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지리 히데타카

河尻秀隆
(1527 ~ 1582. 6. 18)

전국시대의 무장으로 미노 출신의 토호로 에치 군의 이와사키 마을으로 오다 노부타케를 섬기다가 오다 노부히데를 섬겼다. 1542년의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와 1548년의 제2차 아즈키자카 전투에 참여했으며, 노부히데 사후에 오다 노부나가를 섬겨 쿠로호로슈(黒母衣衆)의 필두를 맡았다.

1558년에 노부나가가 동생인 오다 노부카츠(오다 노부유키)를 살해하기 위해 키요스 성으로 부를 때 노부카츠를 살해했다.

1560년에는 오케하자마 전투에도 참전했다. 1564년부터는 미노 공격에 참가했고, 1565년까지 미노 전역에 여러 전공을 세운다.

1569년은 이세의 키타바타케 가문 공략, 1570년에는 아네가와 전투에도 참가하고, 전투가 끝난 후엔 아자이 가문의 가신 이소노 카즈마사가 수비하는 사와야마성 공격에도 참가한다.

1572년 1월에 미노 이와무라 성의 성주로 노부나가의 연척인 토오야마 카게토가 자식이 없는 채로 병사하자 노부나가의 명에 따라 파견되어 보마루(오다 카츠나가)를 토오야마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게 했으며, 이후 돌아갔다가 10월에 이와무라 성이 아키야마 노부토모의 공격을 받자 원군으로 파견되었지만 패배하여 보마루는 카이에 인질로 보내졌다.

1574년에 오다 노부타다의 보좌역을 맡아 코우노 성의 수비를 맡았으며, 노부타다를 따라 다케다 군을 공격할때는 노부나가로부터 노부타다와 선봉을 맡은 모리 나가요시, 단 타다마사 등 나이 어린 무장들이 젊은 혈기로 인한 경거 망동을 하지 못하도록 이들을 억제할 것을 요구 받았다고 한다.

1575년 5월의 나가시노 전투에도 노부타다의 보좌로 참전했다가 노부타다를 대신해 군을 지휘했으며, 11월에 노부타다가 이와무라 성을 함락하자 노부나가의 명으로 병사들을 처형하면서 붙잡은 아키야마 노부토모와 오츠야노카타를 인질로 보냈다. 이 때의 공로로 이와무라성과 5만석의 영지를 받았다.

1579년 아라키 무라시게가 셋츠(摂津) 아리오카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노부타다 휘하로 참전해 무공을 세운다.

1582년 2월 오다군의 고슈정벌에서는 총대장 오다 노부타다의 휘하에 편제되어 다케다 가문을 멸망에 큰 활약을 했다. 같은 해 3월 노부나가가 다케다 가문의 가신 아나야마 바이세츠에게 영지안도를 약속했기에 카와치 아나야마 바이세츠령을 제외한 카이(甲斐国) 22만석과, 시나노국(信濃国)의 스와군(諏訪郡)을 영지로 받는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고, 이 소식을 접한 동료 모리 나가요시등은 미노로 귀환했지만, 히데타카는 카이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에 카이를 노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타카를 미노로 돌려 보내려고 사신으로 혼다 노부토시를 보냈지만 히데타카는 미노로의 귀환을 거부한채 사신으로 온 노부토시를 살해했다. 이후 이에야스가 선동해 일어난 잇키가 발생해 카이에서 도망치다가 멸망한 다케다 가문의 신하였던 미츠이 야이치로에게 6월 18일에 이와쿠보에서 살해되었다. 향년 56세.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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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라 2에서는 4번째 스테이지 첫번째 중간보스로 등장. 검격이 화면 최하단까지 닿기 때문에[1] 좌우로 재빠르게 피해야 한다.
  1. 1~2스테이지의 해당 메카의 검격은 화면 최하단까지는 닿지 않기 때문에 최하단에 붙어 있으면 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