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에두아르트

1 개요

1.1 명칭 논란

(개명 전)찰스 에드워드, Charles Edward
(개명 후)카를 에두아르트, Karl Eduard

1.2 소개

생애 : 1884년 7월 19일 ~ 1954년 3월 6일(69세)
재위기간 : 1900년 7월 30일 ~ 1918년 11월 14일(18년 3개월)

카를 에두아르트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군주이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에 의해 폐위된 후에 나치 적십자 총재를 역임했다.

2 짧았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

카를 에두아르트는 1884년 7월 19일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와 올버니 공비 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찰스 에드워드. 출생 당시 아버지 레오폴드는 혈우병으로 사망한 상태였다. 즉, 카를 에두아르트는 유복자였다.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는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의 넷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관계로 태어나자마자 올버니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미 첫째 큰아버지 에드워드 7세와 사촌형 앨버트 왕자, 조지 5세 등 영국의 유력 왕위 계승자가 있었기에, 카를 에두아르트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았다. 왕족 치고는 소박한 삶을 살았지만, 어머니 헬레나, 누나 앨리스와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자녀들에게는 냉정하고 엄격한 어머니였으나, 손자녀들에게는 자상하고 온화한 할머니였다. 그래서 카를 에두아르트도 그런 할머니를 따랐다. 그러나....

3 영국인이냐, 독일인이냐

둘째 큰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겸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트(1844년 ~ 1900년)의 유일한 아들 알프레트(1874년 ~ 1899년)가 1899년 2월 6일 사망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은 독일 제국의 소왕국이었다.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등 독일어권 국가들은 극단적인 살리카법을 유지했기 때문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겸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트의 딸 4명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셋째 큰아버지 코넛 공작 아서(1850년 ~ 1941년)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왕위를 이어받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조카인 카를 에두아르트가 후계자로 갑자기 발탁된 것이다. 그래서 카를 에두아르트는 본명이었던 찰스 에드워드카를 에두아르트로 개명했다. 그러나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큰 혼란이 생겼다. 독일어권 국가들을 이끌던 독일 제국빌헬름 2세(독일 제국)영국, 미국 등의 영어권 국가들과 대립하는 노선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카를 에두아르트는 영국 왕실 서열에서 제명되었다.

4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으로써의 재위

1900년 7월 30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가 사망하자 카를 에두아르트가 즉위하였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당시 1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호엔로에-랑겐부르크의 에른스트(1863년 ~ 1950년)가 1900년부터 1905년까지 섭정하였다. 에른스트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사촌누나 알렉산드라의 남편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의 사위였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어머니와 누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1914년, 카를 에두아르트는 독일 제국의 편이 되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1918년, 독일 제국이 있던 동맹국은 패망하였고, 독일 제국은 급속도로 해체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다른 독일의 군주들과 마찬자기로 패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폐위되었다.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올버니 공작 작위도 폐위되었다. 폐위된 이후 카를 에두아르트는 고향 집을 찾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1922년 사망했고, 누나 앨리스는 애슬론 백작 알렉산더와 결혼했다. 애슬론 백작은 조지 5세의 처남이었다. 즉 사촌 형의 처남이 자신의 매형이라는 것.

5 나치 독일에 협력

이런 상황에서 비뚤어진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 독일 적십자사의 총재를 역임하였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 독일이 자신의 왕위를 되찾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빌헬름 2세(독일 제국)와 빌헬름 황태자도 카를 에두아르트처럼 왕정 복고에 기대해 나치 독일을 지지하였으나 군주제를 싫어한 아돌프 히틀러, 좀더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나치의 악행에 신물이 나 나치 독일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 독일을 지지하였고, 자신의 딸을 스웨덴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1906년 ~ 1947년)와 결혼시켰다. 당시 스웨덴 국왕이었던 구스타프 5세(1858년 ~ 1950년)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나치 독일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손자와 손자며느리의 결혼을 지지했던 것이다.

6 비참한 최후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함에 따라 카를 에두아르트는 다른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재판정에 섰다. 국제 법원은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막대한 벌금을 지급시키게 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누나 앨리스와 카를 에두아르트의 아내 빅토리아는 카를 에두아르트를 재판에 세우지 않기를 희망했으나 그들의 발언은 재판에서 무시되었다. 벌금형 선고 이후 서독 코부르크에서 살았으며 1954년 3월 6일 사망했다. 거기다가 1943년 아들 후베르투스(1909년 ~ 1943년)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기까지 했다.

7 가족 관계

자세한 것은 빅토리아/가족관계 항목 참고.

공세자 요한 레오폴트는 귀천상혼으로, 차남 후베르투스는 미혼으로 전사했기 때문에 당주 자리는 3남 프리드리히 요시아스가 물려받는다. 프리드리히 요시아스의 장남 안드레아스(1943년~)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현 당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