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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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益 (창씨명 淸原範益)
1883 ~ ?

일제강점기친일 관료.

1883년 충청북도 단양에서 출생. 관립한성일어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종군하였고, 종군의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은사금을 받았다. 이후 대한제국 정부에서 번역관 등으로 일했는데 황태자의 일본 유학에 배종한 공로로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로부터 각각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면서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으며, 강원도 춘천군수, 충청남도 금산군수, 경상북도 달성군수/예천군수를 지냈다. 고등관 2등으로 승진하여 강원도지사로 재직하면서 <총독합하의 훈시를 배승하고 - 조선애에 불타는 주옥 같은 명언>등의 글을 통해 정신작흥운동과 자력갱생운동을 촉구하였다. 이후 고등관 1등 충청남도지사 및 중추원참의에 임명되었다.

1937년 미나미 총독의 '선만일여(鮮滿一如)' 방침에 따라 만주간도성 성장(省長)에 임명되었다. 간도 일대의 조선인 항일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만주국군 내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여 간도 특설대가 창설되었다. 친일조직으로 항일민중운동 파괴공작, 선전선무공작, 전시동원의 역할을 한 만주국 협화회 간도성 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최남선, 박석윤 등과 함께 신경에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를 조직하여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귀순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1945년 귀국하여 전시동원단체인 조선국민의용대 총사령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중추원 고문에서 파면되었고 1945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50년 8월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강원도 정선 아라리촌에 그의 공적비가 있다. 그가 강원도지사 재직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정선군수 김택림(金澤林, 창씨명 金光博, 1888~?)이 1932년에 세운 것으로 앞면엔 '강원도지사 이범익 각하 영세불망비'[1], 뒷면엔 이범익의 공적을 찬양하는 4언 율시가 새겨져 있다. 참고자료
  1. 江原道知事 李範益閣下 永世不忘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