 류현진의 평균자책점이 2.23이었고 18승과 탈삼진 1위를 먹었던 터라….

게다가 류현진을 앞세운 한화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준우승을 거두었다. 이에 반해 이대호는 팀이 7위였던 탓에 류현진에 비해 관심이 덜했기 때문에 류현진에 MVP를 넘겨야 했다. 이 때문에 투수 트리플 크라운보다 더 어렵다는 평이 많은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도 상당히 저평가를 받았다. 그나마 1루수 골든글러브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 해 늦여름에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야구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출전하지만 타율 0.409에 10타점(당시 국대 총 타점의 1/4)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 대한민국도하 참사로 불릴 정도로 졸전한 탓에 묻혀버리게 되고 이대호는 점차 병역 압박을 받게 된다. 다행히 이 병역 문제는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해결했다.

1.3 200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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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요약 짤

2007년에는 2006년의 대활약 때문에 볼넷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삼진 수는 2006년과 같은 55개인데 볼넷은 전년도보다 42개나 증가하여 97개가 되었다. 2007년에도 홈런, 장타율, 출루율 등의 주요 지표가 모두 성장세를 보이며 1루수 골든글러브 2연패[10]. 당시 이대호 한 명만 거르면 나머지를 편안하게 갈 수 있던 롯데 타선에는 이대호와 여덟 난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6년만 해도 홈런 2위인 펠릭스 호세라도 있어서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타선의 밸런스 자체는 정수근[11], 강민호[12], 박현승,이승화 등이 분발했던 2007년이 오히려 좀 더 나았긴 했다. 2명 빼고 다 삽질 vs 1명 빼고 다 똑딱이 이 와중에 522 대첩에서 연예인 야구 수비를 선보이며 실질적인 522 대첩의 시발점이 되었다.

롯데 자이언츠의 팬에게 있어서는 손민한과 함께 8888577이라는 암흑기에 롯데를 견인한 두 쌍두마차[13]이자, 롯데 타선의 상징에 가까운 존재다. 실제로 이대호가 부진하면 롯데 타선이 전반적으로 무게감이 크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1.4 2008 시즌

2008년에는 초반 타점머신으로 잠깐 군림하였으나, 여름에 들어서자 타격 감각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을 보이며 '역시 봄데였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는 행보를 보였다. 결국 4월 초 1위를 달리던 롯데 자이언츠는 올림픽 브레이크 직전 잠시 5위로까지 추락. 2007년에 비해 크게 불어난 체중과[14] 당시 홈런과 장타율에서 리그 선두를 달리던 김태균과 포지션이 겹치는 문제 등으로 올림픽 대표 선발에 여러 잡음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올림픽 직전 올스타전에서 기적적으로 타격 감각을 회복한 이대호는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경기에서 홈런 3개, 10타점, 0.360의 타율을 기록하였고, 특히 장타율이 0.760에 달하는 등 큰 활약을 보여주며 한국 야구팀을 준결승으로 이끌었다. 준결승까지 극도의 부진을 보이던 이승엽의 상태를 고려해 봤을 때 이대호의 활약이 아니었으면 준결승 가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준결승과 결승에서의 이승엽의 결정적인 홈런으로 인해 묻힌 감이 있다. 사실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가대표 성적에서 이대호가 이승엽보다 홈런은 적었지만 타율은 월등히 좋았다. 안습. 아무튼 여차저차해서 금메달을 따면서 병역 혜택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롯데의 8888577을 끝내며 데뷔 최초의 포스트 시즌을 경험하지만,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4위 팀 삼성 라이온즈에게 3연패를 당해 탈락하고 만다. 펜스 직격 안타를 치고 2루에서 새색시 슬라이딩을 보여주며 아웃되어 팬들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2008 시즌은 타율 0.301, 18홈런, 94타점(리그 3위), OPS 0.879(리그 7위)를 기록했다.

1.5 2009 시즌

2009 WBC에 출전하여 타율 0.278 5타점 ops 0.829를 기록했다.

시즌에선 3루 수비의 여파인지 엄청난 타격 부진을 보여주었다.[15] 거기다 이대홀 또는 이대호 터널이라 불리울만큼 말도 안 되는 3루 수비를 보여주어 대부분의 롯데팬들은 뒷목을 잡은 채 2009 시즌을 포기한 상태였다가(실제로 꼴찌를 잠시 찍음.) 5월 중순부터 타격감을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6월 중순엔 타율 3할을 잠시 회복하였다가 손바닥 부상으로 다시 2할 8푼대로 떨어졌다.

2009년 6월 30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이대형의 다이빙캐치 실패와 2루수의 송구 실책으로 인해 '자기가 치고 자기가 홈에 들어오는 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이로써 이제 더 이상 '이대호가 그라운드 홈런 치는 소리 하네'란 말은 쓸 수 없게 되었다.[16] 이제는 '이대호 홈스틸하는 소리 하네' 또는 '이대호 도루왕하는 소리 하네'를 사용해야 할 듯. 야갤 등지에서는 인사이드 파크 모텔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009년 7월 25일에 열린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서는 결승에서 최희섭과 맞붙어 홈런 5개를 기록하며 우승했다. 또한 그와 함께 최장거리 홈런 부문도 수상. 결승전에선 5개 모두 장외홈런을 날리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홈런더비 예선에서 이대호의 장외로 날아간 홈런 타구 중 하나가 당일 무등경기장에 왔던 천하무적 야구단의 김창렬의 차 뒷유리에 적중했다.

2009 시즌은 타율 0.293, 홈런 28(리그 4위), 타점 100(리그 3위), OPS 0.908(리그 11위)를 기록했다.

리그 최상위권 타자의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팀 전통(?)에 따라 2010년 연봉이 삭감될 예정이라고. 이에 이대호는 팀 자율훈련 불참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결국엔 6% 인상된 3억 9천만원에 계약했다.

1.6 2010 시즌

KBO 역사에 길이 남을 역대급 시즌
도루 제외 타격 전 부문에서 7관왕! 도루를 67개만 더했어도 전관왕 달성인데

이대호/2010 참조

1.6.1 2011 시즌 연봉협상

2010 시즌에 타격 7관왕과 9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2개나 달성하면서 연봉의 대폭적인 인상이 기대되었고 본인도 상당한 인상을 바라는 듯 했지만 롯데 구단 프런트 어디 안 갔다. 그래서 이대호 본인은 7억 원을 요구 했으나 롯데 측은 6억 3천만 원을 제시했는데, 사실 그전까지 5억대를 제시하다가 연봉 조정신청 구단 측에서 갑자기 액수를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결국 2011년 1월 10일 이대호 선수 본인이 연봉 조정 신청을 KBO에 제출했다. #기사1
#기사2

당시까지 연봉 조정 신청에서 선수가 이긴 사례가 딱 1번 밖에 없었다는 것과 이대호 본인의 2010시즌 활약이 유례가 없다는 점에서 이후 추이가 주목되었다.

그리고 끝내 2011년 1월 20일 약 4시간이 넘는 장기간 회의 끝에 6억 3천만 원으로 연봉이 결정되었다. 팀내 최다 실책(12개)[17], 4위에 그친 팀 성적, 선수단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관련기사 못해서 연봉 깎을 때는 팍팍 깎고 잘해서 올릴 때는 형평성 따지는 무개념 구단들

연봉조정위 내에서의 의견 갈림은 3(롯데):2(이대호). 조정위원들은 양측의 자료가 빈약함을 이야기 했는데, 선수협에 의해 공개된 이대호의 제출 자료는 실제로 상당히 빈약한 내용이었다. 롯데팬 커뮤니티에서 만든 것보다도 퀄리티가 낮을 정도. 성적에 관해서는 사실상 기본 스탯 제시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번 연봉조정위의 판정의 핵심은 '연봉 고과선정'의 정당성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후폭풍이 나오는 것이 애초에 선수 본인은 자신의 연봉고과 산출에 대한 근거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연봉 협상 때도 자신의 대략적인 연봉고과 순위만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 조직과 개인이 정보 만을 가지고 싸우라고 하는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 때문인지 대리인 제도 즉, 에이전트에 대해 기사가 나왔다. 야구 관중수는 600만을 넘기는데 KBO 운영은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었으니….
선수 승률 5%…부각되는 대리인 제도
'연봉조정 패배' 이대호, 뒤에 보라스가 있었다면…
추신수와 연봉조정신청 집중분석

이번 패배에 대해 이대호는 누구도 연봉 조정 신청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선수측 승률이 상식 이하로 떨어지는 현 연봉조정 제도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타격 7관왕이 진 마당에 이길 선수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이번 연봉조정에서 롯데가 승리해서 7,000만 원을 아낄 수 있었지만 내년 FA에서 이대호가 롯데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확 줄어듬에 따라서 국내 잔류시에도 이대호의 선택폭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었다. 팀내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2010 한국 최고의 타자를 이런 식으로 대우해 놓고도 의리 운운하기는 어려울 테니.
눈앞의 7,000만 원만 바라보는 근시안적인 팀 운용을 꼬집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를 단적으로 정리하는 기사도 있었다.참 롯데스럽다.

이에 롯데팬들은 격분하였고, 롯데 팬 중 나름대로 네임드인 블로거 lezhin이 이대호 연봉 정상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문제제기 모금시작

같은 해 옆나라 일본에서도 비슷한 연봉 조정 신청이 있었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투수 와쿠이 히데아키의 연봉조정신청이 그것인데, 일본쪽 조정위원회는, 구단제시(현상유지)2억 엔과 선수 제시 2억 7천만엔을 놓고 2억 5300만 엔이라는 자체적인 사정결과로 중간점을 찾아줬다. 게다가 이쪽은 이대호같이 각종 기록을 갈아치운 것도 아니고, 14승 8패 방어율 3점대 후반이라는, 후반기 들어 급격히 무너져서 연봉고과가 떨어진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성적과 타구단의 연봉고과대우를 비교해서 객관적인 사정으로 절충해줬다는 점에서 한국 연봉 조정과는 사뭇 달랐다. KBO도 이런거 좀 보고 배워라
또한 조용준 용인발전센터 책임연구원은 <한국프로야구 연봉조정제도의 경제학적 균형에 관한 연구>에서 이대호의 2011 시즌 적정 연봉은 10억 890만 원이라고 주장했다. 조 연구원은 이대호와 비슷한 성적을 낸 2003년 이승엽의 연봉 6억 3000만 원과 그동안의 물가상승률, 여기에 프로야구의 규모 확대를 프로야구 중계권료 상승분으로 파악해 이대호의 적정 연봉을 계산했는데, 물가상승률과 프로야구 중계권료 상승분 등을 고려해 이승엽의 2003년 연봉 6억 3000만 원은 2011 시즌 이대호와 비교할 때 10억 890만 원이 된다는 분석이었다. 관련글

결국 이 후폭풍은 상당해서, FA할 때에도 롯데에 남겠다던 이대호의 뜻이 결국은 바뀌고 말았다. 이대호 "롯데 떠날 수도 있다"

1.7 2011 시즌

이대호/2011참조

2 일본프로야구 진출

9경기 연속 홈런을 계기로 메이저리그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2011년 시즌을 소화할 경우 FA 신청이 가능했으며, 즉 2012시즌에 해외 진출이 가능했다. 해외 진출에 대해 체력과 수비 문제 때문에 미국보다는 일본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높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솔직히 전반적으로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다.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퍼시픽리그 쪽은 기대치가 높았던 김태균의 거한 삽질로 학을 떼고 있었고, 센트럴 리그 쪽 큰 손들은 수비가 결점인 용병타자를 영입할 여력이 안 되었다. 또 추신수와의 인터뷰를 보면 본인 역시 해외진출을 내켜하지는 않는 듯 했다. 다르빗슈와 비슷한 상황인 듯 했다.

국내에 남을 경우 롯데 잔류와 이적 여부는 2011년 연봉협상 이후로 결정나게 될 만큼 미묘해졌다. 그전까지는 롯데의 아이콘적인 존재이므로 어디 가면 큰일나며 롯데 구단 역시 확실한 대우로 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연봉협상에서 보여준 태도 때문에 상황은 급변했다. 이대호가 의리로 남을 명분 자체가 없어졌다 라는게 중론이었다. 그리고 이대호가 2007년에 역대 최고 대우를 받을 때와 비견되어 이상구 단장이 칭송받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11년 7월, 한신 타이거스에서 이대호의 영입을 노리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 또 2011년 포스트시즌 종료 이후 일본의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2년간 5억엔(당시 한화로 약 75억 원 정도)의 조건으로 영입준비 중이라는 기사도 뜬 상황이었다. 오릭스는 금액 부분은 부인했지만 팀내에서 타격을 보강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이 많았고 따라서 이대호가 FA 신청시 그를 영입하겠다는 방침이 정해진 듯했다.#물론 롯데는 무조건 잡는다고 말했지만 자금력이나 연봉협상의 문제 등의 문제가 있고 이대호가 롯데 우승 빼고 한국에서 타자로서 이룰 것은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 큰 무대인 일본에 진출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많았다. 단 변수라면 이승엽이나 김태균 같은 뛰어난 타자들이 대지진, 원자력 사고 이후 한국으로 복귀하고 있다는 점. 이대호 입장에서는 2012년에 아이를 얻기 때문에 이점이 변수가 될 수도 있었다.1,2

결국 2011시즌 종료 후 이대호는 FA를 선언하였고 소속팀 우선협상기간인 11월 19일까지도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해외진출이 유력해졌다."100억원도 NO" 이대호, 롯데와 FA 협상 결렬

우선협상 기간 동안에 이대호가 사인하지 않고 해외진출에 무게를 둔 것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한 쪽은 "100억도 안 되면 어쩌라는 거냐"고 말하는 롯데 잔류 지지파,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롯데 구단 믿지 말고 해외로 나갈 수 있을 때 나갔다 와라"고 말하는 해외 진출 지지파. 잔류를 지지했던 팬들은 원래 예상했던 4년에 60억+알파를 크게 넘어선 4년간 연봉 80억에 옵션 20억이 통큰 배팅임을 강조한다. 또한 롯데라는 팀에 대한 자부심이나 팀을 사랑하는 마음을 항상 강조했던 이대호이기에 팬들이 잔류를 기대했다는 점 또한 강했다. 이게 반대로 해외진출로 무게가 실리자 배신감을 느낌 팬들이 지금까지의 인터뷰 등이 거짓이며 언플이라고 비난을 했던 것.

반대로 해외 진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팬들은 위에서 설명되었던 2011시즌 연봉 협상을 기억하는 쪽이었다. 타자로서 그야말로 따라올 자가 없을 압도적인 기록을 세운 그를 7000만 원 아끼자고 연봉조정신청까지 가게 한 팀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 야구팀을 그저 돈 벌이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구단에 끌려다닐 필요 없이 야구선수로서 더 넓은 무대로 도전해보라는 입장이었다. 당시의 이대호가 그야말로 전성기라는 점 때문에 일본에서 제대로 성공한 타자를 보고 싶어하는 열망도 이에 포함되었다.
또한 이러한 팬들은 "60억+알파를 크게 넘어섰다"는 수식어에 비교적 덤덤한데, 이는 저 60억이라는 액수 자체가 2004년 심정수가 가진 기록이며 다시 말해 7년 전의 액수이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률과 커져가는 야구판을 생각했을 때, 80억+20억이 7년 전의 FA 최고 대우였던 60억 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배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2004년 심정수의 60억중 옵션과 계약금을 제외한 금액은 40억 원이다. 옵션이 20억이었다는 말이다. 순수 연봉이 7억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때 이대호에게 제안한 연봉 10억원은 롯데가 꺼낼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였을 것이다.

물론 물가 상승률이 6년간 50%씩, 100%씩 뛰진 않는다. [18] 당시 심정수의 60억은 돈성이라 불리는 삼성이 어마어마하게 거품을 뿌린 금액이었다. 생활물가지수 상승폭인 28%로 심정수의 연봉을 기준으로 FA 이대호의 소위 '적정가'를 환산한다면 약 77억 가량이 된다. 때문에 한해 1개 야구단의 운영비가 300억 정도로 추산되는 한국프로야구의 규모상 연봉 10억, 총액 100억이라는 액수는 구단 입장에선 충분히 무리한 수준이며, 롯데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이라고 봐야 했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 팬 커뮤니티에서는 대체 얼마를 더 주어야 자존심을 세워 줄 수 있느냐고 이대호를 깠다. 해도 너무했다는 것. 사실 돈과 더 큰 꿈을 위해서 해외진출을 하겠다고 이대호가 공언한 상태였다면 100억이든 뭐든 롯데팬들은 배웅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대호는 당시까지 어느 인터뷰든 소위 말하는 '성골' 부산 토박이 경남고 출신 롯데맨임을 강조했다. 그렇게 협상 최종일까지 모든 롯데 팬들은 대충 롯데는 65억 + @를 내놓을 것이고 이대호의 요구선은 80억이라고 생각했다. 80억 초과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결국 롯데는 지를 FA는 지른다는 전례대로 100억의 그야말로 더 이상 해줄 수가 없는 최고의 대우를 했다. 허나 이대호는 도장을 찍지 않았다. 팬들에게 완전히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당시 겨울 SK와의 협상을 포기하고 깔끔하게 메이저리그 진출을 발표했던 정대현이 이대호와 비교되면서 롯데가 이대호의 FA에 신경쓰느냐고 다른 선수들을 신경쓰지 못했다는 얘기도 나왔던 상태라 비난이 거세졌다.

물론 그동안의 롯데가 보여줬던 행보 때문에, 롯데는 처음부터 이대호를 잡을 생각도 없었고, 저 80억+20억이란 제시금액도 실제로 줄려는 돈이 아니라 욕먹지 않기 위해 언론에 공개하기 위한 언플용 수치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대호의 인터뷰 기사에서 100억을 제시했다는것이 확인되는 것으로 종결. 그것도 첫 만남에선 식사만, 둘째 만남에서 바로 100억을 제시했다. 일각에서 제시하는 음모론이 헛소리라는걸 말해주는 것. 이대호와 짜고 치는거 아니냐는 말도 나왔는데 이대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에게 불리해질 언플에 협조해주는게 말이 되는가? 100억 찼다고 욕을 먹고 있는 마당에 본인 입장에선 사실대로(사실은 아니지만)70억 제시했다고 하는게 여론에도 좋았을 것이다.
이대호의 인터뷰 : 맨 밑에서 2번째 질문

일본 스포츠호치에서 오릭스가 이대호에게 최대 3년간 8억 5천만 엔, 우리돈으로 129억 정도 되는 액수를 제안했다고 전했다. 이것은 롯데가 제시한 최고대우를 넘어서는 수치였다.[19]

어쨌든, 언론에서는 롯데도 이대호도 딱히 욕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롯데로서는 할 만큼 제안을 했다고 보고, 이대호도 역시 일본 제안이 좋을 뿐만 아니라 본인도 외국 진출하고 싶다고 했으니 그 의사를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것. 이대호 본인도 FA협상 과정에서 구단이 보여준 성의에 감사한다고 직접 언론에 밝혔으니 만큼 롯데의 제안 자체에는 별 불만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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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릭스 버팔로즈와 2년간 총액 7억엔(105억 원)에 계약을 매듭지었다.[20]

2.1 2012 시즌

이대호와 여덟 난장이 시즌 2

이대호/2012참조.

2.2 2013 시즌

이대호/2013으로.

2.3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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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첫 시즌.

이대호/2014 문서로.

2.3.1 2012~2014년까지의 기록 정리

원글 링크 요약하면 퍼시픽리그 3년 통산 타석 1위, 타율 5위, 홈런 2위, 안타 2위, 타점 1위, OPS 2위(출루율 4위, 장타율 1위), wOBA 2위, WRC+ 2위, OPS+ 2위. 퍼시픽리그 No.1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정상급 타자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적을 올렸다.

2.4 2015 시즌

일본 커리어 두 번째 베스트 나인 수상
한국인 최초로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한 빅보이
자신의 손으로 일본을 무너트리고 기적을 만들다!

이대호/2015 문서로.

3 메이저리그 진출

3.1 2016 시즌

[[파일:왼쪽! 이대호! 이대호! 다아암장 넘어갔습니다~ 이대호의 끝내기~~~ 오늘!!!! 시애틀 홈구장 첫 승! 이대호 선수의 방망이에서 나왔습니다!.jpg]]

용두사미

스플릿 계약에서 출발하였지만 경쟁자들에 우위를 점하며 당당히 메이저리그 개막전 25인 로스터 진입!

사상 최초 신인 대타 끝내기! 이치로도 하지 못했던걸[21]

기대이상이었던 전반기, 그러나 후반기는 전형적인 백업 플래툰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애틀 매리너스에서의 첫 시즌.

이대호/2016 문서로.
  1.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 등이 함께 나타났던 92학번 황금 세대를 잇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2. 2001년부터 2007년까지 1군에서 단 25경기만 뛰었던 선수. 2군을 전전하다 2007년 11월 5일 위재영, 강혁 등과 함께 방출되었다.
  3. 고교 시절에 투수 겸 4번타자로 자주 출장했으며 2000년 에드먼턴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서는 투수인데도 클린업 트리오에 들어갔을 정도로 고교시절부터 장타력은 인정받았었다.
  4.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 쪼그려뛰기는 무릎 관절에 부담만 되고 운동효과는 좋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칼로리를 소모시키는 운동량은 상당하지만 다양한 운동수행 능력을 발달시키는 효과는 미미한 반면 그 효과 이상으로 무릎 관절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 부상을 유발하기 때문에 선수에게나 일반인에게나 좋은 훈련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무식한 코치들이 훈련을 빙자한 기합으로 많이 써왔다 기합 문서 참조. 오리걸음도 마찬가지.
  5. 당시 KBS 일요일은 즐거워의 공포의 쿵쿵따 코너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본인은 쿵쿵따를 즐겨 봤다고 무릎팍 도사에서 술회하였다. 이에 당시 쿵쿵따 MC였던 강호동은 바로 쿵쿵따 대전을 시전했으나 이대호에게 곧바로 발렸다...기보다는 이대호->호랑이->이상해->해질녘 콤보로 당한 걸로 보아 적당히 토스해 줬다고 보는 게 맞을듯. 하여튼 이상해->해질녘 콤보를 본인도 언급한 걸로 보면 확실히 쿵쿵따를 열심히 보긴 본 모양이다.
  6. 후일 KBS 다큐멘터리에 나온 바에 의하면 동래구 모처에 자신의 친형인 이차호와 최준석이랑 해서 셋이 같이 살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 방에 있는 더블 침대 하나에 이대호와 최준석이 같이 누워 잤다는 것! 세계 최고의 위대한 침대
  7. 카더라에 의하면 이때 최준석이랑 그냥 한두마리 시켜먹은 것도 아니고 무려 5마리를 시켜서 그자리에서 해치웠다고 한다(...)
  8. 조성환이 시즌 초 부상을 당해서 나가리 된 적은 2004년 4월 24일 손목부상으로 시즌 아웃 된적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해 9월....
  9. 2004~2005년에도 BB/K 비율이 소숫점 후반대로 나쁜 편은 아니었다.
  10. 그리고 이것 때문에 김태균은 '김두표'라는 별명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11. 술 관련 사고에서 복귀하여 준수한 테이블 세터 역할을 해 줬다.
  12. 주전 포수로 뛰며 14홈런을 때리며 가능성을 보여 줬다.
  13. 2012년부터는 둘 다 롯데에 없는 상태이다. 손민한은 방출, 이대호는 일본 진출.
  14. 선수 본인의 관리 실패도 있지만, 겨울 동안 올림픽 야구 예선 경기에 출장하느라 훈련이 부족했던 면도 있을 듯하다.
  15. 2008년에도 올림픽 브레이크 이전, 이후 둘 다 계속 처음에는 잘하다 꾸준히 내려갔다
  16. 사실 2루수 송구 실책은 실책이라기보다 송구가 이대호에게 맞아 굴절된 것으로 불운에 의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3루타로 기록됨. 에러 끼면 인정 못 받는다.
  17. 애초에 포지션 경쟁에서 밀렸던 것이 아닌 팀의 전력운용 차원이란 것 때문에 3루수를 봤기에 실책이 많은 것.
  18. 애초에 물가 상승률만 가지고 선수 연봉의 인상폭을 계산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통계청 자료 기준으로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약 3%였지만 생활물가지수는 2004년 대비 28% 상승, 주택매매가는 동기간에 40%가 상승했다.
  19. 이대호는 돈보다 롯데가 제시한 4년이라는 계약기간이 부담됐다고 한다. 2009년쯤 인터뷰와 달리 이때 이대호는 해외진출에 대한 열망이 몹시 컸던 것 같다.
  20. 하지만 아베의 아베노믹스 덕분에 환율이 급락해버려 졸지에 연봉이 깎인 셈이 되었다.
  21. 물론 농담조. 이치로는 신인시절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에 MVP와 신인상을 동시에 석권하였다. 대타로 나올 필요 없이 그냥 선발로 152경기를 뛰었다. 이대호의 성적을(NPB시절 기록을 포함하더라도) 이치로랑 비교하는거 자체가 이치로에게 엄청난 실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