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조선)


조선의 역대 국왕
11대 중종 이역12대 인종 이호13대 명종 이환
묘호인종(仁宗)
시호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영정(榮靖)
본관전주(全州)
능묘효릉(孝陵)
이호(李峼)
천윤(天胤)
출생
사망장소한성 경복궁 청연루
배우자인성왕후(仁聖王后)
아버지조선 중종
어머니장경왕후(章敬王后)
생몰
기간
음력1515년 2월 25일 ~ 1545년 7월 1일
양력1515년 3월 10일 ~ 1545년 8월 7일(30년 4개월 28일, 1만 1108일.)
재위
기간
음력1545년 1월 1일 ~ 1545년 7월 1일
양력1545년 1월 13일 ~ 1545년 8월 7일(6개월 25일, 206일.)
조선의 역대 왕세자
이황인종 이호순회세자 이부

1 개요

조선의 12대 국왕.

중종의 적자로, 중종과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만 태어나기는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의 소생인 복성군 미가 먼저 태어났다. 따라서 장남이 아니라서 형제순서는 밀리지만 조선시대는 적서차별이 있었기때문에 중전에게서 태어난 적자인 인종이 왕위를 이은 것.[1] 동복 형제로는 누나 효혜공주가 있다.

정식 시호는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단, 여기서의 '~효대왕'이 인종만의 특별한 시호는 아니다. '효'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가 강한 군주들인 태종과 세조 역시 각각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이다. '~효대왕'은 조선의 대부분의 왕 시호 끝에 붙는 말이라서 이걸 가지고 '흠효대왕'이 인종의 효성을 찬양했다고 보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2]

2 왕세자 시절과 즉위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임신했을 때 꿈을 꿨는데, 아기의 이름을 '억명'으로 지으라는 것이었다. 이후 인종을 낳은 뒤 위독해지자 이 꿈이 어떤 계시로 생각되었는지 중종에게 이름을 '억'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하고 원자의 성명은 '이억'이 된다. 하지만 결국 세자에 책봉되면서 피휘를 위해 '호'로 개명했다.[3]

3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는 등 어려서부터 엄친아의 기상을 풍겼으나[4] 태어난지 며칠만에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가 산후병으로 죽었고 이 때문에 세자 시절 상당한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어릴 때는 남곤의 보호를 받았지만 그는 죽었고, 아버지 중종이 각별히 아끼는 아들이었지만 자신의 소생 복성군을 왕으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던 경빈 박씨의 견제 때문이었다. 작서의 변으로 경빈이 몰락한 뒤에는 세자를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권세를 휘두르는 김안로가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김안로가 세자의 후원자를 자처한 덕에 세자의 지위는 안정될 수 있었다.

김안로가 몰락한 뒤, 권력은 그의 의붓어머니 문정왕후와 그 동생 윤원형의 손에 넘어갔다. 문정왕후는 먼 친척이기도 하고, 아들을 낳기 전까진 필요에 의해서 세자를 감쌌지만, 경원대군을 낳게 된 뒤에는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인종을 견제했다. 이런 가운데 세자궁에 의문의 화재사건이 일어나 인종이 죽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야사에 다르면 이 때 불이 나자 당시 인종은 "어머니가 나의 죽음을 원하시니 그에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니겠는가"라며 자리에 앉아 불에 타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밖에서 중종이 나타나 그의 아명인 백돌을 애타게 부르자 '이대로 죽으면 어머니에게는 효가 되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나아가 "불충")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증거는 없었으나 세간에선 문정왕후가 세자를 죽이려고 벌인 짓이란 소문이 떠돌았다.

중종이 죽은 후 왕위에 올랐다.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답게 유학에 바탕을 둔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시키는등 중종때 좌절된 도학정치를 재현하려 노력했다. 실제로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압박받던 사림들이 환호했다. 또한 사간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관이 자신이 기록하는 사초(실록의 원본)에 이름을 써넣지 않아도 된다는 옛 규정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몸이 약했고 문정왕후의 도가 넘은 압박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야사 등에선 문정왕후가 인종을 늘 괴롭혔다고 하는데 경원대군과 함께 편전에 들어서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거냐. 죽이려거든 지금 죽여라."라고 포악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작 인종 자신은 문정왕후를 극진히 우대하였고, 나이 차이가 아들뻘인 이복동생 경원대군과도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3 죽음

결국 9개월도 다 못채우고 인종은 죽고 마는데 독살설이 나돌았다. 인종에게 포악스럽게 굴던 문정왕후가 어느 날은 아주 친절한 모습으로 인종에게 오색떡을 권했는데 오색떡을 먹은 인종이 그날 쓰러져서 죽었다는 것. 하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야사에 불과하고 인종이 죽게된 진짜 원인은 상례 도중 너무 단식을 오래 하여 거식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중종이 병에 걸려 앓아 누웠을때 침식을 거르며 간호에 몰두했고 즉위 이후에도 5개월 동안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단식한 뒤 곧바로 제사니 사신접대니 하는 일정을 강행했다. 걱정이 된 신하들이 말렸을 정도. 이러니 몸이 남아날 턱이 있나... 죽기 1달 전인 6월 4일부터 실록에 기록이 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으나 걱정이 되어 찾아온 신하들에게 괜찮으니 진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한달만에 죽고 말았다.[5]

독살설을 배제하더라도 문정왕후의 압박이 인종의 건강을 해쳤을 개연성 또한 있다. 조선은 효(孝)를 숭상하고, 인종은 특히 매우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인종이 문정왕후의 압박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불효 때문이라며 자책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인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이 사건을 그 동안 이일역월제, 즉 하루를 한달로 치면서 3년상을 하는 편법으로 국정의 안정과 실용성을 꾀하던 조선 왕실이 점차 성리학적 예법을 신봉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평하기도 한다.

죽기 직전에야 조광조의 억울한 누명을 신원하라는 명과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분부를 내리고 승하했고 선조대에서 신원된다.

3.1 왕릉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효릉이다. 서삼릉 문서로.

4 그 외

야사에는 명나라사신이 인종을 보고, "조선의 왕은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다. 그런데 조선은 땅이 좁아 성인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니 곧 얼마 안 가 왕은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비슷한 야사로 인종은 세자 시절에 병풍에다 사람이름을 적어놓고 '이 사람은 이 관직이 좋겠지,저 사람은 저 관직이 좋겠지' 했는데 누군지 모르는 사람뿐이라 궁금해진 신하들이 그들을 수소문하고 다녔는데 알아보니 모두 재야에 묻혀있는 재사, 현인으로 이름난 사람들뿐이었다고 한다. 또, 한 신하가 우연히 선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세자는 신선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라 했다한다. 임금님 띄워주기일수도 있지만 유독 인종에게만 이런 선담류의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당대에도 보통 사람과 다른 사람으로 여겨졌던 듯하다.[6]

어진 성격에 대한 일화는 또 있는데, 세자 시절에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희생양이 된 복성군의 가족들이 가엾다며 그들을 복권해 줄 것을 요청하고, 위에 언급된 화재 사건에 대해서도 아랫 사람들을 벌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천벌이라고 자책하는 글을 남겼다. 똑같이 어질 인(仁) 자를 썼던 인조와는 달리 정말로 어질 인 자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능양군과 인종과 비교한다는 건 인종에 대한 최악의 모욕이다) 묘호는 물론이고 능호(효도 효:孝)까지도 정말 그답다.

언젠가 세자의 옥대 등이 도둑맞은 적이 있었는데 주변을 추궁하라는 권유에도 물건은 놔두면 진짜 주인에게 돌아온다고 거부했고 머지 않아 암시장을 통해 옥대 등은 돌아왔다. 그리고 암시장을 통해 추적해본 결과 궁궐을 수리하던 일꾼이 범인임이 드러났다.

세자로 오랜기간 머무르고 있다가 왕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승하했고, 선비들로부터 성군의 자질이 있다고 칭송받은 점 등 여러모로 조선의 5대 왕인 문종과 닮았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궁궐에서 발견된 타다 만 어진을 두고 그 어진이 문종의 어진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에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어진일 것이라 생각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생김새까지도 비슷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종이 자식이 없는 이유는,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구라일 가능성이 높은게 일단 근거라곤 없는 야사에 불과하고 유교에선 자식을 못 낳는 것도 불효에 해당하는데 효자로 소문난 인종이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을리 만무했다.

즉위기간이 9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인종실록은 다음왕인 명종 때 중종실록과 같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죽은지 얼마 안되어 을사사화로 친인종파인 대윤이 박살나면서 그 반대파인 소윤에 의해 일방적인 편찬이 이뤄졌기에 기록에 왜곡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고 그나마 즉위 초기 2개월의 기록은 중종실록에 편입되어 기록되었기에 인종실록에 기록된 기록은 7개월 분량 2권 1책(1책은 부록이다.)에 불과하다. 안습.

중종 시기에 일어난 괴수 출현 소동은 인종이 즉위한 후에도 일어났다. 중종 시기의 괴수 출현 소동 항목 참고.

인종의 짧은 재위기간과 취약한 입지는 부인인 인성왕후 박씨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명종 즉위 후 왕대비가 되고 문정왕후 사후에는 왕실 최고 어른이 되었는데, 정작 명종의 후계자는 손아래 동서인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가 결정했고, 선조 즉위 초의 수렴청정도 인순왕후가 담당했다. 하지만 이는 선조가 명종의 양자로 들어와 대를 이은 것을 생각한다면 왕통상 큰어머니인 인성왕후보다 양어머니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전 문서에서는 인성왕후가 대왕대비도 되지 못하고 죽어 안타깝다고 하는데, 인성왕후와 인순왕후는 각각 인종과 명종의 왕비로 동서지간, 즉 같은 세대였다. 또한 이보다 전에 성종-연산군 때의 인수대비안순왕후도 동서지간으로 성종 때에는 왕대비로, 연산군 때는 둘 다 대왕대비로 받들어진 전례가 있다.

5 다른 매체에서의 모습

SBS의 대하사극 여인천하에서는 아역 배우 권오민이 원자 시절의 인종 역을 맡아 어린 나이에도 사리분별이 확실하고 효성스러운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인역인 정태우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화재 사건의 경우 정난정이 계획하였고, 사건 후 정난정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정왕후가 이를 묵인한걸로 표현 되었다. 또한 2008년 KBS에서 오랜만에 부활한 전설의 고향의 <귀서> 편은 죽어서 귀신이 되어 나오는 인종이 나오기도 한다.

인종 독살설을 다룬 KBS의 사극 천명에서도 세자 시절부터 등장했다. 배우는 임슬옹.

최달수 화백의 우리나라 좋은나라라는 학습만화에서는 짧은 기간동안 왕위에 있다가 급사했기 때문에 "내가 왜 죽었지?"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는 드립을 쳤다.

겁스 무한세계조선-2에서는 인종독살설을 받아들여, 문정왕후가 급사하고 인종은 51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리고 그덕에 임진왜란에도 이기고 나가사키를 할양받고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게 되어 서구 열강과의 개방을 시작하게 된다.[7] 그야말로 일본과 조선이 뒤바뀐 세계.
  1. 적통의 대군이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나 왕위계승에서 후궁 소생보다 우선이었다. 여기서 예외는 너무 늦게 태어나서 어쩔 도리가 없었던 영창대군 정도.
  2. 정확히 말하면 왕에게 시호로 붙는 '효'자는 선왕의 위업을 잘 이어서 '효도했다'는 의미. 그래서 중국 황제들도 보면 시호가 2글자이던 초기에는 창업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효~황제였다. 한문제는 태종 효문황제, 한경제는 효경황제, 한무제는 세종 효무황제 하는 식으로.
  3. 억이라는 이름이 많이 쓰는 한자였기 때문이다.
  4. 현대에 와서는 3살 아이가 책을 읽는 일이 이제는 비교적 흔한 일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동화책이나 그림책과 같은 아동용 도서가 없었으며 있는 서책이라고는 거의가 외국어-한자로 쓰여진 철학서적-유교 경서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5. 단, 신하들이 인종에게 고기를 먹도록 권하자 인종은 문정왕후께서도 고기를 드시지 않는데 어찌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느냐고 거부했고, 신하들이 문정왕후에게 가서 인종께 고기를 드시라고 권해드려 달라고 부탁하자 문정왕후는 그러겠다고 하고는 실제로는 고기를 권하지 않았다. 즉 인종의 사망을 방조한 미필적 고의는 충분하다.
  6. 다른 버전에는 재위에 오르면 내정할 차기 삼정승감을 병풍 뒤에 적어놓았다고 한다. 해당 인물은 영의정에 피장, 좌의정에 화담 서경덕, 우의정에 북창 정염. 셋다 선가, 도가와 연관이 깊은 인물들로 피장은 말그래도 갖바치,가죽장인이란 뜻이며 성명은 불명이다. 전해오는 얘기에는 어린 조광조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임혁이 분한 역이며 홍명희 임꺽정에서는 갖바치 양주팔, 즉 병해대사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정염은 도가에서 정북창으로 알려진 인물로 어려서 학문에 통달했으며 특히 점복에 능해 여러 기이한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부친 정순붕이 윤원형의 심복으로 사화를 일으킨 탓에 환멸을 느껴 잠적 후 생을 마쳤다.
  7. 무한그룹에서는 갑작스러운 개방을 센트럼의 영향이라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