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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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Joseph Dresnok (북한명: 홍철수)

6.25 이후에 한국에 파병된 주한미군 출신으로, 갑자기 휴전선을 넘어 월북해버린 탈영병이다.

1 출생과 성장 과정

1941년 리치몬드의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드레스녹의 부모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개와 고양이처럼 매일 싸워댔다. 결국 어머니는 드레스녹과 형제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어머니가 술집에서 일하는 동안 차 트렁크에서 자면서 아무거나 먹었다.

하지만 드레스녹의 아버지가 쫓아와서 형제들을 도로 집으로 데려왔고 다시 고모네 집으로 보내져서 지내다가 아버지가 재혼하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고모네 집에서도 괄시당했고 새어머니는 드레스녹을 보자 아들이 하나라더니 왜 하나가 더 있냐고 화를 냈다. 결국 드레스녹은 친척집에 보내져서 사실상 고아가 되었다. 드레스녹은 20달러와 자전거를 훔쳤는데, 법원은 그에게 소년원 대신 실형을 선고했다. 집행유예 6년이었다.

오갈데 없는 드레스녹을 오버스트리트란 목사가 거둬들였는데, 오버스트리트는 오갈데 없는 아이들을 받아들여 키우고 여러 아이들을 위탁받는 봉사를 하는 사람이었다.[1] 성장한 드레스녹은 군대가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고 미 육군에 입대했는데, 곧 빡빡한 군생활에 질렸다. 입대 이후 드레스녹은 교회에서 만난 캐서린 링우드란 여자와 결혼했다. 혼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스녹은 서독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2년간 그 곳에서 아내를 생각하며 성실하게 복무를 끝내고 돌아왔을때는 아내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었고, 크게 실망한 드레스녹은 그녀에게 이혼을 통고했다.

2 한국에 오다

완전한 실의에 빠진 그의 마음에는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가득찼다. 그는 이젠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심정에 육군에 재계약[2]하여 1962년 5월에 육군 일병의 신분으로 주한미군에 배치되었다. 그때는 DMZ를 경계로 주한미군북한군과의 사이에 정기적으로 충돌이 일어났고, 더불어 북한군은 자주 매복을 하고 함정을 설치하여 당시의 DMZ는 사실상 전쟁터였다. 이 시기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1976년에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DMZ를 포함한 휴전선 일대는 기나긴 기간동안 굉장히 살벌한 지역이었다.

1주일에 순찰만 60회를 도는 고된 근무가 이어지자, 지친 드레스녹은 군부대 근처의 사창가를 오가기 시작했다.[3] 자신의 모든 급여를 그 곳에서 다 썼는데, 호감이 가던 한국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주가 넘는 강도높은 경계 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드레스녹은 중대장에게 애인을 만나게 외출을 허락해달라고 했지만 중대장은 다들 고생하는데 너만 빼줄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에 드레스녹은 부사관서명을 위조하여 허락 없이 외출하였는데, 당시 휴가를 나갈 수 있던 중대중사가 부대 바깥에서 드레스녹을 보고 이를 윗선에 보고했고 본부로 송환된 드레스녹을 중대장은 강하게 추궁했다. 이에 드레스녹은 당당히 허락받고 나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드레스녹의 거짓말에 대노한 중대장은 허락없이 부대를 나간 것에 상관에게 거짓말을 한 죄를 보태어 드레스녹을 군사재판에 넘기려고 했다.

드레스녹은 무단 외박 1번 했다고 자신을 군사재판에 넘기려는 상관에 분노했으며, 그의 삶 전반에 회의를 느끼던 드레스녹은 월북을 결심해, 1962년 8월 15일 정오에 다른 부대원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에 북으로 넘어갔다.

3 월북

까짓거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생각에 거침없이 경계를 넘어 북으로 나아갔지만, 지뢰밭 사인을 만났을때는 겁에 질렸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에 가면 새 삶이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무작정 넘어가기 시작했다. 드레스녹의 부재를 눈치챈 동료들이 그의 뒤를 따라와 돌아오라며 권고 하였으나, 그는 "지옥에나 가라."라며 욕을 퍼부으며 산탄총을 동료들을 향해 발포했다. 한편 조선인민군 육군 민경부대도 이 소동을 눈치채고 키큰 자[4]가 넘어오고 있다는 보고에 즉각 병력을 출동시켰다. 드레스녹은 인민군 초소를 보고는 바로 그 초소로 걸어들어갔고, 초소를 지키던 인민군은 웬 키가 장대한 미군을 보고 크게 당황하며, "원수 미국놈이구나!"라며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체포됐으니 건드리지 말라며 인민군 중대장이 명령을 내려서 드레스녹은 살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당시 드레스녹의 중대장과 인터뷰를 했는데, "나는 드레스녹이 월북했을 때 며칠 뒤에 "사냥 갔다가 길을 잃었다"는 둥 이딴 핑계를 대면서 돌아오면 재판에 그를 회부하여 총살시켜 버리려고 했는데,[5] 지금은 40년도 넘었지, 아마?" 라며 그 당시 일을 회고했다.

한편, 북한으로 간 드레스녹은 하루 뒤에 평양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일개 육군 보병 병 신분이었던 드레스녹이 군 기밀을 알고 있을 리는 없었고, 따라서 북한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었다. 심문이 끝난 다음에 드레스녹은 미리 월북했던 또 다른 미 육군 병사 래리 앨런 앱셔를 만났다. 이후 1963년 12월에는 제리 웨인 페리시가 합류했고, 다시 1965년에 젠킨스 하사가 합류하였다. 드레스녹은 주한미군들에게 북한이 지상낙원이니 얼른 넘어오라며 월북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여 옛 동료들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장병들은 드레스녹의 조국을 배반한 행위에 분노했으므로, 드레스녹을 힐난하며 선전 내용을 무시하였다.

4 소련 대사관 사건

하지만 북한에서 미국인인 그들은 한민족이 아니였고 언어도 달랐으므로 주변 북한 사람들로부터 이질감에 시달렸고 차별을 당해야 했다. 결국 북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1966년에 같은 백인들이 많은 러시아가 좀 낫겠다는 생각에 소련 대사관망명 요청을 했는데, 소련 대사관에서는 계속 북한에서 살라며 그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냈다. 화가난 드레즈녹은 "개같은 이반들, 이거나 먹어라!"라고 중지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소련 대사관이 북측에 통보하는 바람에 이제 죽었다 싶었는데, 북한 당국은 그들을 이용한 선전활동을 중단하고 외부 접촉을 금지하는 수준에서 처벌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그들은 이제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하며 굉장히 불안해했다. 이후 북한 당국은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관리인들을 그들에게 배정하여 북한 사회에 적응할 사상교육에 주력했다. 당신들이 북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해서 불편함이 없도록 살게 하겠다는 것이 생활 방식의 제한과 교육의 목적이었다. 이후 몇년동안 별다른 일을 갖지 못한채 그저 원하는게 있으면 노동당에서 보낸 관리인에게 청하는 식으로 낚시, 수영, 음주, 독서[6], 잡담[7]으로 소일하며, 말 그대로 먹고 놀았다.

드레스녹, 앱셔, 페리시 등은 바깥 소식이 매우 궁금했지만 북한 당국에서는 그들에게 바깥 소식을 가르쳐주는데 그다지 열성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바깥 소식에 대해서는 모두다 기계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다.

5 젠킨스의 합류

그러던 중, 1965년 미 육군 보병하사 찰스 로버트 젱킨스가 북한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에게 합류하게 된다. 드레스녹의 주장에 따르면 젠킨스는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마음대로 행동했고, 그 때문에 미국인들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사관 출신인 젠킨스는 계급을 내세워서 병 출신이었던 나머지 미국인들에게 명령을 하며 이래라저래라 부렸는데, 앱셔와 페리시는 그러려니 하면서 젠킨스와 친해졌지만 성질이 괴팍하고 괄괄한 드레스녹은 크게 반발했다. "탈영한 주제에 무슨 군인이냐, 어디서 감히 명령질이냐?"며 드레스녹은 늘 불만을 토로했는데, 앱셔와 페리시는 드레스녹을 늘 따돌렸다.

드레스녹은 그들이 곧 젠킨스의 본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이 젠킨스에게 복종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는데, 그 '본성'을 깨닫기 전에 그 둘은 죽었다. 결국, 젠킨스가 또 계급 부심을 부리자, 화를 참지 못한 드레스녹은 젠킨스에게 주먹질을 했다. 드레스녹은 젠킨스에 비해 신체적으로 월등했으므로, 젠킨스는 한 방에 고꾸라져서 덤비지 못했다고 한다. 드레스녹은 젠킨스 얘기는 하기만 하면 짜증이 난다며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반면, 젠킨스는 "드레스녹이 체구를 이용해서 나머지 셋을 함부로 대했고, 결국 참다 못한 우리 셋이 어느 날 작정하고 힘을 합쳐 그에게 덤벼들자 그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그들만이 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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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그래도 유일한 월북 미군들이라며 늘그막에 같이 사진을 찍었지만, BBC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는 같이 있을 때에는 수 십 년을 지낸 친구라고들 해놓고 막상 둘이 떨어져 있을 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6 영화 출연

1972년 북한 당국은 이들에 대한 사상 교육이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그들에게 공민증을 주고 북한 주민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집, 배급권, 승용차를 지급했다. 그런 뒤 북한 당국은 그들을 다시 선전에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1978년부터 그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덕분에 드레스녹을 비롯한 이들 미국인 월북자들은 전국적인 대스타가 되었다. 드레스녹은 자신이 연기에 재능이 있으리라 생각치 않았지만, 선전영화에 등장시킬 서양 배우가 없었으므로 그들이 동원되었고, 촬영장에 나가보니 드레스녹은 자신이 의외로 연기에 소질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드레스녹의 호연에 북한 당국은 그들이 진정으로 인민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게 됐다.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은 신상옥, 최은희를 납치해올 정도로 영화에 환장해 있었고, 남한으로부터 넘어온 미국인 간첩들을 잡는 내용인 20부작 선전영화 '이름 없는 영웅'에 그들 월북 미국인들을 등장시켰다. 드레스녹은 이 영화 내용은 다 사실임을 굳게 믿은채 악랄한 포로수용소장 '아서 콕스터드'를 연기했고, 북한에서 대인기를 얻어 오늘날까지 아서 선생이라고 불리는 입지를 쌓았다. 이 밖에 70년대 DMZ 분쟁을 소재로 한 북한 영화 <전초선>에서도 한국군의 북침을 주도하는 비열한 미 군사고문관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다룬 영화 <대결>에도 음모와 흉계를 꾸미는 미군 장교로 등장하였다.

지금도 평양 시민들은 드레스녹을 아서 선생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김일성 대신에 특정 배우를 숭배하는 팬덤 현상을 틀어막으려는 북한의 술책도 작용됐다. 북한에서는 어떤 영화가 크게 히트를 쳐도 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서 배역의 이름으로 영화에 출연한 배우를 지칭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신상옥 감독이 납북된 이후에 영화 기풍이 바뀌어서 80년대 이후로는 그러한 관례는 허물어졌는데, 신상옥 감독의 첫 작품인 돌아오지 않는 밀사에 정식 캐스트가 실린 이후부터는 배우와 감독의 이름을 뭇 대중들에게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7 근황

북한을 떠나기 직전까지 한국말을 거의 못하던 찰스 젠킨스와는 달리 문화어도 빨리 배우고 북한의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자신의 고향에 사는 것처럼 편안하다고 BBC 방송국 기자들 앞에서 몇번에 걸쳐서 이를 강조했을 정도다. 본인은 군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다 은퇴하였으며, 자식은 평양외국어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8]. 본인의 말에 의하면 "미국에 있었으면 잡일이나 했을 텐데 내가 자식들 대학 근처나 보낼 수 있었겠냐?" 라며 북한 정권을 찬양한다.

드레스녹이 살아온 배경 자체가 불우하였으므로 이는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확률상으로만 보면 사실이다. 오늘날에도 미국 대학 입학률은 50%가 채 못되며, 드레스녹이 살았던 농촌 지역은 30%마저도 안된다. 미국 변두리의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마을 생활 수준을 생각하면 되려 미국에서는 지금 북한에서 받는 대우나 생활 수준을 영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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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납북되어 북에서 그와 결혼한 도이나 붐베아. 오른쪽은 드레스녹이 붐베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차남 제임스 가브리엘 드레스녹이다.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인터뷰하던 모습.

1978년 이탈리아에서 납북루마니아 출신의 도이나 붐베아라는 여자와 결혼했으나, 도이나는 1997년에 으로 사망했다.[9] 이후 토고인+북한인의 혼혈 여성과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 아들을 두었다. 일설에 따르면 도이나 붐베아와 결혼하기 전에 북한 여자와 잠시 결혼생활을 한적이 있다고 한다. 2001년에 제임스 드레스녹이 60번째 생일을 맞았을때 김정일은 그에게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유복한 삶을 살았으며 드레스녹은 이 일에 대해서 김정일을 찬양하며 미국과 서방을 비난하는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열심히 답습했다.

이 다큐멘타리에서 드레스녹은 유창한 한국어를 선보인다. 평양 시민들과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이다. 살도 꽤 찐 것으로 봐서는 북에서 받는 대우는 좋은 것 같다. 단 폭식과 폭연으로 인하여 건강이 무척 좋지 않다고 한다. 푸른 눈의 평양시민을 찍는 와중에서도 기침을 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잠시 인터뷰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고 드레스녹의 주치의가 드레스녹의 건강이 영 좋지 않다고 설명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 것 치곤 70을 넘기며 북한 기준으로 꽤 장수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젠킨스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늦게 월북했던 젠킨스가 북한에서도 계급을 내세워 대장노릇을 하려 하자 다 같이 탈영한 처지에 계급은 얼어죽을 계급하며 젠킨스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고 한다. 이후로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고, 젠킨스가 너무 늙어 기운이 없는데 반해 그의 아내는 아직 성생활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지만[10] 눈치가 없었던 젠킨스는 그걸 몰랐고, 이에 본인이 젠킨스의 아내를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젠킨스가 봤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다시는 젠킨스네 가족이 드레즈녹의 집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젠킨스가 일본에서 펴낸 자서전에 서술한 자신에 대한 묘사를 읽고는 '어따대고 사기를 쳐? 젠킨스를 죽여버리고 싶다(..)'라며 화를 냈다. 젠킨스를 죽이고 올테니 방미허가를 내주십셔 드레스녹은 "그 자식이 나한테 서른번이나 맞았다고? 개자식! 탈영죄로 30년형에나 처해져라!"라며 그를 저주했는데, 미군은 젠킨스를 30일형에 처했다.(...)[11]

현재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JamesDresnok이라는 해시태그를 쓰면서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트위터 계정이 있으나, 평양의 일반 인터넷은 외부와는 연결되지 않으므로 드레스녹 본인이라기보다 일부 장난기 있는 유저들이 드레스녹을 사칭에 오리는 유령 트위터 계정일 확률이 높다. 애당초 이양반의 나이가 70대 후반인데, 그나이에 IT에 크게 관심이 없다면 쓰기 힘든 트위터를 폐쇄사회에서 수십년간 있던 사람이 쓸리가.. 이런 장난 계정은 페이스북의 고려항공 계정 및 김정은, 김정일(..)등도 있다.

아들이 두명 있는데, 귀화인 자손임에도 차남 제임스(북한명: 홍철)는 인민군 상위, 장남 테드(북한명: 홍순철)는 북한 외무성에서 관료로 근무한다고 한다. 기사

[1][12]
  1. 오버스트리트 목사는 드레스녹이 월북한 이후에 그가 자랑스러운 미국 시민으로 반공주의자라고 주장했지만, 글쎄...
  2. 미군은 결격 사유 없는 예비역들을 선발해 재계약 형식으로 예편 당시의 계급부터 다시 군생활을 시작하게 해 주는 제도가 있다.
  3. 사실 이는 드레스녹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미군들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에 미군 지휘관들은 저 놈들 얼마 안가서 죄다 성병에 걸릴 것이라고 혀를 찼다고 한다.
  4. 드레스녹은 키가 196cm로 매우 크고 키와 함께 덩치도 큰 사람으로, 드레스녹의 중대장은 그에 대한 첫인상에서 굉장히 크구만 하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중대장은 나중에 월북자가 덩치 큰 사람이라는 보고를 듣고 드레스녹 이 새끼가 사고쳤구만 하며 월북자가 드레스녹인지 바로 알아챘을 정도였다고 한다.
  5. 그러나 이는 과장일 뿐이다. 전시가 아니면, 무장탈영이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한 총살될 리는 없다.
  6. 김일성의 저서나 소설 등이었다고 한다.
  7. 주로 고향, 즉 미국 얘기였다고 한다.
  8. 북한에서 외국어대학을 졸업하면 즉시 외교관으로 임용된다.
  9.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드레스녹은 도이나의 이름이나 국적에 대해서도 언급을 회피했다. "유럽에서 왔다고는 들었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는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물어보니까, 입 닥치라고 하더니 다신 묻지 말라더라."며 어물쩡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북한 정부에서 부부 중 하나 혹은 둘다 입막음을 시킨듯 하다. 다만, 젠킨스의 자서전에서 도이나의 이름과 유언까지 다 서술된 것을 감안하면, 북측에서 드레스녹에게만 주의를 준 모양이다.
  10. 젠킨스의 아내 소가 히토미는 젠킨스보다 19세나 어렸다.
  11. 젠킨스의 형이 선고되기 직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워커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젠킨스에게는 천운이었다. 일본정부에서 부시에게 젠킨스를 선처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부시는 젠킨스에게 선처를 베풀었다. 법적으로 육군 보병하사 계급을 유지하고 있던 젠킨스에게 새 육군 피복과 그간 밀린 급료 일체를 지급하고 얼마 뒤 퇴역할 때까지 보직도 줘서 그에 따른 급여와 수당까지 지급했다. 30일 징역형이라 되어 있는데, 사실상 영내에서 생활하는 것 빼고는 다른 군인들처럼 보직도 새로 받고 근무했다고 한다.
  12. 링크된 동영상의 경우 종북논란을 빚고 있는 재미언론인 노길남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기에 내용을 어느 정도 가려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