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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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중일전쟁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장제스와 국민당의 무능함을 과장하여 일본군과 장제스의 병신력 배틀이란 황당한 표현이 나올 정도였지만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사관과 일본 사관의 무비판식 답습의 결과다. 딱 잘라 말해서 당시 중국군이 개판이었던 건 사실이다. 무기는 고사하고 군복도 통일하지 못한 오합지졸에 상시적, 잠재적 마적떼 수백만명이 우글거렸다. 병기 숙련도와 참모진의 능력, 규율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를 순전히 장제스의 잘못이나 중국의 병크로 매도할 순 없다. 애초에 청조 몰락 이후 군웅할거의 오랜 전란을 겪고 겨우 형식적 통일[1]을 이루어내서 막 공업화를 시작한 중국에서 메이지 유신 이래로 공업화를 해오고 상비군 위주의 군사제도를 체택한 일본군 급의 강병이 나오길 기대하는 건 소말리아가 경제대국이 되길 기대하는 것과 같은 도둑놈 심보다. 그리고 장제스가 이런 상황에서 앉아서 논 것도 아니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소련의 도움을 받고 막스 바우어,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의 군사고문들을 초빙하고 경제 건설과 공업화, 농업정책, 외교 교섭을 통해서 어떻게든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며 1938년까지 이어지는 독일식 정예 중앙군 양성 프로젝트과 1942년까지의 중공업 개발을 추진 중이었다. 1930년대 국민당 정권은 최소한 난징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직할령에선 꽤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제구실을 하기 전에 일본군이 칼들고 몰려왔고 그나마 발전시킨 중국 동부 해안을 먹어치우면서 완전히 새되고 말았다.

그나마 기존에 꾸린 병력으로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군은 강렬한 항일 의지를 가지고 일본군에 제법 타격을 주었다. 장쉐량이 만주와 화북의 지배권을 놓고 찌질대다가 만주를 통째로 날려먹은 전례에 비하면 엄청나게 양반이다. 전쟁 중 중국군은 거의 매 전투마다 엄청난 사상자를 냈는데 그 전의 중국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낼 정도로 싸우지도 못하는 병신 군대였다. 좀 두들기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군대가 국민당의 노력과 항일 의지 덕분에 녹아내릴 때까지 버티고 싸우는 군대 수준으로 올라간 것이다. 하지만 숫자만 많지 기량이 엉망진창인 국민당군의 분투는 한계가 있었을 뿐더러 그나마 방어선을 꾸리면 자신의 기반에 집착하려는 군벌들이 적전도주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베이핑과 톈진의 손실만 해도 베이핑의 지배자인 쑹저위안이 베이핑 지배권에 집착하다가 망한 거고 이후 화북 지역의 싸움에서도 군벌들이 심심하면 적전도주를 하는 바람에 방어선이 무너져 잘 싸우던 전황을 말아먹은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에 빡돈 장제스가 적전도주를 일삼은 군벌 30여명을 불러 모조리 총살해버리기도 했다. 거기에 일본군과 싸우라고 8로군에 넣어준 공산당은 평형관과 백단대전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2] 대개는 같은 국민당 유격대를 공격하는 등 세력확장에만 몰두하여 4만 5천명[3]에 불과하던 세력을 전쟁 말에는 120만으로 불렸다. 마오쩌둥은 1956년 전 일본군 육군 중장인 엔도 사부로에게 일본이 침략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가 엔도에게 "전쟁으로 피해를 본 너희 중국인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도 안 드냐"라는 비난 섞인 말을 들었다. 마침내 2011년 1월에 그 발언이 공개되자 중국 공산당은 당연히 난리가 났고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이것은 마오쩌둥의 풍자 섞인 위트, 즉 블랙 유머라고 허겁지겁 변명했다.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가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거기에 밑에도 후술하겠지만 도움을 주기로 한 미국의 도움이 대단했던 것도 아니다. 기사회생한 영국, 소련에 비하면 중국이 받은 지원은 그야말로 병아리 모이급에 그나마도 제대로 분배도 안됐다. 승리자인 중국 공산당의 시각에서 바라본 기존의 혹평 일색은 21세기에 들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장제스의 중일전쟁 초기 공훈을 높이 평가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깊게 들어가면 자기들은 일본에 맞서긴커녕 국민당 뒤통수나 친 흑역사가 있으니... [4]

분명 장제스는 2차 상해 사변 등에서 무능한 면모를 드러냈지만 전쟁승리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국민혁명군 장교 출신으로 국공내전 이후 미국에 와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중국사 교수를 지낸 레이 황(黄仁宇) 컬럼비아대 교수도 장제스의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청조 멸망후 반식민지 상태에 군벌시대로 헬게이트가 된 농업국가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한 점, 화폐개혁으로 인한 은본위제 폐지 등을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재 중국도 과거의 마오쩌둥 찬양 일색이던 시절과는 달리 중국이 일본에게 승리할 수 있던 요인인 장제스를 재평가하고 있다. 다만 현재의 대만(대만 섬으로 도피한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립하기에 과거 중일전쟁 수행의 주체가 현재에는 일본과 친밀하게 지낸다는 점이 오히려 역사적 아이러니가 되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그것이 과거의 적이었다 해도(...)

1.1 장제스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고도 잘 싸우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명관계의 재현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중국 공산당의 저런 악의적 선전이 한국의 넷을 중심으로 굉장히 유명하고(오프라인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구 리그베다 위키의 중일전쟁 문서도 그런 주장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었으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거의 받지 못했으며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중국군은 중일전쟁 초기에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원래도 중국은 가난한 농업국가였는데 그나마 개발해놓은 중국의 대부분의 산업지대가 일본군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5] 상하이, 난징, 우한 등이 함락되면서 중국은 공장을 죄다 우랄 산맥 너머로 뜯어서 옮겨버린 소련관 대조적으로 자본가들의 비협조로 인해 상하이에 배치했던 공업력의 2.75%만을 건졌는데 그나마도 핵심 공업력은 다 날아간 상태였다. 중국은 1938년 10월 우한 점령의 시점에서 관세수입의 91%, 공업의 94%, 전력의 96%, 방직공업의 75%를 상실했다. 그리고 주요 항구들이 다 점령당하면서 물자 수입의 길까지 거의 끊겼고 얼마 후에 수입의 80%를 담당하던 광저우까지 함락되면서 남은 물자 수입통로는 오로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하는 하노이 루트와 영국령 버마를 통한 버마 루트 뿐이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일본이 열강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계지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하이의 조계지를 통해서 군수물자가 계속 수입되었다.[6] 이 상황에서 물자를 제공하는 것은 소련, 독일과 유럽 식민지들 뿐이었다. 일본은 하이난 섬을 점령하고 영불을 압박하여 하노이 루트와 버마 루트를 끊으려 했지만 일본의 무리한 확장에 열받은 영불은 오히려 일본의 눈치를 봐서 두었던 무기 거래 제한을 풀어버렸다. 하지만 중국에게 남은 영토는 서쪽의 황량하고 척박한 땅들뿐이었고 충칭도 기껏해야 2선급 도시였기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거기에 엄청난 숫자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충칭의 인구만 3배 이상으로 늘어난 시점이라 기근까지 겹쳤다. 당시 미국이 중국에 준 물자는 이 정도다.[7]

M3 경전차 100대
트럭 2만 5천대
야포 2053문
소총 30만 5천정
기관총 10만정
철모 14만 6천개
폭격기 151대
전투기 679대
수송기 120대
훈련기 43대
식량 3만 3천톤

기타 지원금액 8억 4500만 달러

동시대 영국은 310억 달러, 소련은 110억 달러 받았다. 이걸 보면 장제스가 뭘 얼마나 많이 받았다고 무기를 쟁여놓고 안 싸웠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오히려 국공내전 기간동안 미국에게 받은 게 40~60억 달러 어치였으니 중일전쟁과 넘사벽의 차이다. 흔히 이 무기들이 장제스 직계군에게 흘러갔니 장제스가 그걸 안줬니 하는데 이런 무기들은 스틸웰이 지휘하는 중국군에게 흘러갔으며 심지어 스틸웰은 미 공군에게도 이 물자들을 제대로 공유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굴릴 무기가 없는데 무기를 군벌들에게 줄 수가 있나. 이 중에서 장제스가 받은 무기는 곡사포 60문과 바주카포 506문, 대공포 몇대가 고작으로 그나마도 이치고 작전으로 난리가 난 상황에서 스틸웰이 마지못해 양도한 것이다.

중국으로 지원되었다는 물자의 대부분은 중국 주둔 미 공군용 물자이며 나머지 물량조차 인도로 파견된 중국군에게 거의 다 전용되었다. 실제로 일본군이 중국에서 국민당군을 탈탈 터는 동안에도 장제스는 스틸웰의 무리한 요구로 인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버마에서 X군과 Y군을 돌리고 있었다. 버마전선에서 통제권은 스틸웰에게 있었고, 연합군은 그들을 소모품 취급할 뿐이었다. 장제스 군대에게 스튜어트가 충분했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장제스가 2차 대전때 받은 스튜어트 전차는 기껏해야 100대 정도였고 그나마도 위에도 적혀 있듯이 버마 주둔군에게 다 몰려 있었다.[8]

장제스나 플라잉 타이거스 지휘관 셔놀트 준장 등의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조지프 스틸웰 때문에 지원이 형편없었다는 증언에 대해 국공내전의 사례를 들면서 어설프게 부정하려는 논리도 보이는데 스틸웰의 성향이 어쨌거니를 떠나서 중국은 연합국에서 찬밥 대우였고 위에 수치로 나와있지만 미국은 중일전쟁 때 중국에게 정말로 물자를 얼마 안줬다. 랜드리스에 중국 몫으로 책정된 물자는 고작 2%였고 그나마도 스틸웰이 쟁여놓질 않나 영국군이 중간에서 착복하질 않나 오히려 중일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새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해줬다. 애초에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은 다른 전쟁인데 국공내전의 사례를 들먹이며 중일전쟁이 어떻게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물론 미국 정부라고 할 말이 없는건 아니다. 미국이 자선 단체도 아니고 무조건 장제스가 원하는대로 대규모 육군병력을 파견하고 최신식 무기도 펑펑 퍼주고 돈도 막 퍼줄 의무는 없다. 지원 규모는 오로지 전략적 중요성을 판단하는 미국 정부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미국의 자원과 인력도 무한정인 것이 아닌 이상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먼저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고 미국은 유럽에서 나치를 패배시키는 것을 더 중시했다. 스틸웰의 수많은 실책과는 별개로 중국 지원이 소홀했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실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대규모 물자를 보내주고 싶어도 그럴만한 사정이 못되었다. 영국이야 대서양만 건너면 되고, 소련은 북대서양 항로를 통해 무르만스크로 가는 루트와, 페르시아만(이란에서 아제르바이잔을 통한 루트)으로 건내주는 루트가 있었는데, 중국에는 물자를 보내줄만한 루트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태평양은 일본해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여기에 수송선단을 보내면 어떻게 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중국의 해안도시와 대만은 모두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선단을 보내도 하역할만한 항구도 없었다. 유일한 루트는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까지 가서 거기서 육로를 통해 중국까지 보내는 방법 뿐이었는데, 인도양도 일본군의 공습을 받는데다가 독일 잠수함의 활동지였으니 결코 쉬운일은 아니었다..[9] 거기다 버마를 통한 육로 수송도 남방작전으로 1942년에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하면서 차단되었다. 그 이후로 미국이 중국에게 물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인도에 물자를 보낸 다음 수송기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일부 항공기의 경우에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추락한 비행기들의 잔해를 따라서 항로를 잡은 적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운반할 수 있는 물자의 양도 적은 데다가 항공기용 연료의 경우 운반하는 수송기가 운반 중 사용하는 양이 심하면 50%에 육박하는 등 낭비도 심했다. 물론 버마 루트가 버마 탈환 이후 재개통되긴 했는데 그땐 이미 전쟁 끝나가던 시점인지라...

게다가 미국은 중국에 대한 지원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중국의 능력 자체를 의심했기 때문에 중국이 원조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도 난색을 표했고 중국에 이미 할당된 물자를 영국이 횡령하는 문제도 모른 척 하는 등[10] 매우 차별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미국의 대중 지원이 소홀했다는 팩트를 무시하고 미국이 준 막대한 물자 쌓아놓고 태업한 장제스~ 운운하는 프로파간다들 때문에 이 단락이 이렇게나 길어진 것이지만. 오히려 중일전쟁 당시, 중국의 최대 지원국은 미국이 아닌 소련이었다는 주장도 있다.물론 해당 기사에서도 소련이 대인배라서가 아니라 일본 견제 용으로 지원했다고 원인을 밝힌다.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면 소련은 독일과 일본의 협동 공격을 받을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1.2 스틸웰은 유능한데 중국군이 무능해서 패한 것이다?

한국에서 스틸웰은 명장이고 무능한 중국군이 스틸웰의 지휘를 따르지 못해 진 것이며 장제스는 오만하여 미국인 고문들의 현명한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소리가 퍼져 있지만 이 또한 스틸웰의 일방적 주장을 답습한 오류에 불과하다.

우선 스틸웰의 성향에 대해 알아보자. 스틸웰은 누가 뭐래도 지독한 혐중론자였다. 중국에서 무관으로 복무한 경험과 출중한 중국어 실력 덕분에 중국통으로 알려져 장제스의 고문으로 결정되었는데 스틸웰은 전 중국군의 지휘권을 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버텼을 뿐더러 중국 파견 소식에 "쿨리들과 어울리라니 날 뭐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짜증을 냈던 양반이다. 애초에 장제스는 소련에서 보내준 바실리 블류헤르나 독일이 보내준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같은 고문을 원했지 자기 자신이 직접 지휘하려드는 장군을 원한게 아니었다. 이러니 둘의 사이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그리고 스틸웰은 중국군이 일본군과의 오랜 전투를 통해 터득한 지구전과 소모전에 대해선 중국인들은 용병술도 모른다고 비웃다가 정작 자신이 장제스의 최정예 병력을 데리고 버마에서 일본군과 맞섰을 때는 장제스의 충고도 무시한 졸렬한 지휘 때문에 개발살났다. 이미 영국군은 버마 수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다 빠지고 있었고 철수하는 인도군과 영국군, 민간인을 보호한 건 스틸웰이 그렇게 폄하하던 중국군이었다. 그래놓고 '이게 다 무능한 중국군 탓이다!'를 시전하면서 중국군들을 모두 총살해 마땅하다는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정작 중국군과 같이 싸운 영국군의 슬림 중장은 중국군이 노련한 베테랑으로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극찬했다. 자신의 최정예 부대를 말아먹은 스틸웰에 대해서 장제스는 엄청난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플라잉 타이거스의 셔놀트 준장 역시 만약 스틸웰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지휘관이며 만약 그가 미군이 아니라 중국군 소속이었다면 진작에 총살시켰을 것이라며 뼈저리게 혐오했다.

그리고 주는 것은 없이 요구는 많아서 버마 전투에서 중국군 3개군 뺏아오질 않나 다시 30만 대군을 버마 탈환을 위해 뺏어오질 않나 그래놓고도 중국이 무능하다는 소리만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스틸웰은 300개 사단, 400만에 달하는 중국군을 90개 사단으로 감축하고 소수 정예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그러기 위한 물자는 하나도 제공할 생각이 없었다. 장제스가 이 상황에서 이 말을 들으면 그게 바보다. 미국은 장제스의 지상군 파병 요청도 지원 확대 요청도 다 씹었다. 애초에 미국은 태평양과는 달리 중국에선 그저 일본군을 묶어두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고 그때문에 아예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바랬던 장제스는 속이 터졌다. 장제스는 미국이 주는 것도 없이 내정간섭에 월권을 하려 든다고 이를 갈았다. 특히 장제스는 여러번 반란을 경험한 사람이었고 스틸웰이 자신의 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군대를 축소하려 드는 것을 아예 미국인들의 반란 음모 정도로 받아들였다. 허나 오만한 스틸웰은 이런 중국인들의 분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고 중국인들이 하는 것도 없이 요구만 많다고 깠으며 국민당이 중일전쟁 개전 초기 수십만명의 피를 뿌려가며 처절히 맞선 사실도 다 국민당의 거짓말 정도로 치부했다.

스틸웰은 바이충시를 비롯한 일부를 빼곤 장제스 이하 대부분의 중국 장군들을 무능하다고 비웃었지만 중일전쟁 당시 장제스는 상하이 전투에서 삽질을 벌이기도 했어도 그 이후엔 상하이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화북 등지에서 안정적인 철수와 유격전, 소모전을 병행했고 일본이 우한을 점령한 이후 공세종말점에 다다르자 난닝, 난창, 우한 등지에서 여러차례 반격을 감행해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했다. 특히 진주만 직후의 3차 창사 방어전에서는 영국까지도 진주만 이후 연합국이 드디어 승리를 거뒀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지만 중일전쟁의 양상도 모르던 스틸웰은 장제스의 지구전이나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 유도 전략을 비웃으며 화력을 모아 정면승부를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까는 행보를 보였고 나중엔 이게 다 중국군 때문이다 시전으로 일관했다. 스틸웰이 무능하다고 까댄 두위밍 장군만 해도 일본군 상대로 여러번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스틸웰은 그를 매우 폄하하여 한국에도 그가 무능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이미 조금 설명한 바이지만 버마 전투도 무능한 중국군 때문에 스틸웰이 졌다고 스틸웰의 일방적 주장만 알려져 있는데 실상을 까보면 버마를 포기하기로 한 영국군이 지독할 정도로 비협조적으로 굴며 중국군 뒤통수를 치고 달아나버린 것과 스틸웰 본인이 일본군이 전차도 대포도 없다고 무작정 깔보고 무장도 제대로 안된 중국군을 무리하게 내세우는 졸렬한 지휘를 한 탓이었다. 정작 쑨리런 장군이 지휘하던 중국군은 영국군 7천명과 500명의 민간인, 17 인도사단을 구출하는 성공적인 전과를 올렸고 스틸웰 본인도 쑨리런을 동양의 롬멜이라고 칭찬했다. 그러곤 동양의 스탈린그라드라 불리는 창더 전투 직전엔 무리한 버마 탈환을 위해 장제스의 최정예 병력 30만명을 빼돌려놓곤 병력 파견 조건으로 약속했던 물자도 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창더 전투에서 중국군이 고전하자 중국군은 무능하다고 비웃었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한 건 둘째치고 상덕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긴 했지만 치열한 저항과 축차적인 소모전으로 일본군에 적잖은 타격을 줘서 일본군 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중장이 작전을 조기 종결하고 퇴각했는데도 말이다.

이치고 작전, 즉 대륙타통작전이 벌어질 무렵에는 장제스가 조만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자 스틸웰은 형편없는 일본군 따위가 무슨 공세를 취하겠냐고 그의 말을 싹 다 무시하고 장제스의 유일한 전략예비대인 Y군을 장제스를 협박하여 빼앗아 버마로 보냈는데[11] 아니나다를까 이치고 작전이 터져서 일본군 50만명이 뤄양, 난닝, 창사, 헝양을 잇달아 점령했다. 중국군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미친듯이 싸워 일본군에게 무려 10만명의 피해를 안겨줘서 일본군이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중국군이 아니라 미군인가?하고 당황할 정도였지만 결국 중국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화중을 모두 잃고 중요한 곡창지대들을 상실했다. 스틸웰은 이런 상황에서도 장제스의 지원 요청을 모두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이 중국군을 지휘해야 한다고 떠들었으며 일기에는 건방진 장제스는 골탕을 좀 먹어야 한다고 고소해하는, 동맹국에서 보낸 고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정신나간 행태를 보였다. 일찍이 그는 장제스 암살을 기도한 바도 있었다. 결국 장제스는 폭발하여 루스벨트에게 스틸웰을 자를 것을 요구했다. 얼마나 장제스가 초강수를 뒀는지 스틸웰을 자르지 않을 거면 걍 관계 끊자. 너네가 준 물자 다 가져가라!라고 루스벨트에게 직통으로 통첩을 날렸을 정도였다. 마침내 스틸웰은 1944년 10월 19일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중국에 부임한 웨드마이어가 한 첫번째 일이 허물어지는 중국군 방어선을 보강하기위해 스틸웰이 머저리같이 살윈강에 묶어둔 중국군 2개 사단을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낸 일이었다.

스틸웰은 자신의 동맹인 중국을 깔보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군도 깔봤는데 상기했듯이 창더 전투, 이치고 작전에서 일본군 따위가 무슨 반격을 하냐고 계속 방심하다가 중국군만 엿먹였으며 1942년 버마 방어전을 맡았을 때도 일본군을 얕보다가 개발살나서 1백명의 일행과 함께 걸어서 버마를 탈출했다. 그리고 1944년의 버마 탈환전 때도 장제스가 버마의 일본군이 아직 녹록치 않다고 경고해줬음에도 장제스의 모든 조언을 간섭이자 멍청한 소리로 비난하며 씹고 X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다 자신이 주장한 것보다 세배나 되는 일본군과 맞닥뜨려 또 고생했다.[12] 애초에 그의 버마 탈환 계획만 해도 영국, 미국, 중국이 모두 불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 악을 써서 관철시킨 것이고 영국과 미국이 반대하자 스틸웰은 미국, 영국의 협조 없이 중국군만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한 장제스를 비난했고[13] 보다못한 셔놀트가 스틸웰이 설욕에 눈이 멀어 할짓 못할짓 못 가린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결국 그의 버마 탈환전은 무능한 하나야 타다시, 가와베 마사카즈등의 자폭으로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무타구치 렌야전설적인 임팔 작전과 맞물렸고[14] 결국 버마 탈환에 관심이 없던 영국까지 가세하여 랑군까지 밀어버렸다.

스틸웰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 애초에 그 사람이 중국 전선이라는 거대한 전선을 맡을 만한 경험이나 능력이라곤 전혀 없이 그저 중국어 실력 때문에 임명되었던 것은 둘쨰치고[15]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으며[16] 거기에 정치적 능력은 매우 떨어졌다. 패튼과 비슷하거나 그 이하로 보통 취급되는데, 일례로 그는 중국에 부임한 이후 다짜고짜 장제스 휘하 직계군의 지휘권을 요구했다. 스스로도 말이 안된다고 판단하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중국군의 고위 미국인 장교의 그의 업무는 분명히 충칭과 워싱턴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고 장제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편견으로 중일관계를 멋대로 재단했으며 정말로 필요한 지원들은 자기 생각에 필요없단 이유로 끊어버리고[17] 장제스의 비현실적인 요구는 장제스를 망신주기 위해서 가감없이 워싱턴에 전달하면서 중국인들은 너무 멍청하여 우리가 이걸 다 들어주리라고 생각한다는 개인적 소견을 첨부하는, 가히 적국 스파이나 할 법한 짓을 저질렀다. 이는 장제스의 북벌 시기에 중국에 왔던 소련 고문들이나 중일전쟁 개전 전후의 나치 고문들의 세련된 행보에 비하면 가히 눈물이 날 정도의 행각이다. 당장 다른 미국인 참모인 클레어 셔놀트의 행보만 봐도 스틸웰의 정치적 막장성은 두드러진다. 그리고 버마 전선 이후에 장제스와 투닥대다가 미 정부에 칭얼대자, 미 정부에서 스틸웰에게만 비밀 전문으로 '당신이 중국군 통수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라는 내용을 전달했는데 경솔하게도 스틸웰은 그걸 갖다가 장제스 방으로 쳐들어가서 장제스 얼굴에 들이미는 짓을 했다. 이러한 행각과 대륙타통작전에서의 자폭이 겹치면서 결국 장제스의 중국과 스틸웰 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는 강력한 반발로 미 정부는 이러다가 중국이 등돌릴까봐 스틸웰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스틸웰은 마지막까지 사고를 치니 후임인 웨드마이어 장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멋대로 인도로 떠나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웨드마이어는 스틸웰의 이러한 행태를 회고록에서 비판했다.

게다가 장제스와 중국인들만 스틸웰을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스틸웰은 버마 탈환전 중에서는 영국군의 전과들을 자신의 전과인 것처럼 발표하고 봤다가 처칠과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격노를 사기도 했으며 버마 탈환 준비 과정에서도 무리한 생떼를 써서 런던과 워싱턴의 안좋은 시선을 동시에 받았다. 게다가 같은 미국인 셔놀트는 스틸웰하면 아예 이를 갈았고 스틸웰 휘하에 배속된 윙게이트 병단을 본따 창설된 메릴 부대도 스틸웰의 지휘권 행사에 대해서 크게 반발하곤 했다.

1.3 중국군은 일본군을 눈앞에 두고도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다?

이는 만주사변, 러허사변 시기까지만 놓고 말한다면 사실이다. 하지만 중일전쟁을 놓고 본다면 이 역시 역사왜곡이다.

실제로 중일전쟁 초기 중국군의 최대 문제는 군벌들의 이기심이었다. 베이핑, 톈진의 중국군이 일본군에 압도적인데도 황당하게 패배한 것도 베이핑의 지배자였던 쑹저위안이 자신의 지배권이 약화될까봐 거의 직무태만에 가까운 행보를 일삼았고 장제스가 즉각적으로 지원해준 중앙군조차도 베이핑에 오지 못하게 막는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닛뽄도 들고 몰려오는데도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고 거의 손을 놓고 있었던 쑹저위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세가 일본군 쪽으로 완전히 기운 후였다. 더 거슬러올라가면 1931년의 만주사변도 화북의 지배권을 놓고 집착한 장쉐량이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거의 앉아서 1만 5천에 불과한 일본군에게 털린 탓이었다.

이후 화북 지역의 전투에서도 지역 군벌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 탈영, 적전도주를 일삼았고 옌시산, 리쭝런 등은 꽤 그럴듯한 방어선을 갖추어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하다가 군벌들의 도주에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져내려 화북을 황당하게 다 내주어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평형관, 타이얼좡에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지만... 이후 광저우 전투에서도 광둥 군벌들이 직무유기를 일삼고 멋대로 철수해서 광저우가 날아갔고 결국 폭발한 장제스는 도주를 일삼던 군벌 30여명을 소환하여 모조리 총살했다. 하지만 광둥 군벌들의 위세는 너무 커서 화북 군벌들과는 다르게 목을 따진 못했다. 이건 충칭으로 천도한 후에도 문제가 되어서 장제스는 전쟁 중에도 자신들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쓰촨 군벌들과 지역 행정권을 둘러싸고 쓸데없는 정치적 다툼이나 벌여야 했다. 원래 군벌 자체가 장제스와 심하면 적, 우호적이라도 동급 위치를 차지했던 사람들이라 서로 동지로 보는 의식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반장전쟁만 보더라도 유력한 군벌치고 장제스의 위치를 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영역에 틀어박혀 단독으로 베이핑의 일본군 사령부와 평화협상을 벌여 전쟁 내내 전투를 기피했고, 임시 수도인 충칭을 중심으로 쓰촨성과 윈난성 지역의 지방 군벌들과 장제스의 알력 다툼은 극심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일본에 편에 붙었을 때 왕징웨이를 따라서 일본에 붙은 군벌은 하나도 없었다.[18] 장제스 하면 이를 갈던 룽윈이나 장파쿠이같은 반장 군벌들조차도 친일이라는 반역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고 기껏해야 한푸쥐의 적전도주나 옌시산이 궁지에 몰리자 단독강화를 한 정도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여 동포에게 총부리를 돌린 자들은 없고 중일전쟁을 영도하던 장제스의 권위를 위협한 자들도 없었다. 반란을 두번이나 일으켰던 리쭝런, 바이충시도 장제스의 명령에 절대복종, 타이얼좡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항일이라는 대의 아래에 군벌들은 대체적으로 협조적이었다. 누구도 장제스를 일본제국보다 우선순위로 제거하려는 미친 짓은 저지르지 않았고 중국군은 일부 비겁한 적전도주(그나마도 전쟁 초반에 몰려 있다.)를 제외하면 내분이 없었다.[19] 장제스의 중앙군의 능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자 무능한 군벌군 운운하며 이게 다 군벌군 때문이다! 그러니 군벌군이 주력인 중국군은 망하는게 당연하다~ 란 논리가 새롭게 떠오르는데 39년 대공세나 창사 공방전, 상덕 전투 등 중일전쟁 대부분이 군벌군이 주력이었고 그들의 전과 역시 우수하다. 물론 주요 전투의 경우 그때마다 장제스가 중앙군을 파견해 보조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 편이나 한국 웹상에서 떠도는 장제스가 직속군을 후방에 놀려두며 군벌군, 공산군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반대로 전쟁 초기에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독일식 정예부대 4개 사단과 자신의 직속 정예부대인 5군과 6군 30만 대군을 전선에 투입했고, 오송 크리크 공방전이나 타이얼좡 전투에서도 직계군이 맹활약하였다. 즉 장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하지만 위의 단락에서 가루가 되도록 지탄받은 스틸웰이 장제스 직속군을 죄다 미얀마로 보내버리는 상병크를 터트리는 바람에 전쟁 후반에 상대적으로 활약을 못한 것 뿐이다.[20] 장제스 직속군대 10만이 1942년 스틸웰의 무능 때문에 버마에서 전멸당하는 사건[21]이나 전략 예비대인 X군, Y군이 버마 전선으로 보내지지만 않았으면 창더 전투, 대륙타통작전의 향방이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장제스의 반격 작전은 빠르면 43년 말, 늦어도 44년 정도에는 실행될 예정이었는데 병력 여유만 생길라치면 스틸웰이 훼방을 놓는 통에 45년 말로 미뤄졌고 끝내 시행되지도 못했다. 거기에 중국군 공세작전의 실패도 중국의 재공세를 늦추는 영향을 미쳤다. 공화국 정부에서도 기존의 이게 다 장제스 때문이다 사관을 탈피하여 중일전쟁 중에 일본군에 맞선 장제스의 노력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1.4 중국군은 오합지졸이고 국민당은 전쟁에 도움이 된 것이 없다?

전쟁중 중국군 장교단의 질은 군사교육의 열악함으로 인해 상당히 낮아서, 장제스가 군단장급 장군들에게 대놓고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지 너희들 능력이 그 자리에 어울려서 앉은 것이 아니다. 군단장이라는 네놈들의 실제 실력은 일본군의 대대장급도 과분하다!"고 까댈 정도였다. 이는 중국군 80만 대군이 상하이에서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일본군에게 포위 섬멸당할 뻔 했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군의 기강도 엉망이어서 군대란 것이 주둔지역 민간인들의 식량이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하는 등의 범죄가 들끓었다. 게다가 강제징병을 위해 마을을 공격(!)하는 사태도 종종 벌어졌다. 이러한 탓에 각 마을주민들은 국민당군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고 자경단을 결성해 전투를 벌여야 하는 지경이었다. 조선인민군

하지만 이것도 실상을 까보면 마냥 매도할 수도 없는데 중국군이 일방적으로 졌다는 기존 관념과는 달리 2차 상하이 사변만 해도 중국이 우쑹, 다챵전 등에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준 전과가 있으며 타이얼좡, 짜오양, 1~3차 창사 공방전를 비롯한 승전이 많았으며 4차 창사공방전이나 상더 전투처럼 일본이 이긴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중국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인해 잇달아 수천~만단위의 피해를 입은 바가 있다. 대륙타통작전에서도 일본군이 입은 손실이 10만에 달했다. 즉 일방적으로 털린 군대가 아니었단 것이다. 흔히 중국이 버틴 원인을 무한에 가까운 인력과 넓은 영토로 지적하는 소리들이 많은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과장된 부분도 있다. 중국의 인구가 문자 그대로의 무한이 아닌 이상 일본군이 압도적인 교환비로 중국군을 쉴새없이 격퇴하면 결국 중국 인력도 고갈되는 것이다. 단 중국 인구가 일본 인구보다 엄청나게 많은지라 일본군도 끝없이 죽여가며 전진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막장 기동성을 본다면일단 일본군 전차부터 보고 오자 치하전차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 일본군이 영토가 넓은 중국 대륙을 다 가로지르려면 꽤 오래 걸렸을 것이 정론이다. 애초에 2차대전 내내 일본군은 기동성 좋은 군대가 아니었으니까.우선 무타구치 렌야가 사령관이고 왜소한 체격으로 주제파악도 못하고 떡대좋은 미군에게 반자이 어택 하는거부터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이러한 전과는 여러 단락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당시 중국이 사분오열된 농업국가였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당장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보다 베트콩이 더 많이 죽었다고 베트콩이 무능하니 베트남 전쟁은 실질적으로 미국이 이긴 전쟁이니 이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중국군의 기강과 사기, 훈련도, 무장이 빈약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는 당시 정권의 무능함이 아니라[22] 당시 중국의 상황에 어쩔 수 없던 것에 해당한다. 애초에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제대로 된 중앙정부랄 것도 없는 중국에서[23] 대체 누가 양질의 군사적 엘리트를 양성하고 최신 무기를 수입하며 병사들을 훈련시킨단 말인가? 게다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장제스의 공업화 정책 및 군 현대화 사업으로 과거에 비해선 매우 강력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징병문제도 절박했던 당시 중국의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군에게 주요 요충지를 잃고 밀렸는데 징병을 안하면 일본에 앉아서 항복하란 말인가? 중국 서부의 농민들에 대한 인적, 물적 수탈은 안타까운 일이긴 했지만 안했다간 중국이 무너져버릴 고육지책이었다. 그렇게 강압적으로나마 항전수행을 지속할 여력을 마련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초인플레이션과 인적 고갈로 중국은 일본군 총칼 앞에 망했다. 게다가 장제스와 당시 중국정부의 징병제가 강압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장제스는 앞으로 중국을 영도할 학생들에게는 군면제를 해줌으로 앞으로 중국을 이끌어갈 학생 엘리트들을 보호했다. 40년대 말에 군면제 학생들을 상대로 모병제가 실시된 바가 있는데 이에 호응한 사람이 14만으로 목표인 10만을 가뿐히 넘었다. 미래를 이끌어 갈 지식인들을 비행기에 태워서 자폭시킨 일본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24]

거기에 장제스가 자신들의 적인 쓰촨 군벌들과의 동거를 했음에도 장제스 정권이 약해지긴 커녕 오히려 장제스의 권위가 증대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과거 대군벌 오페이푸, 장쭤린, 장쉐량 등은 자신들의 기반을 잃고 밀려났을 때 예외없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런데도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은 정적들 사이에서도 권위가 유지되었다. 노래처럼 불러지는 '부패되고 무능하기만 국민당 정권'이라면 이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즉 요약하자면 당시 중국군은 문제가 많긴 했지만 당시 중국이 처해있던 열악한 상황에 비해서는 대단히 선방한 편이며 불과 몇년전인 만주 사변, 러허 사변에 비해서도 매우 발전된 모습을 보였고 구 군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범국민적 지지를 확보한 상태였다.[25][26]

1.5 중국군은 반자이 어택보다 더 개막장 닥돌 전술을 사용했다?

중국군이 반자이 어택급 개막장 닥돌 전술을 했다는 어떠한 문헌적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
물론 중국군이 반자이 어택처럼 화력 지원 없는 보병 돌격을 했다지만, 그건 중국군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훗날 국공내전에서 비뢰포 따위의 물건이 쓰인 걸 보면 알겠지만, 중국군에게 제대로된 화력이라는게 없는 상황이었고, 중국군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화력 지원을 해줬다.

1.6 중국군의 전사자는 일본군의 몇십 배, 몇백 배 된다?

중일전쟁 도표에 설명되어있지만, 자료가 잘못되어서 생긴 문제다. 애초에 중국군은 편제와 무장 자체가 3,4개 사단을 합쳐야 겨우 일본군 1개 사단을 합쳐야 맞먹는 수준이라 단순한 사단수만 가져다놓았을 시에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객관적인 전력 비율을 눈치챌 수 없다.

전투력만 봐도 당장 충분한 지원을 받은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오히려 우세한 전과를 올렸는데 장제스가 아끼고 아꼈던 독일식 사단과 중앙군은 상하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엄청난 피해를 강요했고 허망하게 무너진 것으로 알려진 난징 공방전도 중국군이 독가스 살포 이전까진 선전했다. 우한 전투만 해도 일본군은 만단위의 출혈을 강요받았고 전쟁 초반에서 평형관 전투, 태아장 전투 등 굵직한 승리가 있었다. 대륙타통작전 당시에 팡셴줴 장군이 지휘한 헝양 전투에선 일본군이 더 많이 죽었고 항복하는 팡셴줴 장군에게 일본군 지휘관들이 천황 폐하가 당신의 분투에 감동받으셨다고 치하하는, 일본군으로써는 믿기지 않는 존중을 보여줬다. 전쟁 말기에 미군의 지원을 받았던 중국군은 운남 지역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개발살내고 대륙타통작전으로 잃었던 화남 지역을 대거 탈환하기도 했다.

여하튼 중일전쟁 기간 일본군 사망자는 47만명 정도가 정설이었지만 실종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이유로 재검토에 들어갔고 현재는 약 105만 명 정도로 보는게 정설이다.[27] 추가로 중국측의 사망자 수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데, 공식적인 군인 사망자 수는 국공 양측을 합해서 150만이라고 하지만 실제 통계는 그의 몇 배 정도 된다고 한다. 일본군과의 교전으로 사망한 전사자 숫자는 대략 320만 가량 추정된다는것이 정설. 일본 괴뢰정권이나 군벌들끼리 싸워서 전사한 숫자도 기록 부족으로 확실피는 않으나 상당한 규모가 될껄로 추정된다.

1.7 항일은 공산당 중심이었다?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정부와의 대응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

1937년 9월 26일 8로군 중대장 이상 모든 간부들을 모아서 실시한 마오쩌둥의 훈시.

"팔로군은 지역에서나 관심을 가질 법한 느슨한 방어전에나 제한적으로 나섰다. 적이 쳐들어와 싸움이 시작되기만 하면 팔로군은 산으로 뒷걸음질쳐 충돌을 피했다."

타스 통신 특파원 블라디미로프의 회고.

"특수 지역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회의가 군부대에서 수행되고 있는 유일한 작업입니다. 여름에는 여기에 농산물 비축 작업이 약간 추가됩니다."

타스 통신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틀렸다.

공산당은 게릴라 전투 위주로 소규모의 항일 전투 전적은 몇차례 있긴 한데 문제는 국민당의 중앙 직계군만큼 수십만 수백만 규모급의 정규전을 제대로 치룬 사례들이 극히 드물다는 의미이다.할거면 제대로 하든가!

1990년대 이전까지만해도 중국의 역사책들은 이런식의 서술들이 많았으나, 최근 중국의 역사교육이 국정제->검정제로 바뀌면서 역사학계에서는 국민당 정권이 항일의 중심 역할이 컸음을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28]

공산당의 기본 방침은 일본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홍군은 일본군과의 변변한 교전 기록이란 것이 없으며 홍군에서 항일투쟁에서 전사했다고 선전하는 일부 인물들은 수를 늘리기 위해 중일전쟁 중 국민당군을 습격하다 전사한 인물들까지 억지로 포함되어 있다.(...) 애초에 중일전쟁 시작할 때 공산당은 4만명 정도의 병력만 있었고 국민당은 300만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공산당 수뇌부가 항일을 하고 싶어 미쳤더래도 국민당과 동일한 수준의 항일 기여가 가능한게 말이 되겠는가? 항일전투에 적극적이었다해도 정규전보다는 게릴라 활동 위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그런 형편에 놓여있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심각한 것은 공산당의 항일의지란 것이 게릴라 전투 외에 정규전에는 여러가지 한계가 있었을뿐더러 오히려 팀킬을 시전했다는 것이다.(대표적인 예가 환남사변) 공산군은 중일전쟁 초기엔 국민당에 협력하여 평형관 전투, 백단대전, 타이항산 전투 등에서 활약했지만 문제는 정규전 활동에서 그게 다였다. 마오쩌둥은 지금이야말로 세력을 불릴 절호의 기회라고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본 점령지 내부에서 해방구를 만드는데 열중했다. 여기까지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문제는 이미 활동중인 국민당 유격대를 공격해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해방구를 차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니라 공산당의 할당된 구역을 무시하고 자기들 멋대로 영역을 확장하고 남의 구역 침범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펑더화이가 백단대전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자 마오쩌둥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매우 성을 내기까지 했고 이런 기조에 반발하여 항일을 촉구하는 당내 반대파들을 대거 숙청해버렸다. 중빠들이 노래처럼 부르는, 소위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애먹이다가 그 경험으로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을 패퇴한 홍군은 허상에 불과하다.

결국 국민당도 폭발하여 남의 영역에서 설치는 신4군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일본이고 뭐고 공산당부터 조지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렸고 국민당이 열받은 걸 안 마오쩌둥은 신4군을 철수시켰는데 1941년 1월 창강에서 발생한 신4군 사건(환남사변)이 발생했다. 철수중이던 국민당 신4군이 국민당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아 괴멸당한 것. 누가 먼저 선빵을 때렸는지 또는 원인을 제공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 대해 국민당측에서는 공산당이 먼저 국공합작을 깼다고 주장했고, 공산당은 장제스의 명령으로 철수하던 신4군이 팀킬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장제스의 공산당 견제라는 시각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공격하고 해방구를 장악하는 등 통수를 친 사례가 재평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재조명되었는데 현지의 반공산당 국민당 장성들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는 설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물론 공산당 역시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우선 공산당도 중국이 좀 망하면 어떠냐? 우리만 잘살면 그만이지! 정도로 막장으로 군 것까진 아니었고 이들도 항일이 최우선 과제라는 것은 인식하여 점령지의 지나친 공산화 및 정치적 장악을 시도하진 않았다.[29] 소위 태업행위에 관해서도 변명의 여지는 있는 것이 마오쩌둥은 자신이 항일에 집중하는 사이에 국민당이 일본과 협상하여 자신의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지극히 의심하였다. 이는 로스 테릴의 마오쩌둥 평전이나 이시카와 요시히로의 중국 근현대사 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부분이다. 공산당을 못 믿는 것은 장제스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는 공산당에 주기로 했던 지원을 얼마 안가서 끊어버렸다. 솔직히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악연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의심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기회가 있는 한 국민당에게 맞설 수 있을만한 거대 세력을 빨리 구축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고 그것이 중일전쟁 중에 보인 교전 회피와 해방구 확산 전략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공산당의 전략이 일본군에게 1%의 견제도 주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역시 과장이요 왜곡이다. 당장 일본군의 삼광작전도 공산당이 화북 지역에 뿌리 내린 해방구의 존재에 자극을 받아서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있다면 어쨌거나 결국 공산당은 항일보다 반장을 우선시하고 같은 중국인들 사이의 팀킬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공산당의 확산 전략도 항일이 목적이 아닌, 체급 불리기가 목적이었고 일본군에 대한 견제 역시 부차적인 효과에 불과했다. 당장 그 과정에서 국민당의 통제를 무시하고 자기 구역 바깥으로 마구 세력을 확장한 것이야 차치하더라도 걸리적거리는 국민당 유격대나 국민당 지방정부, 국민당군을 습격해서 전멸시켜댄 것에 어떤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2차 국공합작은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복종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말이다.

내가 천진을 떠나 태행산 국군에 입대했었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민간인들이 국군에 파는 양곡들을 태행산에 있던 팔로군들이 어떻게 방해했다는 거며, 어떻게 약탈해 간다는 사실, '멸식대(滅食隊)를 조직하여 민가를 돌아다니며 양식을 보는대로 다 착취해 버리는 것을 이들의 주목적으로 일삼는다는 것이며, 소위 구국금(救國金), 또는 장병 위로금, 등등의 명칭을 내세워서는 어려운 농민들에게 기금하여 줄 것을 강요 했다는 것, 그러다가 눈에 거슬리면 공연히 어진 백성들에게 <친일파>라는 죄명을 씌워서 죽인다는 사실, 종래에는 일본 놈들 군복을 입고 일본군으로 가장하여 우리 국군을 습격 했다는 사실, 이면으론 엉뚱한 흉계를 꾸미면서도 태연스럽게 '웃음 외교'를 한다는 사실, 우리 국군은 일선에서 일본군과 홍협군을 대항하여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놈들은 뒤에서 우리 국군의 병력을 소멸시키는 데에만 주력했다는 사실!, 나는 태행산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샅샅이 말했다.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극도로 흥분되어 눈물까지 흘리면서, 내 자신이 팔로군에게 총을 맞고 산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구사일생으로 어떤 친구의 보호를 받아 황하를 건너오게 되었다는 사실과 팔로군이 쏜 총알이 아직도 내 오른쪽 어깨에 박혀 있다는 등 사실을 전부 말했다.

"오늘 저는 이론을 따지려고 이 곳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우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회장이 평소에 이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우의 말을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비방해 버렸지만, 그 학우의 말은 백퍼센트 정확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이론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피비린내나는 산역사의 것입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서, 또 민간에게 더 이상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서, 팔로군에게 이렇다할 말 한 마디도 없었지만, 우리 국군에겐 억울한줄 알면서도 우리들의 총지휘관을 파면시켰었던 사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이 하북 대평원에서도 생겨, 열렬한 반일 전우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사실이 내 머리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학우 여러분! 여러분께서 들어 두어야 되실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민국 이십칠년 말부터 팔로군들은 신하에서 하북 백성과 군인들의 마음을 감언이설로 설복시킨 다음 이십팔년 초에는 유백승, 하룡, 여정조 들과 합세하여, 왕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복마장에서 당건사를 포위하여 하북의 민간인과 군인 사존 중학교 학생들을 기습했던 것입니다. 이 때 그들에게 맞아죽은 학생들의 수만 무려 오백여명에 달했으며,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삼백여명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때 잡혔었던 포로들은 전부 삼민주의 청년단원들이었기 때문에 무참하게 참살당했던 것입니다. 팔로군들은 이 기습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하여 평한로 사방에 있는 하북 지방의 군민들을 추격하는 한편, 형대, 사하, 자무에서도 반일 국군을 습격케 했으며, 그 후 무안에서는 제일 전투 지역 이십일 분대인 이광의 부대를 해산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연이여 융평, 요산, 속진 등지에서 반일 보안단을 전부 해산시켜 버렸으며, 후에 석가장 부근에서는 우리 국군을 인솔하여 산해관 동북 방면으로 유격전을 하러 가는 이들을 기습하여 지휘관인 조동을 죽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고 계실줄 믿습니다만 이 조동이야 말로 우리가 늘 존경해 오며, 유격대의 어머니라고 부르던 조씨 노인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공산당들은 이 두 모자가 반일분자가 아니라는 억측 밑에서 참살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어느 한 분도 이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믿으실 분이 안 계시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 모든 생생한 사실들은 공산당의 신사군들이 하북 지방에서 얼마나 비행을 저질렀나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일선에서 우리 국군들을 참패시켜 놓고, 지방 백성들의 민심을 어지럽게 하는 반면, 반일 전쟁을 거절하며 강소성 정부를 소멸시키는 등, 이 모든 비행이 전부 이들 팔로군들의 스스로 저지른 반역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일단 말을 멈췄다. 단 밑에서 우뢰같은 박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며 울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걸 느끼며 말을 계속했다.

"조금 전에 몇몇 학우들께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청년들로서 현실에 불만을 품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들 이 현실에 만족을 느끼고 있는줄 아십니까?제가 태행산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때 겪은 그 모든 고난과 위험을 후방에서 세상 모르고 향리에만 도취되어 살아가는 일부 특권층에 비교해 본다면 과연 일선은 출생입사며, 후방은 취생몽사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져 나가는듯 아픕니다. 다행히도 우리 주변엔 아직 취생몽사 속에서 사는 사람의 수가 역시 적으며, 대다수의 우리 백성들은 갖은 고생 속에서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취생몽사의 인간과 별 차이 없는 또 하나의 기막힌 현실들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우리들 눈앞에 공공연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 학생들이 어느 야심가의 선동과 유혹에 사로잡혀 덩달아 교련 장교를 배척하며, 교내 군사 훈련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전수업까지 휴학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학우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까지 저 함락 구역에서 망국노들이 걷고 있는 그들의 생활을 맛보지 못했을줄 압니다. 비록 맛은 못봤다 하지만, 여러분은 망국노의 수치와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을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조국의 품안에서 군사 예비 교육을 받고 있다는 이 것은, 다름아닌 우리 청년들 하나 하나가 후세에 올 우리들의 자손에게 영원히 망국노로 안 만드는 신성한 책임을 지워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대한 사명에도 불구하고, 군사 훈련을 무용지물로 생각하며, 심지어 파괴까지 하려는 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그것이 취생몽사와 다를게 어디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더 무서운 취생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정부에서 그들을 해산시킨 것도 양민을 괴롭히기만 일삼아 오던 이들의 비행을 처음엔 참아오다가 드디어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 이러한 결정을 내려 단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정부에 책임 추궁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책임추궁할 것이 있다면 그건 왜 진작 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는가를 추궁할 것 밖에 없습니다. 만약 정부에서 이를 좀 더 일찍 결정하고 실천했다면, 그동안 억울하게 희생당한 반일 국군과 우리들의 선량한 동포의 피해가 적었을 것이며, 희생도 덜 당했을 것입니다. 정부를 추궁하고, 지금 와서는 다시 신사군을 회복하자는 맹랑한 조건을 내세우며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민간인을 해치며 항전을 파괴키시던 반란군들의 난동이 다시금 이 나라에 나타나고 있으니 우리는 진심으로 이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까? 정부에서 신사군을 해산 처분한 것도 단순히 군의 기강을 위반한 군인에 한해서였지, 그들이 공산당 부대라고 무조건 처리한 것은 아닙니다. 한복지, 석우삼, 이복은 전부 국민당원이었지만, 그들이 반일 명령을 집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군법재판에 의해 총살당한 사실도 있습니다. 정부 당국에서 군대의 군기를 일관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단행한 이 처사를 옳다고 보십니까? 그르다고 보십니까? 저는 이걸 여러분들에게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복지, 석삼우, 이복이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정부를 추궁할 사람이 계십니까? 신사군들의 반란 행위는 이들 한,석,이, 세 사람의 반란 행위보다 몇천배 몇만배 더 엄청나게 큰 사건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모르고, 이러한 반란군들을 지지한다면 자각을 못하고 있는 일부 학생들의 취생몽사와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이것 역시, 더 무서운 취생몽사인 것입니다. 저도 반일 군인이었습니다만은 여지껏 아무런 정당에도 가입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삼년동안이나 정치과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고금을 통해 어떤 국가든지 일개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가 이념에 위배되는 개인의 무력과 사상의 존재를 허락, 또는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은 책에서나 교수님들의 강의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무력으로 마음대로 어느 지역을 점령 하여선 제 멋대로 특수한 정부를 세워서, 중앙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천고의 기문이라 안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국회가 있어 정부 시책의 잘잘못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정부를 비평하고 추궁할 대로 했습니다. 이것보다 더한 혹평을 가하고 한층 더 추궁해도 저는 찬성합니다. 왜? 그것은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건 민주 국가의 집정자로선 의당 받아야할 편책이기도 합니다. 만약 집권당의 집정이 좋지 못하면 헌법에 의해 정식으로 공포한 다음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의지에 비추어 우리가 원하는 정당에 투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도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오직 기만과 유혹과 공포 등 이러한 수단으로 국민을 협박, 공갈해 가며 심지어 살해해 가면서 나라를 소란시키는 것은 저로선 결사 반대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희망하고 믿으며 자기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를 결사 반대할 것입니다."

이윽고 나는 결론을 맺었다. 우뢰같은 박수 소리가 고막을 울려왔다. 나는 벌겋게 흥분된 입술로, 이 우뢰같은 박수 소리에 콧등이 시큰하며 감격하고 있었다. 아직 박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고 있는데, 꼬마와 정미장이 웃으면서 단 위로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감격적인 얼굴이 마음에 아무런 간적도 없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내가 연사였다는 것 조차 망각해 버렸다. 나는 그들에 부축되어 단 위를 서서히 내려갔다.

왕람(王藍)<람여흑(藍與黑)>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왕람(王藍)이 1958년에 출판한 소설 <람여흑(藍與黑)>에 작중 중일전쟁 당시 팔로군과 신사군의 만행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설의 주인공 장성아(張醒亞)도 팔로군의 습격으로 총을 맞고 하마터면 죽을뻔 했었다. 위에 인용된 장면은 군에서 제대한 후 국립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 주인공이, 국민당 정부의 신사군 해체에 불만을 품고 동맹 휴학을 추진하는 공산당원 학생들에 맞서서 반공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참고로 왕람은 직접 중일전쟁에 참전하였던 사람이고, 그의 친구도 그와 함께 참전했었는데, 그의 친구는 전쟁 도중 전사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왕람은 자신이 겪은 전쟁을 소재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는데, <람여흑>은 그의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걸작이며, 여러 차례 드라마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1967년 삼일각에서 상과 하, 두 권으로 번역 출판 되었었다. 번역의 퀄러티는 대체적으로 우수한 편이지만, 세로본이라 가독성이 떨어진다는게 옥의 티.... 그리고 출판 년도가 오래된 만큼 절판이 되었고, 헌책방에서 구하기도 쉽지 않다.

위에 인용된 내용에서도 보듯이 중일전쟁국공내전의 정세에 대해 매우 상세히 몰입감 있게 자세히 잘 설명 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 중국에 대한 아무런 사전 배경지식이 없이도 충분히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대 여러 계층의 중국인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고증이 잘 된 편이다.

다만 소설이 발표된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 소설은 지나칠 정도로 반공에 집착하며 공산당 을 완전히 천하의 개쌍놈들, 악의 축으로 표현한게 약간의 옥의 티라 할 수 있는데, 물론 소설에 표현된 공산당의 악행들, 예를 들어 중일전쟁 당시의 팔로군의 만행이라던지, 이런 내용들은 대부분이 거의가 다 실제 사실에 기반한 내용들이긴 하지만...... 국공내전의 경우 국민당의 시점에서 너무 편향되게 서술 되었다는건 부인할 수 없다.

비슷하게, 장준하의 중일전쟁 참전 수기인 "돌베개"를 보면 국부군에 대항해 세력 확장에 골몰하는 팔로군에 대해서 장준하 선생이 분노를 감추지 않는 장면들이 몇 군데 나온다.
  1. 그나마도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같은 대규모 군벌부터 시작해서 소규모 군벌들 수십명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2. 그나마도 백단대전 이후에 펑더화이는 마오쩌둥한테서 왜 이 전투 벌였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3. 일단 이것은 편제상 숫자이며, 실제 숫자는 3만~8만으로 논란이 있다.
  4. 실제로 2차 국공합작의 파기의 근본이 된 신사군의 환난사변도 사실은 국민당을 선제공격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5. 중국의 최대 공업지대인 만주를 장쉐량의 병크로 일본이 먹은 것은 논외로 치고.
  6.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 당연히 중지되었다.
  7. 단 주요 물자로 이것 말고도 일부 주긴 했지만 의미 있는 양이 아니었음을 명시해야 한다. 셔먼 전차도 전 버전에선 아예 받은 적 없다고 되어 있었지만 일부 받긴 했다. 주나 마나 한 양이라서 그렇지.
  8. 게다가 스튜어트가 경전차라 한들 분명히 전차다. 그걸 1940년대 수송기로 히말라야를 넘어 수송할 수 있겠는가? 전차같은 중장비의 수송은 해로 아니면 육로로만 가능하고, 해로는 개전 이래 쭈욱, 육로는 1942년 버마를 빼앗긴 이후 차단되어 있었다. 전차를 부품으로 분해해서 현지 재조립할 생각이 아닌 이상 중국에게 전차 등 중장비를 지원하는 건 불가능했다. 1944년부터는 공로 완성 및 버마 탈환으로 가능해지긴 하는데 이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로 유럽 전선에서 전차 수요가 폭발하고 있었다. 다른 경장비류나 일반 물자라면 지원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전차 등 중장비는 마땅히 줄 방법이 없었다.
  9. 의외로 잘 안알려진 사실인데 당시 인도양에도 다수의 독일군 잠수함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연합군 수송선들을 격침하고 다녔다.참고 바람
  10. 1942년 롬멜이 카이로로 진격하자 중국으로 향하던 물자들이 죄다 영국으로 빼돌려지기도 했다. 참고로 이 전투기는 무기대여법과 별개의 차관으로 받은 전투기였다!
  11. 말 그대로 루스벨트와 장제스 사이를 이간질하여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내놓지 않는다고 모함했다. 루스벨트는 스틸웰의 말을 듣고 당연히 장제스에게 X군을 내놓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고 위협했고 장제스는 피토하는 심정으로 최정예 예비대를 내놓아야 했다.
  12. 스틸웰은 버마 전체에 일본군 5개 사단 밖에 없으며 자신이 공격하는 버마 북부엔 1개 사단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버마 전역에만 8개 사단이 있었고 스틸웰이 버마 북부에서 맞닥뜨린 15군은 3개 사단 병력이었다. 거기에 2개 사단이 더 오는 중이었다. 이뭐병...
  13. 위에서 많이 봤듯이 이미 스틸웰은 장제스의 피같은 정예군을 엄청나게 낭비한 바가 있다.
  14. 이 과정에서 스틸웰은 다시 장제스를 협박해 이번엔 Y군을 빼앗아왔다(...).
  15. 원래는 그가 아닌 대군을 운용해본 휴 드럼이 내정되어 있었으나 그는 미국이 중국에 지원을 해줄 생각이 없음을 알고 중국에 대대적인 지원을 해준다는 조건을 붙여서 짤렸다.
  16. 쑹쯔원의 경우, 스틸웰이 주중 미국대사관 무관을 지냈다는 말에 혼란기 중국을 경험한 그가 혐중성향이 있을 것같다고 우려했는데 이는 적중했다.
  17. 대표적인 것이 장제스가 미국에 요구했던 항공기 지원인데 장제스가 500대의 항공기를 요구하자 스틸웰은 그걸 씹어버렸고 장제스 부부가 강력히 반발하자 루스벨트는 265대의 항공기를 보내주었다.
  18. 물론 일본이 회유하려 했지만 다들 실패했고 심지어 우페이푸의 경우에는 일본이 자기 말을 안듣는다고 죽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19. 굳이 예외를 따지자면 팀킬을 일삼던 공산당이랄까...
  20.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나 말 그대로 장제스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21. 버마도 못 지킨 판국에 전력의 75% 이상이 날라갔다.
  22. 물론 정권이 좀 뒷돈을 받아먹기도 하는 등 문제가 없던건 아니지만
  23. 일본군 쳐들어오기 직전까지도 반란과 내전에 시달리던게 당시 중국이었다.
  24. 다만 일본도 전쟁 초반까지는 대학생을 징병하진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는 반대로 군대 안 갈려고 대학 진학률이 높아졌지만.(...)
  25. 장제스랑 허구한날 싸워대던 군벌들조차도 일본과의 협조를 거부하고 장제스에게 붙을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이런 이들은 장제스도 잘 했다며 상을 주었다.
  26. 사실 일본은 자기가 세운 괴뢰정권의 중국 관료들에게서 조차도 환영받지 못했다.
  27. 다만 이 수치에는 왕징웨이 괴뢰정권만주국, 몽강자치연합정부 등의 일본 괴뢰 정권의 전사자 숫자가 빠져있다. 왕징웨이, 몽강국, 만주국의 전사자 숫자도 촤소 70만은 넘을 것이라는것이 정설.
  28.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도 이 2000년대 이전의 중국의 사료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중일전쟁 시기 국민당 정권이 항일에 소극적이었다고 다뤄지기도 했으나, 최근의 인식은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 그 예가 중일전쟁 시기 한국의 독립부대로 활약했던 조선의용대 가운데 일부대원들이 화북으로 옮겨가 중국 공산당 및 팔로군에 합류하게 된 배경 관련. 기존에는 '국민당 정권이 항일에 소극적이었기에 항일에 좀 더 적극적인 팔로군에 합류했다'로 서술되곤했으나, 최근에 학계에서 연구된바에 따르면 조선의용대 일부 대원들이 화북으로 옮겨간 이유에 대해 '중국 대륙에 한국인들이 없기 때문에 그보다 좀 더 많이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 거주하는곳으로 찾기위해서 그리고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화북으로 간것이 크다'고 보고있는중이다.(여기에 더해서 저우언라이의 설득도 영향이 크게 작용한것도 있지만..)
  29. 물론 이는 지나치게 급격한 혁명화를 시도했다가 초공작전 때 피를 본 것에 대한 학습효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