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평가

1 개요

장제스의 평가에 대해서 국내의 여론은 물론 한때 국내외의 학계에서도 장제스를 거대한 대륙을 공산당에게 뺏기고 섬으로 튄 무능한 인물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국민당의 주요 문헌의 기밀성으로 인한 접근의 애로사항, 승자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지, 스틸웰을 중심으로 하는 인종차별적 관점을 고수한 서양인들의 무분별한 비난이 주를 이루면서 한때 그는 학계에서 무능의 극치인 인간이라는 투로 평가절하되었으며 그러한 사관의 정점에는 로이드 이스트만의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가 있다.[1] 장제스가 워낙 멍청해서 대륙을 뺏긴 것 뿐이며 국민당은 항일을 하지 않고 후방에서 놀았고 그의 정권이 이뤄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혁명사관은 1980년대에 절정에 달했으며 이 항목을 포함하여 나무위키의 모체가 된 리그베다 위키 전반도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여 비슷한 논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화민국의 기밀문서 공개, 장제스 일기 발굴, 웨드마이어 장군의 회고록 등으로 인해 사료들이 발굴되면서 장제스는 크게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서구 학계에선 2003년 영국의 저널리스트 조너선 펜비가 장제스 평전에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장제스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을 시도, 장제스의 단점들에 대해 혹독히 비판하면서도 장제스가 없었을 중국의 파멸적인 결과를 지적하고[2] 장제스의 정권이 결국 최초의 근대 국가의 기구들을 중국에 제공했으며 마오쩌둥의 정권과 달리 최소한의 정상적인 정권이었다고 규정함으로 매우 전향적인 재평가를 시작했고 국민혁명군 장교 출신의 학자 레이 황, 영국 학자 라나 미터, 미국 외교관 출신의 제이 테일러 등의 연구자들이 장제스에 대해 매우 전향적인 재평가를 하게 됨으로 무능한 장제스란 사관은 서구 사학계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심지어 장제스와 적대한 중화인민공화국조차도 장제스의 항일 일대기에 대해 재평가하며[3] 장제스의 위상이 올라갔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수용되기 시작, 국방대학교 기세찬 교수 등은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군의 행적에 대해 재평가를 해주고 오히려 스틸웰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있다. 허나 학계의 최신 정설이 즉각 반영되기 힘든 대중들에게는 이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등은 과거 사관을 중심으로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해 터무니없는 비판과 매도를 서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역덕들을 중심으로 장제스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고 권성욱의 중일전쟁 등에서 그가 반봉건적 군벌이라고 비판을 하면서도 장제스의 공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시안 사건이 터지던 당시의 미국 대사인 넬슨 존슨은 장제스의 정적들조차 중국 전체를 규합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은 장제스 밖에 없다고 인정하고 마지못한 지지를 보냈다고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물론 장제스의 정권과 치세는 수많은 한계와 비판의 요소가 많으나 청조 붕괴 이후의 시대적 상황이 마치 전적으로 그의 잘못인 양 덤터기를 쓴 비판이 많으며 장제스가 거둔 공에 대해선 사료 부족 내지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4] 스틸웰이나 시어도어 화이트같이 중국 사정에 무지하고 인종차별적 관점으로 무장했던 관계자들의 편견에 찬 매도가 정설인 양 무비판적으로 인용되었다. 그리고 장제스가 독재자라고 비판함과 동시에 장제스가 철권통치를 안했다는 비판이 공존하는 기묘한 양상을 보인다. 장제스 문서의 평가 단락에서는 장제스와 장제스 정권의 공과 실에 대해서 될 수 있는 한 살펴보고자 한다.

2 정치 분야

2.1 긍정적 평가

2.1.1 중국 통일

마오쩌둥을 중국 통일의 주역으로 생각하고들 있지만 실제로 중국 통일의 기반을 다 닦아놓은 것은 장제스다. 군벌들이 남아있단 이유로 간과되지만 장제스는 당장 위안스카이 시절부터 남방에 대한 통치력은 행사도 못해본 북양정부 시절과는 비교도 안되는 안정적 정권을 유지했다. 안직전쟁이니 직봉전쟁이니 우두머리 자리부터 수두룩하게 갈려나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호국전쟁이다, 호법전쟁이다 아예 중앙에 대한 독립을 선포해버리는 일에 거의 손놓고 협상이야 했던 북양정부와 달리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는 반장전쟁 마무리 이후에는 1931년 말의 하야 사태를 제외하면 장제스+기타 유력 인사들과의 합작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굴러갔고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정부, 광동파의 광저우 국민정부 등의 도전자는 물론, 차이팅카이의 복건 정부같은 독립세력들을 아주 간단히 물리쳤다.

군벌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설명하자면 난징 국민정부 산하에 여전히 군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되 장제스 시대엔 산서성 먼로주의 운운한 옌시산이나 박쥐처럼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를 오간 성스차이, 잘 쳐서 3당 운운하며 독립 시도한 차이팅카이 등이 최고 수위지만 북양정부 시대에는 그냥 남방 군벌들은 중앙 조까 외치면서 다들 독립정권 세우고 연성자치론 운운하며 최소한의 연결 고리도 없었다. 하지만 장제스 시대에는 다들 국민당 산하란 큰 틀은 유지했고 최대 위협인 반장전쟁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리고 나라가 어떻게 되기나 말기나 자기들만 먹고 살겠다고 백성들 쥐어짜서 전쟁질만한 군벌들과 달리 장제스 시대엔 최초로 편견회의라고 군축과 군벌 통제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것에 반발한 결과가 반장전쟁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반장전쟁에서 이겼고 최대 경쟁자 펑위샹의 기반을 붕괴시켰으며 이후 초공작전 등을 빌미로 지속적으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권위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일전쟁에서 장제스가 기반 다 털리고 가장 적대적인 사천, 운남 군벌들과 동거를 하게 되었는데 장제스의 권위가 그 어떠한 때보다 증대되었단 점에서 군벌도 통제못한 장제스 운운은 악의적인 중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2 소문과 달리 순했던 통치

장제스가 독재를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국부천대의 원인이 되었단 설명은 어불성설이며 차라리 독재가 부족해서 쫓겨났다고 하는게 더 말이 된다.

흔히 악랄한 독재자 운운하지만 장제스가 독재자인건 사실이더라도 마오쩌둥 급으로 막나간 적은 없고 마오쩌둥이 자기 말 안듣는 당내 경쟁자들을 캉성의 공포정치와 반우운동, 문혁으로 쳐죽이거나 반병신 만들어버린 것과 달리 장제스는 후한민, 왕징웨이 등과 끝내 합작의 방식을 추구했고 아예 총들고 반란을 도모했던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바이충시 등도 끝까지 죽이지 않고 당내 고위직으로 남겨뒀다. 당장 장제스에 대해 군사반란만 최소 3번, 영한합작 때부터 반장운동을 한 리쭝런이 부총통으로 선출된게 당시 중화민국이다. 만약 장제스가 마오쩌둥처럼 나갔으면 이들은 예전에 죽었다.(...)

또한 루쉰, 라오서 등의 반장 문필가, 지식인들도 장제스 정권 시절부터 온갖 장제스 비판을 쏟아내며 '민주적인 옌안의 공산당'을 찾아댔지만 장제스가 수많은 지식인 탄압을 했다는 공산당 선전과는 달리 실제로 장제스가 누굴 얼마나 조졌냐고 물어본다면 중국민권보장동맹, 중국좌익작가연맹 소속 작가들의 암살이나 중일전쟁 시기의 일부 가택연금이 최고 수준이다. 당장 장제스의 대안으로 제시된 마오쩌둥은 민본적이고 민주적이라 인심을 얻은게 아니라 자기 딴지 걸 놈들은 다 쳐죽인 다음에 자신의 잘못을 숨길 수 없던 장제스와 달리 민주 세력으로 위장하여 미국과 지식인들을 현혹하는 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에 인심 얻은 거다. 중화민국 시절 국민당과 장제스 까던 라오서 등은 마오쩌둥 시대에는 반동으로 몰려 죽었다.(...)

그나마도 착각하면 안되는 건데 이 인심도 미국 좌파와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당 상황도 모르고 거의 낭만주의적인 시각으로 공산당을 보는 것을 말하지 일반 대중의 장제스에 대한 지지는 항일의 영도자로서 절대적이었다. 당장 중일전쟁 터지고 일본군 점령하의 베이징, 상하이, 난징, 광저우에서 다들 뛰쳐나와서 외친 구호부터가 장제스 위원장 만세다. 국민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1950년대까지도 유지되어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장제스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돌면서 이에 호응하는 봉기를 유도하기도 했다.[5] 물론 공산당이 중국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그런거 없어졌지만.

2.2 부정적 평가

2.2.1 어쨌거나 독재는 독재

물론, 어디까지나 장제스가 마오쩌둥보다야 훨씬 온건한 통치를 했고 40년대에 퍼진 중상모략이 모함이라 하더라도 장제스가 독재자가 아니냐면 물론 그건 아니다. 남의사라거나 CC단 등이 기존에 알려진 중국판 게슈타포는 아니란 거야 재평가 됐다 하더라도 장제스가 반공을 위해 지식인과 예술가들에 대한 통제, 억압을 시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의 치하에서도 고문, 폭력이 동원된 공포 정치는 존재했다.

2.2.2 측근, 족벌 정치

4대 가문이 전쟁 수행 등에 공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장제스의 측근과 친인척들이 장제스를 등에 업고 경제 파탄으로 이어질 환율 장사와 부정부패 행위로 인하여 중일전쟁 종전 직후 중국 경제를 개박살낸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장제스가 이러한 측근 세력들의 부패와 만행에 있어 이들이 자신의 정권의 기반이란 이유로 단호한 대처를 하지 않았단 것이다. 단호한 대처를 안한 정도로 끝나면 모르겠으되 4대 가문 관련에 있어선 정말로 거의 터치를 안하는 수준이었다. 마오쩌둥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이런 건 실드를 치지 않는다.

3 경제 분야

국민당 일당독재 하 南京國民政府(남경국민정부)의 정치적 성격에 관해서 평가가 다양한 데 비하면 경제적 성취에 관한 근래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한세대학교, 강명희 교수.
남경정부 시기 국가 주도하 국민경제 건설(2006)

장제스가 제일 못한 분야로 흔히 오해받으나 오히려 가장 고평가되는 분야 중 하나.

소위 황금 10년이라 불리는 1927~1937년 시절에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은 관세자주화 및 통화의 일원화, 국내 통행세 철폐, 조세개혁, 조계 회수 등에서 노력했다. 실제로 난징 정부에서 발행한 법폐 통일은 성공했고 이 시기에 상당한 공업화가 이루어졌으며 저장을 비롯해 국민당 직할지에선 농민들의 생활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이 때문에 1936년런던 채권시장에서는 그의 경제개혁이 성과를 반영하여 중국국채이자가 일본국채의 이자보다 저렴한 조건으로 발행되기까지 했다.[6] 실제로 이런 개혁을 바탕으로 장제스의 난징 정권은 위안스카이 이래 가장 풍족한 재정을 자랑했다.[7] 한때는 국민당이 한게 없다는 공산당식 사관이 우세였으나 현재는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국민당이 한계 속에서도 할 수 있는 만큼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각에선 이게 다 역덕들이 주류학계를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논문만 좀 찾아봐도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3.1 긍정적 평가

3.1.1 안정적인 농업 정책

국민당과 장제스 정권은 가난과 핍박에 허덕이는 농촌 문제가 중국의 불안정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고 농촌의 모순이 낳는 불만이 공산당의 세력확장에 기여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어서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토지개혁을 비롯한, 농촌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한 대책을 강구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일련의 개혁이 추진된 20~30년대의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의 권력을 가히 취약하다고 할만했고[8] 장제스가 제대로 통치할 수 있는 곳은 난징, 상하이를 비롯한 동부 해안가 일부 대도시와 강서성 일대 정도였다. 하지만 국민당이 지배하던 강서성 지역에서만큼은 제한적이나마 몇몇 성공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소작료 납부를 제한한 감조정책과 관습적인 소작농의 권리 보호 및 지주들의 불법적인 착취를 법으로 금지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단속하려고 노력한 것이었다. 국민당의 개혁은 농민과 지주의 눈치를 동시에 보느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할 온건한 개혁이었으며 지주들의 편법 행위가 근절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이를 고평가하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당장 마오쩌둥의 공산당도 국민당의 감조정책을 중일전쟁 기간 중에 채택하여 그걸로 재미를 봤다.

또한 중앙에서 개혁을 하려 해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 탁상공론에 그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1928년 현조직법을 발표하여 촌락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 근대적 교육을 받은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구장에 임명함으로 농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이로 인해 농촌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으며 지주 세력의 영향력도 상당히 축소되었다. 하지만 지주들은 구장 및의 향진장의 90%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며 여전히 농촌의 왕초로 군림하고 있었고 국민당이 임명한 현 관리들의 추진 사업에 번번이 딴지를 걸었고 토지등기법이가 경찰행정 등은 이들의 방해로 잘 시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농촌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보갑제까지 부활시켰으나 1937년까지도 국민당이 경찰도 파견하지 못하는 현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농촌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향진들이 국민당에 의해 통제되면서 농촌과 국가의 연결성 및 통제력이 매우 강화되었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

반장파들이 대거 실각한 1933년부턴 농촌진흥정책이 추진되었는데 여러 합작사의 건설과 농업기술자들을 투입하여 농촌에 근대적인 농업기술을 보급하고 농촌의 생산성을 향상하려는 시도였다. 이들은 농촌금융, 합작사의 강화, 농산물 유통망 설립, 가연잡세 등의 폐지를 비롯한 비근본적인 개혁과 개량에 치중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고리대금업에 허덕이던 농촌을 구제하기 위한 금융기관의 설립과 합작사를 통한 상하이 자본가들의 농촌 투자를 촉진시킨 공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소모적인 곳에 활용되던 농촌 자금은 상하이 금융자본의 개입과 국민당의 노력으로 농촌 생산성 재고로 흘러가게 되었고 근대적 금융질서의 확립과 농촌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또한 종자 개량, 기술 개량 등으로 국민당 직할령의 고치 생산과 비단 품질은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제사공장 들이 들어섰으며 근대 품종 보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국민당이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품작물에 대한 통제를 시도함으로 인해 농민들의 손해를 야기했으며 이 때문에 상당수 양잠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하였다는 부작용 역시 존재했다.

1931년부턴 합작사 운동이 활발히 이뤄졌는데 농민의 생산활동 원조와 이득 증진에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합작사 운동은 국민당의 지배 영역 전체에 확산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으며 운영의 문제가 많아 상당한 양의 자금이 회수되지 못해 국가재정에 타격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합작사 운동이 집중적으로 전개된 동부 해안가 농촌 지대는 중일전쟁 때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개발살을 내버리면서(...) 도루묵이 되고 만다.

흔히 장제스의 농업 정책 폄하 이유 중 하나가 공산당과 같은 급진적 토지개혁을 안해 민심을 잃으니 어쩌니지만 공산당이 급진 개혁을 이루고 초공작전에서 경제력을 앞세운 국민당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애초에 당시 중국 지주들이 총칼로 땅을 넓힌 것도 아니고 펄 벅의 소설 대지에서 묘사되듯이 자수성가한 농민 출신들도 상당했다. 자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연스레 토지를 넓힌 것이다. 이들을 무작정 몰락시킨다고 그것이 농촌의 생산성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킨다. 민심 어쩌구 하지만 오히려 서구 학계에선 공산당의 토지개혁이 민심을 얻기는 했으나 그 민심이 공산당 승리에 결정적 기여는 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초공작전에서 국민당의 우세가 확정시되는 순간 농민들은 망설임없이 국민당 지지로 선회해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오쩌둥은 옌안까지 후퇴한 다음에 공산당 급진파들에게 당신들이 급진적 토지개혁을 했기 때문에 중농, 부농들의 지지를 상실하여 그들이 장제스에게 붙었다고 질타하며 장제스의 온건 토지개혁을 벤치마킹했다. 공산당의 본격적 토지개혁이 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낸 1949년 이후에야 이뤄졌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러한 토지개혁을 거친 공산당 치하 농촌 상황이 어땠는지도. 대책없이 땅 나눠주는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그게 능사가 아니다.

3.1.2 획기적인 공업 정책

국민당의 공업정책은 1919년, 쑨원이 발표한 건국방량의 실업계획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건국방량의 실업계획에서 쑨원은 외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기술을 도입하며 다음에 국가와 개인 경영의 절충안인 절제자본이란 형식의 경제개발을 내세운 바가 있다. 쑨원은 16곳의 항구와 15곳의 어업항, 내하, 연안개항장 건설, 운하 건설, 철토 유통망 확립 등을 우선과제로 보았으며 석탄 개발, 시멘트 공장 건설, 제철소 건설 등을 중요하게 보았다. 그리고 총 6단계에 걸쳐 식품, 의복, 건축, 교통기관, 인쇄공업 등을 건설하여 중경공업을 망라한 다양한 공업을 활성화하고 철도와 도로를 확충하였으며 이를 위해 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은 꽤나 선구안적인 일이었다. 이후 장제스와 국민정부도 쑨원의 구상을 계승하여 이에 입각한 경제발전을 추구하게 된다.

북벌로 천하를 장악한 장제스는, 공업화에 앞서 재정금융 정상화를 비롯한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정부에 안정적 재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나 장제스 이전에 이걸 제대로 한 인물이 없는 게 중국이었다.(...) 어쨌거나 1928년 전국경제회의, 전국재정회의가 개최되었고 전국통계위원회, 전국예산위원회, 국가은행, 화폐 통일[9], 국고 건립 등이 착수되었고 국가와 지방의 재정수입 획분, 관세자주권 확보, 수입세 인상, 이금 철폐, 통세 개설, 군비 감축[10] 또한 중화학공업과 에너지산업에 집중투자하고 군대 현대화 계획도 이 시기에 잡혔다. 장제스가 처음으로 집중한 산업은 강철, 세사, 기계제조, 화학공업이었는데 이를 위해서 2억원이 필요했으나 당시 정부의 재정규모가 4억 3천만원에 불과하여 도무지 조달할 수가 없었다. 1929년에 국민당의 경제개발 계획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반장 군벌들이나 국민당의 반장 계파들이 잇달아 패퇴하면서 점차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1929년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는 민생주의에 입각하여 전국의 재정 행정을 통일하고 국가 행정경비와 성의 행정경비를 확정, 국세와 지방세를 획분하고 폐제 통일원칙을 제기하였으며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경제개발을 하고 이를 중앙이 보조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는데 여기서 결정된 사항들은 국민정부에 의해 추진되게 된다. 또 이 시기의 <훈정시기경제건설실시강요방침안>은 이후 난징 십년의 청사진이 되었다. 여기서 국민당은 교통 개발-기본공업 개발-치하, 개항, 수리, 관개, 간척, 이민을 국가의 물질건설의 순서로 내세웠고 지방에선 지방교통사업-농림, 목축, 황무지 개간, 수리-도시개량, 공용위생건설을 순서로 내세웠다. 또한 이를 위해 세수의 반을 물질건설 비용으로 지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일련의 계획들이 실행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데 우선 국민정부는 수입의 절대다수를 내전과 외채 상황에 쏟아붓고 있어 공업화에 돈을 들일 여유가 전혀 없었고 경제대공황이 중국을 덮치면서 중국의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농촌의 재생산 구조가 붕괴되면서 경공업 기반의 중국의 공업까지 무너졌고 최대 공업지대인 만주가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이후 상하이 사변과 러허 사변 등의 일본의 침략 행위 때문에 중국의 타격은 막심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국민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고 그야말로 중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기존 경제세력들이 큰 타격을 입은 1930년대은 역설적으로 국민정부의 경제 통제정책이 먹힐 절호의 기회였다. 대공황의 아수라장에 중국에선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환멸이 잇달았고 일본의 침략 행위 때문에 국방경제 건설에 대한 요구가 드높았다. 국민당은 1935년 대공황 극복을 위한 은행개혁에 착수했고 1935년 11월 폐재개혁을 단행하여 개판이 된 물가를 안정화시키고 개인저축을 증가시키는데 성공했다. 폐재개혁으로 국내자본유통이 정상화되면서 공업에 대한 투자도 재개되었다. 1936년에 가면 국민정부의 채권의 신용이 회복되었고 이를 토대로 산업을 건설할 수 있었다.

3.2 한계

분명 계획은 위대했고 성과도 엄청났으나 장제스의 능력만으로 정리하긴 상황이 너무 개막장이었고 피땀흘려 이룬 성과는 일본공산당이 다 날려먹었다.(...)

소위 황금 10년이라 불리는 중국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했던 장제스였지만 그럼에도 청나라 말기부터 내려오던 기근과 피폐한 농촌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진 못했다. 사실 이건 장제스의 방법론 문제인데 국민당을 지지하는 향신과 중산층 세력들을 척지고 무리한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은 국민당의 기반을 크게 흔드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중국의 농촌 상태가 공산주의자들이 게거품을 물었던 것처럼 폐쇄적 봉건사회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제스가 내세웠던 것이 상품작물 재배 및 농업 기술 발전, 인프라 개발을 비롯한 온건한 방법으로의 농민 소득 증대와 복지 확충이었건만 이 모든 성과들은 공산당식 토지개혁을 안했다는 이유로 묻히고 있다. 그리고 공산당의 토지개혁 결과 설탕 한 항아리, 물소 한마리 갖고 있다고 지주로 몰려 처형당한 수십만명의 사람들과, 그것조차도 없음에도 본보기로 학살된 사람들, 개혁 이후 중국 농민들의 영양 섭취와 1인당 생산량이 국민당 시절의 반타작으로 떨어진 것은 아무도 신경 안쓴다.(...)

게다가 장제스의 성과가 워낙 눈부셔 만약에 중일전쟁만 없었으면 국민당 정권이 지금까지 존속했을 것이란 것이 서양 학계의 중론이건만 이 눈부신 성과는 장제스가 통치하던 상하이-난징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한계라면 한계다. 이유야 장제스가 직할 통치를 한 곳이 그곳이기 때문. 게다가 공산당의 준동과 장제스의 전임 지도자들이 맘대로 빌려쓴 빚과 사사건건 들고 일어나는 군벌들이 방해물이 되었다. 1930년대엔 국가 수입의 70%를 채무 상환과 군사비에 쓰고 있었다. 빨리 경제개발에 예산을 돌려도 모자랄 판에 엄청난 양의 돈이 공산당과 군벌 토벌에 들어갔으니 더 막장... 그렇다고 돈을 안 쓰면 얘들이 총 들고 장제스 잡겠다고 달려올테니 거기 돈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장제스도 인간이므로 그가 완벽한 정책만 펼쳤을 리도 없고 실책도 있다. 재정과 행정력의 부재로 중국 곳곳의 자연재해와 기근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예 정책 실패도 있는데 경제대공황 시절의 쿵샹시 주도의 경제정책은 엄청난 타격을 가져왔다.[11]

중일전쟁 때 박살난 경제를 제때 수습하지 못한 것도 치명적 실책이며 이는 국공내전 패배의 단초를 가져왔다. 중일전쟁으로 장강삼각주 일대의 경제적 기반을 상실당하면서 금은본위제가 붕괴된 마당에 재정적자를 이유로 화폐를 마구 찍어내 막대한 인플레이션[12]을 불러왔다 이것까지야 전쟁 중인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쳐도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 대혼란을 조기에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장제스는 전쟁이 빨라도 1946~7년까진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고 이기는 방식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군이 차례로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었지 원자탄과 소련군을 콤보로 처맞은 일본이 영토를 한꺼번에 토해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국민당은 피점령지의 치안과 경제 회복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고 결국 혼란을 야기했는데 이 혼란을 수습하기도 전에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재건하는 자살 방아쇠를 당김으로 극도로 불안정했던 국민당 천하는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만다.

그리고 원래도 그랬지만 국민당 정권의 부패는 심각했는데 특히 장제스의 인척인 공씨, 송씨 등이 가장 악명이 높았다. 이들 4대 가족은 중국 공업력이 요단강 건넌 이후 중일전쟁 수행을 위한 공업력과 자본 확충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이들의 세운 공도 많긴 하지만 이들이 너무도 부패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쿵샹시의 가문은 '양자공사'를 통해서 양쯔강을 통한 수운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고 중일전쟁 중에도 막대한 돈을 뿌리며 미국까지 자식들을 신혼여행보내는 짓으로 구설수에 올랐다.[13] 쑹씨 가문의 경우는 미국의 원조물자를 빼돌려서 막대한 치부를 했다. 거기에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점령지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경제 안정화를 위해 실시한 화폐 개혁에 있어서 이들이 끼어들어 환율장사를 하는 바람에 만주와 중국 동해안 지역에 막대한 빈곤을 초래하여 민심 이반에 결정적인 요인을 만들어냈다.

4 군사 분야

4.1 북벌 시절

일단 장제스는 훗날의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쑨원 밑에서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소련군 군사고문들과 혁명군을 이끌던 시점에선 청렴하고 규율이 잘 잡힌 군대의 대명사로 중국인들 사이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특히 광둥군벌 천중밍과 대결하던 시점에선 농민과 노동자들이 앞을 다투어 국민당 군대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철도 노동자들이 국민당 수송을 돕는 등 훗날의 부패할 대로 부패한 국민당과는 가히 천지차이였다. 문제는 장제스가 소련 고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빠른 세력 확장과 중국 통일을 위해 군벌들을 급격히 흡수하면서였다. 바이충시, 리쭝런, 탕셩즈, 탄옌카이 등의 군벌들이 이때 국민당에 합류했는데 황푸군관학교에서 키운 병사들과 달리 이들의 기량이 영 좋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제스의 군사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은 이렇게 급속도로 확장시키면 군사들의 질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우려를 표했지만 장제스는 질보다 양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의 우려는 무시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여러 군벌들과의 이합집산, 매수, 담판, 획책을 통해서 통일 전쟁을 수행했는데 당시 중국의 군벌들은 수많은 소규모 군벌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봉건제와 같은 형식으로 한 군벌이 약해질 것같으면 그 휘하 군벌들이 우르르 상대방에 붙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장제스는 이러한 상황을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하여 자신을 치려는 자들의 수족을 매수해버려 조지는 방법을 자주 취했다. 장제스와 맞섰던 천중밍, 장쭝창, 쑨촨팡, 우페이푸, 장쭤린, 장쉐량, 펑위샹, 옌시산, 차이팅카이, 천지탕, 바이충시, 리쭝런 등이 이런 장제스의 흉계에 걸려서 하나같이 피를 봤다.
특히 광둥 군벌인 천지탕은 점쟁이에게 장제스와 싸우면 한쪽이 배신으로 날개가 꺾여서 망할 것이란 점괘를 듣고 신나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이 시작되자마자 그의 휘하의 공군 지휘관들이 전부 다 전투기를 몰고 난징으로 몰고 가서 장제스에게 붙었고 육군 지휘관들도 전부 다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홍콩으로 토셨다. 점괘에서 말한 날개가 꺾여 작살나는 건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천지탕은 홍콩으로 달아나야했다.

4.2 30년대 초반

어쨌거나 장제스는 이러한 계략을 통해 위안스카이 사후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중국을 마침내 통일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으나... 장제스가 빠른 통일을 위해 썼던 방법이 그의 목을 죄게 되었다. 통일 이후 300만에서 최대 1천만에 달했던 국민당군은 대다수가 장쉐량(장학량), 옌시산(염석산), 펑위샹(풍옥상), 리쭝런(이종인) 등의 군벌 출신의 오합지졸들이었다. 1929년의 '편견회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나, 군벌들은 장제스가 자신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수작으로 여겨 반발했고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이 반발은 반장전쟁이라는 대규모 내전으로 번졌다. 반장전쟁을 진압한 후에도 19로군, 천지탕, 리쭝런, 바이충시 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고 대장정 중에도 지방 군벌들의 태업 행위가 장제스를 방해했으며 마침내는 서안 사건이라는 쿠데타까지 당했다. 이런 문제는 2차 국공내전의 패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이 정도까지 읽었으면 아시겠지만 결론은 국민당군은 장제스 말을 들어처먹질 않았다. 심지어 풍옥상을 필두로 왕정위, 손과의 이른바 "반장제스 국민당 3인방"은 장제스를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다. 광서군벌 이종인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산서의 옌시산(염석산, 閻錫山)은 "산서성 먼로주의"(…)를 선포하고 반독립정권을 구축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북벌 이후의 편견회의로 군벌들을 정리하려 했고 초공작전을 구실로 군벌군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군벌들을 약화시켰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지방 군벌들의 영역에 대장정 중인 마오쩌둥을 잡는다는 구실로 중앙군을 몰고 눌러앉아 지방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장제스는 이렇게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켰지만 문제는 이에 비례하여 군벌들이 장제스를 더욱 믿지 않게 되었고 적개심을 품게 되었단 것이다. 이는 장쉐량의 서안 사건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수백만 대군이 있다고 해서 이들이 무슨 현대식 무기로 잘 무장한 군대를 상상하면 안되는 것이 어제까지만 해도 비적질을 하던 그야말로 도둑떼도 섞여 있고 제대로 된 무장도 못 갖춘 일이 허다했다. 애초에 중국의 공업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 이 상황에서 이들을 잘 무장시킨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훈련이나 규율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단 장제스는 헬게이트인 중국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가야하는지 청사진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내놓은 재주가 있었는데 방향성 제시 만큼은 뛰어났다는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장제스는 군사분야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해 소련, 미국, 독일, 이탈리아에서 최신식 무기와 공장, 군사고문들을 받아들여 강력한 유럽식 중앙군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라잉 타이거즈로 대표되는 미국의 도움으로 그럴듯한 공군을 창설하는데 성공했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팔켄하우젠을 비롯한을 독일 고문들과 히틀러의 지원으로 독일식 중앙사단을 양성했으며 상하이 지역에 강력한 토치카 방어선을 꾸려서 중일전쟁 이후 2차 상하이 전투의 우쑹 상륙작전에서 일본군을 개발살내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도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을 비롯한 뛰어난 고문을 파견하는 한편 막대한 차관과 무기를 제공하여 장제스를 도왔다.[14] 이러한 외국의 도움을 활용한 장제스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과정이 고작 2년도 못되었단 것이다. 1935년이 되어서야 장제스는 군비를 증강할 수 있었는데 일본은 1937년에 쳐들어왔다.

4.3 중일전쟁

흔히 폄하되고 무시당하지만 장제스가 눈부신 진가를 발휘한 순간

"(장제스의 독재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중국에는 처럼 국민을 응집할 능력을 가진 인물이 없음을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주중 미국대사 넬슨 존슨, 1936년.

"제가 알고 있는 중국인들 가운데 장제스만큼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인물은 없습니다."

-주중 미국대사 패트릭 헐리, 1944년.

"장제스가 없다면 누가 일본을 막지?"

-광둥군벌 천지탕, 1931년.

과거엔 중국 공산당과 일본 등에 의해서 장제스가 저평가되어 중국군과 일본군의 병신력 배틀이란 표현이 나온 적도 있었지만 장제스의 병크는 전쟁 초반 중국군 주력을 상하이에서 날려버린 일 정도에 국한되어 있고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면서 항일 항전 의지를 불살랐다. 즉 이전까지는 장제스가 제대로된 고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 장제스의 라이벌이었던 왕징웨이 등이 일본에 붙어버리고 자신들의 기반을 고수하려는 이기적인 군벌들의 뒤통수에도 굴하지 않고 중국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의 공이었다. 자세한 것은 중일전쟁 항목에서 설명해야겠으나 간략하게나마 언급해보면 우선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맞서싸울 수 있는 기본적인 전투력을 마련했던 것은 독일, 소련의 도움을 받은 장제스의 군사정책 덕분이었으며 만주를 거저 주워먹듯이 했던 일본이 상하이에서 수만 단위의 사상자를 내며 고전했던 것도 장제스의 항전 의지와 장제스가 미리 상하이를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자신의 권력 기반인 독일식 사단과 중앙군을 아낌없이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상하이 함락 이후 화북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강요했을 때 주화파인 왕징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 강경파 군벌들까지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낙담했을 때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침략자에 맞서 굴복하는 것은 인민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일이라며 단호히 거부하고 일본에 맞서기로 결정한 것이 바로 장제스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중국군의 주력 80만명을 날려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중국 경제의 중핵인 중국 동해안과 화북, 화중을 날려야 했다.

허나 장제스는 중국군이 일본군에 포위 섬멸되어 털리는 일을 막아냈고 결국 충칭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항전을 지휘했다. 흔히 혐중론자 스틸웰의 일방적인 모함만 듣고 장제스가 군벌만 내세웠네 공산당 토벌만 주력했네 물자를 쌓아놓고 방관했네 하지만 이는 스틸웰의 유체이탈 화법에 가까운 궤변이고 실제로 장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중국군은 밀리면서도 타이얼좡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며 창사에선 세차례나 일본군 공세를 격퇴했다. 우한 점령 이후에는 바로 난징 등지에 반격을 시도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일본군이 충칭을 먹지 못한 이후는 중국군이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치열한 저항을 해서이지 기존의 사관대로 중국군은 맛갔는데 일본군만 병신이라 전진 못한게 아니다. 우한 점령 이후 중국 전선은 충칭, 뤄양 등지를 일본군이 찔러보고 중국군이 깊숙히 그들을 유인하여 기습하여 격퇴하는 일의 무한반복이었다. 그리고 상덕 전투, 대륙타통작전 이전에 일본군의 공세를 눈치채고 대비를 주장한 것도 장제스였고 허약한 일본군이 반격할리 없다고 그걸 씹고 장제스의 예비대를 버마로 보내버린 것이 스틸웰이다. 스틸웰의 훼방만 아니었어도 장제스의 반격작전은 늦어도 1944년에 시작됐다. 그리고 장제스는 마침내 베이징, 난징, 톈진, 상하이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을 다시 수복하는 데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중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중국이 세계대전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UN 상임이사국 진출에 한 몫 했다.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항목을 새로 파야할 수준이니 자세한 것은 이제 중일전쟁 항목 참조.

4.4 국공내전

"총사령관이 저지른 거대한 규모의 실패는 비슷한 규모의 성공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조너선 펜비

장제스 저평가를 이끌어낸 결정적인 원인

근대 중국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장제스는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면서 대륙을 날린 병신, 쪼다가 되었다.(...)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국제적인 지위까지 얻은 장제스는 이제 최후의 숙적인 공산당을 회치기 위해 준비중이었는데... 장제스의 그동안의 문제점들의 포텐이 다 터졌다. 부정부패로 인한 경제위기, 장제스가 그간 애용해왔던 인생은 한방 전술에 따라 대책도 없이 만주를 쳤던 것이며 군벌들간의 불화이며 기강이 형편없는 군사들이 모랄빵나면서 줄줄이 포위 섬멸되거나 마오쩌둥 편에 붙은 것까지... 덕분에 장제스는 대륙의 지배자에서 좁은 대만으로 피눈물 흘리며 달아나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장제스의 운이 없던 것도 없던 것이지만 실드 불가능한 상병신짓도 만만치 않다. 자세한 것은 국공내전 항목 참조.

4.5 대만 시절

대륙 통치기와 달리 이 시기에는 내전도 없고 치안도 비교적 안정적이어서여기선 딴지거는 군벌들도 공산당도 일본군도 없어졌거든 문제점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반공을 표방했던 장제스의 대만 독재정치는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 대륙에서 놀던 때 남의사 데리고 하던 버릇이 어디 갔겠는가.

그 일례로 대만에 들어오자마자 불량배, 불평분자들을 싸그리 잡아들여 태평양 밑에 처박아 버렸으며[15] 2.28사건 이후에는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 계엄령은 1987년에 와서야 해제된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의 경험을 본받아 장제스와 장징궈가 진두지휘한 [ 총통부-국가 안전 회의(NSC)-국가안전국(NSB) ]-[ 국방부 군사정보국/법무부 조사국/내정부 경정서/국민당 총정치부 ] 직통체계는 반체제 세력에 대하여 소련의 KGB처럼 응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울러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국가에서 총력전을 명분으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을 모조리 탄압했으며, '공비의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발효했다. 전국적인 총선거가 불가능하고 주장하면서 중화민국 사법원의 대법관들을 움직여서 헌법 재판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국회 격인 국민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총선거를 중지했다. 당시의 중화민국 헌법에 따르면, 국민대회에서 총통을 간접 선거로 선출했다. 1940년대에 중국대륙의 선거구에서 남녀노소 인민들의 투표로 선출한 국민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국회의원들은 종신직으로 일했으니,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장제스는 죽을 때까지 총통을 할 수가 있었다. 당연히 중앙정부의 선거제도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보궐'선거였다.

대만에 무협지가 많이 나왔던 이유도, 수많은 문인들이 독재에 염증을 느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무협지를 썼기 때문이다.[16]

5 대륙의 평가

대륙 중국의 평가는 당연히 안 좋은 쪽이 많았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했을 때, 중국 관영 통신사인 신화사에서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장제스의 이름 앞에 "국민당 반동파의 두목이자 중국 인민의 공적(国民党反动派的头子、中国人民的公敌)"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으며, 대륙 중국에서 만들어진 창작물들에선 대부분 악역으로 나온다. 아무래도 국공내전 당시 중국 공산당의 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만… 그럼에도 난징 10년의 번영을 기억한 탓인지 1950년대엔 장제스 정권이 나았다는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나와서 기겁한 마오쩌둥이 반우운동을 벌여 지식인들을 때려잡기도 했으며 장칭은 외국인들에게 난징 시절의 경제적,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한 향수를 떠들어 주위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만약 일반 인민이 그딴 소리했다간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고 맞아 죽을 발언들이었으니...

그래도 나름대로 야심만만하고 비범한 기질을 지닌 당대의 호걸로 묘사되었으며, 국력이 중화인민공화국 쪽으로 기운 지금에서는 중공측의 장제스의 평가도 전향적으로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정적이었던 공산당의 편협한 입장에서만 장제스를 보았다면, 현재는 중국사의 정통성을 가진 정권의 입장에서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했던 장제스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17] 게다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지고 있는 UN 상임이사국 자리는 중화민국으로부터 어부지리로 승계받은 것으로, 본래 장제스가 일본에게 승전함으로서 얻어낸 공로였다. 죽 쒀서 준 꼴

국부천대 전 수도였던 난징에는 지금도 국민당 총통부가 보존되어 있고 장제스의 집무실도 장제스의 초상화와 청천백일기와 함께 멀끔히 전시되어 있다. 비단 장제스 뿐 만 아니라 국민당에 대한 평가가 현재 대륙에선 후한편 인데 과거엔 중일전쟁 에서 팔로군을 위시한 공산당의 역할만 강조되었다면 2010년에 나온 영화 첩혈고성이나 2011년에 개봉한 진링의 13소녀에선 용맹했던 국민당군의 중일전쟁 때의 활약이 조명되었다.

2차대전 이후 중국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던 후난성 즈장 항일전쟁기념관에서는 항일전쟁 영웅으로 장제스의 사진과 청천백일기가 그럴듯하게 전시되고 있다. 덤으로 미국인이 주축이 되었던 플라잉 타이거즈 기념물도 있다.

중국(대륙)인들 사이에서도 마오쩌둥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뛰어난 인물이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졌고 절강성 영보시에 있는 그의 생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18] 사실 마오쩌둥에 맞섰던 인물이기에, 그를 높이면 그를 이겼던 마오쩌둥이 더 부각되는 효과도 있고. 승자의 여유? 장제스 평전의 저자인 조너선 펜비가 중국을 방문하여 장제스 생가의 안내인에게 장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안내인은 "대단한 사람이었죠."라고 대답하더니 머뭇거리다가 "마오 주석만큼이나요."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평가는 나아졌는데 그 나아진게 마오쩌둥에 이은 콩라인(...) 당연히 인터넷으로 가면 더 과격한 언론도 있어서, 아예 공산당이나 마오쩌둥을 부정하고 장제스를 추종하기도 한다.

한편 장제스가 재평가되는 데에는 대만의 범록연맹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존재한다. 90년대 이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이나 하나의 중국에는 동의했지만, 90년대 이후 대만이 민주화되고 대만의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민주진보당 등의 범록연맹이 유력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되고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200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 공산당이 그토록 적대해왔던 중국 국민당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국민당에서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인 장제스를 중국 대륙에서도 재평가함으로써 하나의 중국에 반대하는 범록연맹을 현재의 중국 국민당과 함께 견제하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원래부터 중국사는 후임왕조가 집권할때 전임왕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가 후반에 높아지기 마련이다. 장제스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북벌로 전복된 중화민국/북양정부 의 수장들에게 나중에 여러가지 직위를 추증하거나 수여했다. 또한 현임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전임정권에 향수를 품는것도 중국사의 특징.

6 대만의 평가

타이완에서는 그의 행적을 어느쪽에 관심을 보이냐에 대해서 달라진다. 업적을 강조하는 쪽(주로 중국 국민당 지지자)은 일제의 잔재를 뿌리치고 공산주의의 손에서 대만을 수호하며 경제를 활성화시켰다면서 추켜세우는 반면, 국부천대 이후의 독재정치의 폐해를 강조하는 쪽(주로 민주진보당 지지자)은 계엄령을 내리며 공포 정치를 단행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26년간이나 혼자서 다해먹은 독재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만으로 쫓겨간 이후 이미 국력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반공 외교를 밀어붙여 외교 관계가 줄줄이 소멸, 고립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있다.

http://www.taipeitimes.com/images/2015/02/28/P01-150228-p1A.jpg``

민주화 이후, 대만에서 그의 위상은 전과 같지 않다. 2015년 2.28 유혈사태 추모일을 앞두고 중정기념당에 세워진 장제스 동상에 계란을 던지는 이들이 있었을 정도. 뭐 사실 계란을 던지는 정도는 양반이고, 장제스의 동상에 과격한 반달리즘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는 실태다. 이쯤 되면 오히려 대륙이 온건해 보일 정도.

7 총평

"장제스는 자신의 신념에 투철한 용기있는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 마오쩌둥
"이러한 맥락에서 장제스와 그의 시대는 공산당의 승리한 이후의 에 비하면 그 이하였고, 사명을 최후까지 이룩할 자원과 역량이 부족한 통치자와 체제 탓에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하기에는 그 이상이었다." - 조너선 펜비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간 장제스는 20세기 역사에서 대단히 무능했던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리고 이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를 좀 더 호의적인 시각으로 볼 이유가 있다.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 나라를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분투한 유능한 지도자로 말이다. 최근의 전기 작가들, 특히 전직 미국 외교관 제이 테일러 같은 사람들은 장제스의 결점보다는 그의 훌륭한 자질을 강조하고 그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환경, 특히 재앙에 가까운 일본의 침략 직후에 분투했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 리처드 번스타인

장제스의 시대는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혼란기였다. 안으로는 신해혁명 이래 갈가리 찢겨나간 지방들을 통합시키고 공산당의 도전을 격파해야했으며 바깥으로는 각국과의 외교관계를 조율해 중국의 위상을 재정립시키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야만 했다. 흔히 장제스의 시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당시 국민정부가 자신의 정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막아내기에도 벅찼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공산당의 공격에 맞서자마자 국민당 내부의 문제를 해결해야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곧바로 일본의 침략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냐를 결정해야했다. 그리고 1937년 일본의 파상공세 앞에서 중국이 어떤 길을 나아가야 하냐를 결정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2차 상하이 사변, 허베이, 왕징웨이 괴뢰정권, 버마 함락으로 인한 외부와의 고립, 엄청난 인플레이션, 공산당과의 불편한 협력등의 난제가 있었고 그 난제들로 인한 혼란을 개선시키기도 전에 중일전쟁에서 승리를 맞이하면서 공산당과의 관계를 청산해야만 했다. 결국 최후의 결전에서 패해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작은 섬에 웅거하는 결말을 맞이했으나 장제스가 대륙에서 계획하던 청사진은 21세기 중국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19]

오늘날 장제스가 비판받고 마오쩌둥이 여전히 신격화되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상에서 그가 걸어간 일이라기보다는 두 체제의 문제라고 해야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서 마오쩌둥은 레닌의 건국 역할과 스탈린의 대조국전쟁 승전의 역할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이 공산당 일당독재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는 반면, 민주화를 정착시킨 타이완에서 장제스는 그런 딜레마를 짊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장제스가 타이완의 민주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나 경제, 정치적인 안정으로 민주화의 토대를 닦은 것은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체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킴으로서 장제스는 역사 속에서도 비판받게 된 것이다. 에스파냐의 어떤 작자는 수십년 해먹고도 침묵협정을 체결했는데

장제스의 청사진은 결국 그걸 실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중단되었으나[20] 그러한 청사진은 충칭에서 8년의 장기항전을 이루고 타이완의 기적이라고 할만한 고도의 경제성장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자신의 통치 대부분의 기간을 독재로 일관하기는 했지만, 장제스는 민주주의에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1937년 12월에 중화민국 헌법 반포를 준비하고 있었고 중일전쟁 기간에도 각지의 의견을 모은 국민참정회가 존재했으며 1947년의 입법원 선거는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물론 그 과정으로 가기 위해 자신의 권위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과, 나중에 대륙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통일을 위한답시고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제정해 그 민주주의조차 억눌러버린 것은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장제스는 국민당 내부로서는 쑨원이 계획하던 혁명의 청사진을 완성함으로서 청조를 대체할 새로운 국민국가를 창설해냈으며 내셔널리즘을 통해 하나의 중국의 기원을 닦았고, 바깥으로는 중국을 상임이사국으로 만들고 일본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서 현대 중국의 개척자라는 표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업적을 이루어낸 셈이다.

물론 그의 업적은 권위주의적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졌고 이러한 체제는 2.28사건이나 대만 본성인 차별, 40년이 넘는 장기 집권같이 암적인 역사까지 낳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 치하에서 중국은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시발점을 닦았고 당대 중국의 문제점을 해결했다는 점은 분명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것이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장제스가 재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 하지만 오해받는 것과 달리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는 장개석은 무능하고 한것이 없다는 내용이 아닌, 장제스가 몰락하던 국공내전 상황 당시의 장제스 정권의 취약성과 장제스의 전략의 헛점을 지적함으로 국공내전 때 왜 망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 군벌들로 분할된 중국, 일본의 침략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권위의 부재 등등... 끝도 없이 많다.
  3. 사실 중국의 장제스 재평가는 서양의 장제스 재평가보다 그 시기가 앞선다.
  4. 대표적인 것이 장제스 정권의 개혁정책과 난징 10년의 경제성장과 근대화, 중일전쟁 중의 분투다.
  5. 예컨대 6.25 전쟁 중에 장제스가 미군과 호응하여 하이난을 점령하고 린뱌오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져서 중국 전체가 요동쳤고 만주 지역에서 공산당기 소각, 마오쩌둥 초상화 파괴 등의 반공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여기엔 공산당의 상상을 초월하는 막장 경제정책과 독재가 배후에 있었지만.(...)
  6. 쉬운 말로 중국이 일본보다 돈을 더 잘 갚을수 있는 나라라고 평가받았다는 의미다.
  7. 어떤 의미에선 당연한 측면도 있다. 국민당 정권의 경제적 기반인 절강재벌들이 소재한 장강하구 유역만의 재정동원 능력이 약간 향상된 것만으로 이 정도의 성과가 났던 것을 보면 전국적으로 경제개혁이 일어났을 경우 어떤 성과가 났을지는 불문가지이다. 사실 제국주의의 중국 침탈이 절정에 달하던 1913년 당해의 중국 GDP를 능가하는 나라는 미국영국 정도라는 통계자료도 있고 보면...
  8. 개혁을 위해 지방에 파견된 국민당 관리들을 군벌들이 추방하거나 해치는 일도 허다했으며 국민당 직할령인 강서성에서조차 지주들이 국민당 관리들을 저격하기도 했다.
  9. 중국은 지방마다 화폐가 다른 판이었다.
  10. 하지만 자기 기반 줄인다는데 반발한 군벌들이 난동을 부리면서 중국 전역을 휩쓴 반장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1. 당대 경제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중국과 미국간의 은본위 문제가 얽힌 것도 있다. 관련해서 쑹쯔원과 쿵샹시의 대립은 정책상의 문제로 시작되었다. 혹자는 금본위제도가 안정적이었다면 중국 경제가 그렇게 파탄나지 않았다고도 본다.
  12. 1936년 화폐발행량의 100여 배를 넘는 1,890억 원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찍어냈다. 그 바람에 일본군이 계획한 중국법폐를 대량위조하여 중국내 경제 혼란을 일으키려된 계획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일본 위폐작전 책임자는 "중국은 정말 무서운 나라다"라는 비아냥급의 찬사를 남겼고, 일본의 계획은 쇼카쿠급 항모 1척의 건조비만 낭비하는 것으로 끝났다(…). 인플레이션 계획을 인플레이션으로 막다. 폭탄테러를 자폭으로 맞불놓을 기세 훗날 이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려고 실행한 금원권 개혁의 실패는 국공내전에서 그의 패배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13. 이 때문에 빡친 장제스가 쿵샹시를 잘라버리고 사이 좋지 않은 처남인 쑹쯔원을 다시 재정부장에 앉혔다.
  14. 사실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이전까진 소련이 장제스와 국민당이 거의 전적으로 유지하는 외국이었다.
  15. 하지만 그럼에도 삼합회가 기승을 부리고 다닌다(…). 물론 삼합회와 장제스의 처가 송씨 일가와의 유착이 뿌리깊기도 했고...
  16. 대만 성인영화 관련 다큐에 의하면 대만에서는 "반공, 반일만 한다면 어느 정도 검열은 통과했다."고 한다. 그래서 SM에 가까운 이야기도 역시 반공영화로 탈바꿈해서 상영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영역은 아니지만 대만 영화 중 상당수가 "국내 상영용"과 "해외 수출용"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7. 최근 중국 역사교과서는 국정제->검정제로 바뀌면서 중국의 역사교과서에서 중일전쟁 단원 가르칠때, 국민당 정권이 항일에 적극적이었다는것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18. 물론 복원된 것이다. 원래의 생가는 문화대혁명홍위병들에게 개박살났다.(...)
  19. 출처 : 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
  20. 중화민국 헌법 반포가 1947년 1월 1일. 중화민국의 타이베이 천도가 1949년 1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