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화(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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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昌和
1928년 11월 1일 ~

1 인물 소개

1928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 얼마나 잘만들었냐하면 홍콩 영화계로 스카우트되었다. 쿠엔틴 타란티노도 그의 영화를 자기 영화에서 오마쥬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카더라. 참고로 다작이기때문에 극히 일부만 다루겠다. 그 시절에는 영화를 찍어내던 시절이어서, 신성일도 1년에 100편 출연이라는 미친 필모그래피(신성일도 껄끄러워한다)를 가졌고, 임권택이 100편 제작 전설을 가진것도 대부분 이 시절에 찍은거다. 임권택 감독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시절 영화찍어 번돈으로 술만 마셨다고 한다(진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격월간지,영화천국의 인터뷰에 의하면 영화감독이 되기위해 최인규(친일파로 활동하여 광복이후에 반민특위에 잡히기도 한 영화감독이다. 항목 2번 참조.) 문하에 들어간다. 당시에는 오로지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고, 많이 어려운 시절에 자작영화는 만들기 불가능하고 필름 현상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노력해서 결국 홍콩영화계에 진출했으니 독보적인 존재다. 인터뷰 일부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홍콩영화사 연구에서는 1968년 이전의 정창화가, 그리고 한국영화사에서는 1967년 이후의 정창화가 사라져 있다. 홍콩 영화비평계의 원로인 로우 카(羅卡)는 정창화 감독이 홍콩 영화사 서술에서 빠져 있는 이유를 “그 어느 연구자도 정창화 감독의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콩영상자료원의 웡 아이링(黄爱玲)은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오히려 더 ‘홍콩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절실함이 강해지면서 홍콩의 상징적 장르인 무협영화에 참여한 한국과 일본 감독들의 존재가 불편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3) 이는 비단 정창화 감독만의 문제는 아니다. 즉, 초국가적인 영화활동을 했던 영화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시련이기도 했다. 일국사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어 왔던 내셔널 시네마 연구의 전통에서 본다면 정창화 감독같이 한 국가 영화사의 흐름에서 파악하기 힘든 감독들은 손쉽게 무시되거나 연구를 수행할 마땅한 방법론이 부재한다는 이유로, 혹은 두 개 이상의 내셔널 시네마를 비교하며 연구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의 무게감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최근 들어 아시아 각국의 영화인들이 트랜스내셔널 영화사의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2 작품들

  • 최후의 유혹1953년작

밀수꾼들을 쳐부순다는 국책영화.

마부,박서방,삼등과장으로 유명한 김승호, 고 허장강, 고 황해, 고 장동휘, 엄앵란 주연의 액션극. 혼자서 10형제를 다 죽이는 무자비한 액션이 돋보인다. 이전 글에는 사극이라고 나왔으나 당시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금괴를 찾아 김승호가 동료인 허장강과 같이 20여년을 전국 산을 찾아 헤매던 끝에 드디어 노다지, 즉 금을 가득 발견하지만 허장강은 도중 병으로 죽고 자식에게 금 절반을 물려달라는 유언을 남기는데...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년작.

일제시대 학도병들을 주연으로 한 남방 액션물.(남방은 인도차이나 반도. 그러니까 월남 언저리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를 말한다) 참고로 김기영감독도 '현해탄은 알고있다.' (1961)는 영화를 만든적이 있다.(참고로 한운사인간의 조건을 베껴 만들었다)

  • 황혼의 검객 1967년작.

한국 사극으로써는 이색적이게도 팔잘리거나 유혈효과도 마구 마구 나오는 영화.

  • 죽음의 다섯 손가락 1972년작.

원제는 철권 또는 천하제일권. 무술배우 라열의 주연 데뷔작이기도 하다. 닉슨 방중을 계기로 중국 붐이 이는 가운데에 미국 개봉이 이루어져 대힛트를 기록하고, 용쟁호투가 제작되는 데에 공헌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자기 영화에 오마쥬해달라고 했던 권격영화. 196~70년대에 쏟아져나온 맨손격투 영화. 무협영화와 달리 사람을 안죽여도 되기때문에 가볍게 볼수있었다...하지만 정작 본작만큼은 손가락으로 사람을 찔러 칼보다 잔인하게 죽인다. 제목이 그냥 붙은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