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포로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발생한 일본군 포로들 및 일본군이 붙잡은 적군 포로들과 관련된 항목이다. 일본군 포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에도 발생했으나 여기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여담으로 상당히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일본어 위키백과에 일본군 포로 항목은 따로 없다.

2 일본에 포로는 없다

1944년 까지 일본군은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포로로 잡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사이판 전투에서는 31,000명중 921명이, 타라와 전투에서는 2,619명중 17명만,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22,000명중 216명만이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 99.5%가 전사하거나 자살해 버렸다. 다른 군대들의 경우 스탈린 그라드에서는 포위된 30만의 독일군 중 9만명 정도가 항복했고, 웨이크 섬 전투에서는 600여명의 미군 중 400여명이, 토브룩 함락때는 영국군 110,000명 중 3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심지어 나치의 악랄한 포로학대를 알고있을 폴란드 시민들도 바르샤바 봉기 때 시민군 50,000명중 15,000명이 항복했다. 이렇듯 포위되어 탈출로가 없는 상황에서는 적어도 몇 십%의 포로가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일본군은 겨우 0.5%정도만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 99.5%가 전사하거나 자살했다. 고대 전투에서도 칸나이 전투 때 로마군 6만명 중 일만+일만(주둔지 경계병)이 포로로 잡힌걸 감안하면 역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2.1 일본군이 항복하지 않는 이유

전쟁 내내 일본 해군 장병들은 수세에 몰려도 얌전히 항복하지 않고 반자이 어택을 하는 등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저항을 했는데 이유는 바로 전시에 항복을 하는 것을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상과 함께, 같은 이유로 설령 장병이 치욕을 감수하고 항복해도 돌아왔다간 죽는 것보다 더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앞뒤 사정 따지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항복과 포로 자체를 대역죄로 여겼다. 몇몇 정상적인 지휘관들은 다른 나라 처럼 포로가 되었던 아군을 멀쩡히 환대했지만 그런 지휘관은 극히 일부였고, 그나마도 또라이를 좋아하던 일본군인지라 제대로 진급을 못해서 대다수가 연대장 이하였다. 덕분에 포로가 되었다 귀환한 사람들은 매국노, 국가의 적, 민족의 치욕 등으로 낙인을 찍어서 스탈린굴라그 수감자 이하로 취급했다. 덤으로 자신 혼자만 그 수모를 겪는 것이 아니라 항복의 항 한글자라도 꺼내는 순간 자신의 동료, 상관, 가족, 친척, 친구가 작살난다. 원래 일본군은 작전 실패를 한 장교들에게 할복 자살을 시켰는데 하물며 군법을 위반한 사람들과 그 관계자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또한 직접 군부의 입김이 닿지 않아도, 소문이 퍼지면 민간 차원에서 항복자의 가족을 핍박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명목상 메이지 유신명예살인을 금지했지만, 전시에 느슨한 치안으로 그런 게 제대로 지켜질 리가 없었고, 이들은 쫒겨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이기면 구국영웅, 죽으면 호국영령이지만, 살아남으면 대역죄인이기에 일본에 돌아갈 곳이 사라진다. 말 그대로 죽어야 사는 상황인 셈. 간단히 정리하면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는 순간 부라쿠민화 한다고 보면 되겠다. 이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진주만 공습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일부 일본군 파일럿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최초의 포로이자,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군에 포로로 잡힌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셈 치고, 공격대 정장 5명이 서명한 서장에서 서명을 지우고, 출격전 10명의 단체 사진에서도 삭제해 버렸다.

사카마키 가즈오는 일본 해군의 갑표적, 그러니까 대형 잠수함에서 출격하는 특수 잠수정의 탑승원이었다. 진주만 공습 때 미군 함정을 기습하려고 했지만 나침반 고장으로 표류하게 되고 그러다가 미해군 구축함 헬름에게 공격을 받아서 배는 좌초당했다. 사마마키는 탈출 중에 산소 결핍으로 실신했다가 오하루 섬 해안에서 발견되어 (미군이 주장하는) 일본군 1호 포로가 되었다. 미군은 방송을 통해 사카마키의 신원을 밝히고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을 공표했지만 일본군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동시에 사카마키를 포함해 잠수정에 탔던 10명을 전사처리했다. 대본영은 전사한 탑승원을 '군신(軍神')으로 추대했지만 포로가 된 사카마키는 제외시키면서 '9군신'으로 발표했다. 사카마키는 포로수용소에서 자결하려는 일본군 포로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일본어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포로로서의 태도도 좋았기 때문에 미군 관계자들에게서 평이 좋았다.

일본군이 가진 이런 사상은 그들의 전쟁문화에서 기인하는 문제에서도 왔다. 전국시대 때 농민 아시가루들은 전열의 장창병을 맡았고 전장에서 도망칠 경우 마을에서 따돌림이나 보복행위를 받는 문화적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데, 이러한 특징은 비단 전국시대뿐만 아니라, 구시대의 국가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고, 꼭 일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시의 일본, 그것도 20세기의 일본은 이런 전쟁문화를 공인화하고 확대해서 그 정도가 심각했다. 이런 이유로 항복한 부대가 단 한 부대도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부 사정은 알려지지 않고 항복한 부대가 없다는 사실만 알려져서 일본 군인은 애국심이 강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군인들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따라서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것을 (이념적인 면에서든 현실적인 면에서든) 패배보다 더한 수치로 생각하였으며,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군은 미군에 끌려가던 자국 조종사 포로들을 약간 구출했는데 일본군 수뇌부는 이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이들에게 참회할 기회를 준답시고 카미카제 특공으로 보내 처리했다.

어쨌든 이런 까닭에 섬에 포위되에 탈출로가 없던 일본군은 전체병력의 99%가 죽어버리는 옥쇄의 길을 택했다. 한편 이러한 사상은 심지어 적군의 포로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전투에서 죽지않고 살아서 포로가 되었으니 등신력 용기가 부족한 비겁한 군인이라서 적포로를 학대한다는 요상한 논리를 적용해서, 일본군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포로학대를 자행했고, 평범한 포로생활중에도 각종 구타와 잔혹행위로 인하여 연합군 포로사망률이 높은 편인데 도쿄 전범재판에서 밝혀진 바로는 27.1%[1]정도지만 미군 포로의 경우 40.4%가 사망했다.

일본군의 극단적으로 항복과 포로를 죄악시하는 사상은 1941년 1월 8일, 육군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가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군기가 흐트러지고 있다며 발령한 훈유(訓諭)인 '전진훈'으로 인해 아예 공식적으로 명문화된다. 전진훈은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말라."고 무조건적인 항복 금지를 못박아 놓았기에, 태평양 전쟁에서 무수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옥쇄라고 쓰고 개죽음이라 읽는 상황에 몰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패전 뒤 도조 히데키는 (정황으로 보아 쇼가 아니었는지 매우 의심스러운)자살 기도에 실패,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고 극진한 치료까지 받는 크나큰 치욕(...)을 당함으로서 전진훈이고 나발이고 전부 헛소리였음을 몸소 입증했다.

恥を知る者は強し。常に郷党(きょうとう)家門の面目を思ひ

愈々(いよいよ)奮励(ふんれい)してその期待に答ふべし
生きて虜囚(りょしゅう)の辱(はずかしめ)を受けず
死して罪過の汚名を残すこと勿(なか)れ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강하다. 항상 고향과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
더더욱 분발하여 기대에 답할 것이며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는 짓을 하지 말라
-전진훈 2장 8절

다만, 일본군이 원래부터 이렇게 야만적이었던 군대는 아니었다. 이들 역시 메이지 유신 초창기에는 포로 대우를 그나마 정상적으로 한 축에 속했다. 이를테면 러일 전쟁 당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등 몇몇이 포로로 붙잡혔는데 도고 헤이하치로는 그를 정중히 대우했고 필요한 서비스 지원 역시 충실히 했다. 또한, 러일전쟁 와중에 포로가 된 일본군 병사들의 경우, 딱히 적에게 기밀을 넘긴 것이 아니면 포로 전력이 있다 해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숨겨진 공로가 발견되면 정상적으로 훈포상을 내렸다. 즉,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 문제는 30년대 군국주의화 이래 일본을 지배한 퇴행화와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일본인과 일본병사들 스스로도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일본 군부는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히게 되면 끔찍한 꼴을 보게 될것이라 선전하였고 실제로도 미군의 일본인전사자 유체의 절단 같은 사건이 있었으며 이러한 사건이 언론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됨에 따라 미군에게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이것은 미군의 항복 권유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등의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2.2 다른 나라의 경우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서 항복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기는 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군의 군형법도 지휘관이 자기 할 바를 다하지 않고 적에게 항복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엄하게 규정한다. 또한 (군형법 제22조) 지휘관이 아닌 군인이 투항을 하면 '적진으로의 도주죄'라고 해서 사형에 처한다.(군형법 제33조) 아군이 자기 멋대로 아군을 불리하게 하도록 내버려두면 패배는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군대라면 설령 항복을 말라고 법에 규정해도 임무를 수행할 수 없고 싸워봤자 득도 없으면 항복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본국에 돌아와도 기밀 누출 같이 아군에 해가 될 행위를 하지않고 항복한 것도 완전히 임무를 저버린 것이 아니며, 어쩔 수 없었다고 입증하면 군법 위반으로 처벌하기는커녕 참전 용사로 대접한다. 법학 용어로 "기대가능성이 없다"라고 한다. 군인도 일단 천부인권을 지닌 인간인 이상 목숨이 누구보다 소중한 가치인 건 맞지만, 군인의 경우 자신을 희생해서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임무의 가치를 그보다 우선한다는 것인데, 임무를 성공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으라는 건 군인에게도 기대가능성 없는 행위다. 때문에 한국군의 군진수칙에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했을 경우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어찌보면 위 군형법과 모순되는 규정을 두고있다 진주만 공습후 필리핀에 고립된 미군도 보급이 끊겨 탄과 식량은 없고 적은 많은 상황을 설명하고 상부의 허가받고 항복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운명은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총맞고 죽는게 더 나을 상황이었긴 하지만) 개죽음이 뻔한 상황이면 상부에 보고한 뒤 항복이 가능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퇴와 항복을 금지한 유명한 사례로 스탈린의 명령 227호가 있지만, 실제 일선에서는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고 명령을 내린 스탈린조차도 다른 수단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실제로 전쟁 중기부터는 포로가 되었던 소련군 대부분이 원대복귀하며 유명무실해졌다. 반면 일본군은 이를 너무 철저하게 지켜서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많은 병력과 충분한 영토와 공업능력이 갖춰진 상황인지라 이런 병크를 저질러도 어느 정도는 용납이 되지만(물론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가진 것 없고 영토가 작은 일본이 이런 짓을 따라한 것 자체가 에러다. 그 소련조차 베를린 전투 직전 시기가 되면 인원이 모자라 보통 1만명 이상의 병력인 사단의 실제 병력이 연대도 안되는 2천명 이하인 등 제대로 완편된 부대가 없어서 본의 아니게 세계에서 가장 차량화가 잘된 군대가 되어버렸다. 전후에 팔다리 하나쯤 없어도 여자 사귀는데는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오죽 남자가 줄었으면 독일군 포로들을 러시아 여성들이 덮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인구 많은 러시아도 이럴진대 인구 얼마 되지도 않은 일본이 이런 짓을 따라 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2.3 이래도 되는가?

당연히 안 된다.

가끔씩 "적에게 투항한 아군 포로를 인정하지 않고 엄벌히 처벌하면 죽을때까지 싸울테니 나라엔 좋지 않겠느냐"라며 일본식의 포로취급을 두둔하는 개념없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는 '포로의 입장이나, '인간의 보호본능'을 잘 모르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자긴 항복안하고 죽을자신 있나보지? 자기 자신조차도 잘 모르는게 분명하다 사실 어지간히 정신나간 놈이거나 어지간히 정신나간 군대, 국가에서 복무하지 않는 이상 적에게 항복을 하고 싶어하는 군인은 별로 없다. 대다수의 포로는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항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포로들에게 "너 반역자", "너 오면 사형" 따위의 취급을 받게된다면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포로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별거 없다. 아군이 너무 우세하지 않으면 마지막 남은 희망(?)인 적군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불고, 충성을 맹세해 적국에 귀화를 시도하는 거다. 만약 그 적국이 일본제국이나 파시스트 같은 인간백정들이 아니라 투항해도 먹고 살만한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야기 끝이다.[2] 때문에 정상적인 국가들은 포로가 된 아군이 이적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참전용사로 대우해주고, 만약 오랜기간 전향하지 않는 경우 존 매케인처럼 국가적으로 영웅대우를 해주거나, 장무환씨의 경우[3]처럼 적어도 국민들은 영웅으로 대접해준다

더군다나 이런 적에게 넘어간 장병들이 전시선전에 동원되어 자신의 전 조국을 "비인도적인 전체주의 국가"로 강도높게 비판하고 동료들에게는 넘어오라고 회유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그러면 회유를 받은 군인들은 '저런 더러운 배신자 새끼!' 라고 생각하기보단 뭐 여유 있는 높으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오오 쟤가 저렇게 잘 사는걸 보니 나도 넘어가면 잘 살겠네?'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고, 포로 대우를 그딴 식으로 하는곳이니 병사나 국민에 대한 대접도 별로 좋지 못할게 뻔한지라 전선의 장병들도 심적 부담과 박탈감을 유발해 "나는 국가로부터 존중받는 국민이 아니라 그저 전쟁터의 장기말일 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서 실시간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떨어지고, 최종적으로 멀쩡한 부대가 전투도 없이 적국에 투항하는 골때리는 사태가 벌어질수 있다. 이런일이 벌어진다면 이미 심리전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4]

거기에 일본군 대가리에는 '포로'라는 단어 자체가 들어있지 않아서, 만약 포로가 되었을 때 행동지침 또한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예를 들어 적의 심문에 대처해 중요 정보를 넘기지 않는 방법이나. 일본군이 포로로 잡히면 잡히는 족족 가지고 있는 정보를 술술 부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군 지휘관은 교섭을 통한 아군포로의 권리보호를 받거나 포로생활중 포로들을 감독하는 방법 등을 배우지 않아서 일부 포로수용소에서는 평소 가혹행위를 일삼던 지휘관이 포로가 된 후 하급자에게 죽도록 맞고 종전때 까지 죽어지냈다는 기록도 종종 있다. 자업자득

웃기는 점은 포로가 된 군인은 실전을 겪어본 숙련병이란 이야기이고, 특히 당시 파일럿은 경우 수많은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적군과의 전투경험이 매우 중요했는데, 일본군 수뇌부는 '비겁하다', '감투정신이 부족하다'는 개소리나 지껄이며 숙련병 포로들을 할복이나 자살공격으로 날려버렸고, 파일럿들은 카미카제로 날려버려서 안 그래도 부족했던 인력을 시궁창에 버려버렸다. 보너스로 후퇴나 항복을 해도 죽는 건 똑같으니 일본군 대다수는 생환하지 않고 전선에서 소멸해버려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며 얻은 전훈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후임자는 아무 것도 배우지도 단점을 개선하지도 못한 채 종전 전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벌여 삽질만 하고 죽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반대로 미군은 어떤 초보 파일럿이 독일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다시 미군으로 돌아와 전선에 복귀한 이후 10.5킬을 달성하고, 인류 최초로 음속을 돌파하고, 수많은 실험기를 타면서 공군을 넘어 항공기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사례가 있다. 그가 바로 다름아닌 척 예거다.

3 일본군 포로들

결국 이론상으로 포로는 없어야 정상이지만, 당연히 일본군 중에도 항복한 사람이 많이 있다.

3.1 항복한 사례들

항복하고 포로가 된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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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선에서. 투항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병사의 말에도 권총으로 자살하려는 일본군. 그냥 영어를 못 알아들은 게 아닐까 호주 병사의 뒷모습에서 깊은 빡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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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육군과 일본 육군 포로.

일본군 중에도 멀쩡한 인간은 있던지라 프래깅을 하고 연합군에 투항하거나 탈영해 투항하거나 전투에 패한 뒤 항복한 포로들이 있었다.[5]이미 프래깅을 하는시점에서 뭔가 크게 잘못된거 같지만 신경쓰지 말자.

실제로 의식을 잃는 등 싸우고 싶어도 어쩔 수 없어서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으며, 애초에 일본군의 뇌리 속에 포로로 잡힌다는 개념이 없었으니 일단 잡히면 군사기밀이 술술술 흘러나와 연합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6] 가장 심했을 때 1/100에 달했던 일본군 포로/전사자의 비율은 오키나와 전투에 이르러서는 1/7까지 치솟아, 이 시점에서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 일본군"의 신화는 완전히 무너진다. 그나마 이렇게 포로가 된 장병들도 본토에 우글우글한 오합지졸들이 아니라 나름 전장에서 구른 정예병력들이었기 때문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본토 상륙에 착수했더라면 아마 포로/전사자 비율은 역전되었을 것이다.

부대원 전원이 모두 도망가 부대가 증발하기도 했고, 조선 출신 군인들은 미군에게 투항하거나, 멀리 멀리 도망가 광복군과 합류해 일본군에 잠입해 있던 인면전구공작대 총대장과 함께 일본군을 엿 먹이기도 하였다.

특히나 관동군의 경우엔 교전도 제대로 치르지 않은 채[7] 소련에게 무조건 항복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로 도망치거나 하지 않은 이상 고스란히 소련으로 끌려갔다. 소련은 1950년대에 이들을 일본으로 귀환시켰다. 그런데 일본의 공안당국은 소련에서 포로 생활을 한 관동군 출신들을 잠재적인 공산주의자로 보고 집중 감시했다(...). 이뭐병...

3.2 포로들의 대우

만약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산 채로 금니가 뽑히거나 죽을만큼 구타당하지 않고 무사히 후속부대에 인계된다면 고생 끝. 행복 시작. 그러나 포로 학대를 했던 놈들은 고생 끝, 지옥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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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해군 전함 USS 뉴 저지 함을 청소하는 일본 해군 포로.

전후 사정을 모르면 미 해군들이 포로의 옷을 빼앗고 동물원 원숭이 취급하며 치욕을 주는 전쟁범죄 인증샷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사진인데, 실제로는 저 포로가 '적이 주는 옷은 입을 수 없다!'며 정신승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적이 주는 밥은 왜 먹고, 적이 시키는 청소는 왜 해? 당시 미 해군은 일본군 포로를 획득하면 착용한 피복을 모두 벗긴 뒤 함내 재고품인 새 샘브레이당가리를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어자피 막입는 작업복이라 비싼 옷도 아니고, 해군 특성상 붙잡힌 포로들 대다수가 물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아예 못 입을 만큼 걸레짝이 된 옷이 아니라면, 포로의 피복은 세탁 및 건조 후 도로 돌려줬다.

일본군의 포로 생활에 대한 비공식적인 사료로서도 활용할 만한 오오카 쇼헤이의 자전적 소설인 '포로기'에서는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 포로생활 중에는 일본군 계급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 장교가 아래 계급에게 굽신거리기도 하였다. 도리어 분위기 파악 못하고 끗발 행세하려던 장교나 하사관 출신 포로들이 병사수병 포로들에게 왕따나 집단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 포로생활은 매우 윤택했다고 한다. 밥은 많이 주는데 노동은 별로 시키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이 좋은 생활이 끝났다며 한탄하는 포로도 많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런 포로들의 모습(아무 생각없이 먹고 싸고 놀고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짐승같았다고 표현한다.
  • 집단 자살을 일삼는 일본군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미군에 자발적으로 투항하는 일본군도 많았다.
  • 포로 수용소에는 여자가 없었기 때문에 곱상하고 젊은 남자를 여자로 분장시켜 놀았다고 한다. 동성애도 많았다.
  •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과 대만인은 갈등을 우려하여 일본인과 별도로 수용하였는데 일본이 졌다는 소식에 조선인, 대만인 포로는 일본인에게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
  • 영어가 좀 되는 주인공은 미군들과 얘기를 많이 했는데, 미군 중 하나가 '여군은 장교들 장난감일 뿐이지'라고 말하여 주인공은 미군에게 실망한다. 그러나 정작 저자는 앞부분에 남색과 학대를 즐기는 변태로 묘사된다. 대체 뭘 실망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한국인 등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식민지 주민들도 다수 포로로 잡혔고, 전쟁법상 하와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일본군의 지옥같던 징용생활과 비교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적당히 일하고 돈을 받는등 징용시절엔 꿈도 못꿀 혜택을 누렸고 건강상태 등 모든 생활이 매우 나아졌다. 그리고 일본군의 학대로 원한이 쌓여있던지라 일부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연합군으로 참전하겠다고 자원했지만 제네바 협약에 위배되는 일이라 무산되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포로가 되거나 카미카제 특공을 시도하다 포로가 된 경우 이오지마 솔저, 카미카제 솔저로 불리며 포로 감시원들에게 특별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오지마에서 잡힌 포로의 회고에 따르면 이오지마 솔저와 카미카제 솔저가 다른 전선에서 끌려온 포로들보다 한 수 위(?)로 여겨졌다는데, 아무래도 극악한 생존률과 이오지마와 카미카제가 미국인들에게 가졌던 이미지가 크게 작용한 듯.

간혹 소수의 포로들이 자신들을 붙잡은 연합국 군인들과 친해진 경우도 있었다. 한 미 해군 잠수함이 일본 해군 조종사 한 명이 해상에서 표류중인 것을 발견하고 구조, 하와이에 포로를 잡았으니 귀항 시 인계병력을 보내달라고 보고한 적 있었는데, 이를 보고받은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 해병 헌병들을 입항 예정일에 대기시켰다. 잠수함이 입항하고, 함장에게 헌병 지휘관이 포로를 인계해 달라고 하자 함장이 포로를 데리고 나오라고 시켰는데, 나온 포로가 앞치마와 취사모를 착용하고 식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헌병들이 기겁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당시 미 해군 잠수함들은 승조원 수가 항시 부족해서, 누군가를 구조하면 그가 부상자가 아닐 경우 내릴 때까지 계급고하 관계없이 승조원들의 일을 보조토록 하는 관례가 있었는데[8], 이 잠수함에선 그 포로를 조리병 보조를 맡겼던 것(...)이다. 승조원들은 그 포로 밥 잘했는데 아쉽네 하며 헤어지는 걸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잡힌 관동군 포로들은 얘기가 달랐다. 수많은 포로들이 일본으로 송환되는 줄 알고 탔던 기차는 시베라아행 기차였다. 포로들은 용변과 취식도 힘든 열악한 조건[9]에서 운송되었는데 여기에 소련 민간인들의 조롱과 약탈까지도 간간이 있었다. 또한 초반에는 일본군 시절의 계급 등도 어느 정도 통해서 군관 출신인 포로가 병사 출신인 포로에게 자신의 짐을 들게 하는 등의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3.3 카우라 수용소 탈주사건

1944년 8월 5일,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허술한 수용소 관리를 틈타 일본 육해군 포로들이 담요를 철조망에 덮어씌워 길을 만든 후 집단으로 탈주를 감행했다. 경비대원들이 기관총으로 응전했으나 수용소장 포함 4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 포로는 231명이 사살되거나 자살했으며, 이 중에는 탈출에 참여하지 않은 포로들도 포함되어 있다. 부상자는 108명이며, 378명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탈출자 전원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탈주 이유는 포로가 된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죽음으로 수치를 씻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고로 보통 포로 수용소에서 탈주하는 이유는 살아서 복귀하기 위해서인데, '도마 위의 잉어'처럼 깨끗하게 죽는 게 목적이었으니 참으로 끔찍하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이 탈옥에 가담하지 않으려던 몇몇 포로들이 몇 가지 수단을 동원해 경계병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했으나, 이들이 눈치채지 못해 사전에 막지 못했다.

일본 육군에 강제로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한국인들은 이 미친 짓거리에 가담하지 않았다. 수용소에 있으면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미쳤다고 저 자살행위를 하겠냐만은...그것도 일본인과 함께말이다

3.4 전후의 포로들

1946년에서 1947년까지 미국영국은 포로를 석방했다.

관동군 포로는 1946년에 18,616명이 석방됐고 1947년에 166,240명, 1948년에 175,000명이 석방됐다. 1949년에 97,000명이 추가로 석방됐고 1950년에 1,585명이 석방됐으며 2,988명은 소련에 남았다. 포로 생활 중 사망한 사람은 약 6만 명.

4 대중매체에서의 일본군 포로

  • 상술한 일본 작가 오오카 쇼헤이의 자전적 소설인 '포로기'가 유명하다.(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실제 육군 병사로서 전쟁에 참여했던 작가는 본인의 겪은 포로생활에 대해 소설형식으로 서술했다. 작가는 도시에서 자란 인텔리계층으로 태평양 전쟁 중 병들게 되자 부대로부터 버림받는다. 이 와중에 몸이 피곤한 나머지 수풀속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미 육군 병사가 그를 발견하고 포로로 데려가게 된다. 작가는 이를 천운이라고 표현하는데 만약 수풀속에서 잠이 들지 않았다면 그를 발견한 주인공이 공격했을 것이고 이 와중에 죽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본군으로서는 드물게 인텔리계급이었기 때문에[10] 영어가 그나마 가능해 포로수용소에서 통역 역할을 맡으면서 생활한다. 참고로 주인공을 버렸던 일본군 부대는 미군과 마주쳐 전멸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버림받지 않았으면 작가도 여기에 휘말려 죽었을 것이니 정말 천운이 두 번 연속으로 터진 셈이다.
  1. 단 이 집계는 중국군 포로가 빠진 수치라 실제 사망률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수정바람
  2. 데이브 그로스먼의 살인의 심리학에서는 미군이 신사적인 포로대접 덕분에 더 적은 피해로 승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3. 중국대사관에 구출요청을 시도했는데 외무부가 씹었다.
  4. 북한이 대북방송이나 대북전단지 살포에 극도로 예민하고 신경질스러운 반응을 벌이는게 바로 이런 이유다.
  5. 사실 이게 정상인데 별도 항목으로 분류된것만 봐도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정상이 아니었는지를 알 수 있다.
  6. 영화 씬 레드 라인에서는 고든 대령이 일본군 포로들을 보고 귀중한 정보원이라며 기뻐하는 장면도 있다.
  7. 특히 도미나가 교지는 아예 제대로 치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개전하자마자 항복했다.
  8. 생명의 은인들이 시키는 것인 만큼 대부분 군말없이 따른 편이었다고 한다. 육군 항공대 중령이 구조된 후 몸이 좀 회복되자, 부사관 한 명이 따라오라고 하더니 기관실에서 여러 잡무를 시켰는데, 아무 불만없이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9. 가다가 멈추고 내려서 취식, 용변을 하는 식. 기차가 떠날 때면 용변 중이라도 올라야 했다. 조금만 지체하면 총살.
  10. 일본군은 본래 학생에게 징집을 유예했으나 전쟁말기 전황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자 학생들도 징집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군의 절대 다수는 학력이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