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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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스칸디나비아와 잉글랜드의 대왕

역대 잉글랜드 국왕
웨식스 왕조덴마크 왕조덴마크 왕조
에드먼드 2세크누트 대왕해럴드 1세


Cnut[1] the great, 혹은 Canute.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의 왕.
995년? ~ 1035년 11월 12일.


북해 제국이라 불리기도한 그의 영토. 붉은색이 직할영토이며 주황색은 조공국, 노란색은 동맹국이다.

덴마크의 왕 스벤 포크발드의 차남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 정복전에서 맹렬히 활약하였다. 101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1015년에 옛 덴마크 바이킹이 상당부분을 지배했던것을 명분으로 잉글랜드를 다시 공격하여 에드먼드 2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손에 넣는다. 뒤를 이어 형 하랄 2세가 사망하자 덴마크의 왕위도 겸직 하였으며, 그 뒤에, 1028년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일부, 스코틀랜드의 일부도 정복한다. 이로서 당대에 영국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걸쳐있고 북해마레 노스트룸[2]으로 삼다시피 한 스칸디나비아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1035년 크누트가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제국은 분열하여 당대에 그치고 말았다. 그의 아들인 하레크누드는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왕위는 물려받는데 성공한다.

1.1 빈란드 사가에서의 모습

실존인물로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스벤왕의 차남이자 덴마크 제 2왕자. 래그널이 양육을 전담했으며 바이킹들의 왕인 덴마크왕의 자식답지 않게 여리고 소심하게 자랐다. 적어도 왕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덴마크 제 2왕위계승권을 가진 그의 존재자체가 덴마크의 국론을 분열시켰으며 이 때문에 부왕인 스벤왕은 크누트보다 더 왕위에 어울리는 장남 해럴드의 후계구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차남인 크누트를 제거하려 한다. 이때문에 승부가 나지 않는 런던공략의 지휘관으로 임명,

4천의 군세를 맡겼으나 이 군대는 토르켈 부대에 의해 괴멸되었고 크누트는 후견인인 래그널과 가정교사인 빌바르도 신부와 함께 포로가 된다. 이후 그의 신병을 둘러싸고 각자 목적을 가진 세력들의 다툼에 휘말려 들지만 이와중에 각성, 진정한 왕족으로 거듭나 오히려 자신을 서로 갖기 위해 다투는 두 세력[3]을 모두 자신의 휘하에 거두고는 부왕을 찾아가 옥좌를 원하고 있음을 대놓고 도발한다.

아셰라드의 계책[4]에 의해 부왕 사후 잉글랜드 통치대행을 선언하며 군권을 장악, 3년만에 잉글랜드 정복을 완료한다.

덤으로 아셰라드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자신에게 칼을 휘둘러 뺨에 상처를 남긴 토르핀 카를세프니를 노예로 파는 것으로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원래는 왕자 살해미수죄[5]로 바로 죽일 수도 있고 갖은 고문 끝에 공개처형을 당할만한 상황에서.

이후의 행보는, 반대 세력에 대한 잔혹한 숙청과 원정을 다니면서, 이전의 유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는 냉혹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며, 왕권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자신에게 반대하지 않거나 항복하는 자에게는 관용을 베풀지만, 반항하는 자에게는 가차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득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도 가차없이 제거한다. 자신에게 열심히 충성한 케틸의 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어거지 누명을 씌워 제거하려던 걸 봐도 알 수 있다.

참고로 크누트를 죽은 척하려는 작전을 짤 때 그의 외모가 여성스러워서 그를 닮은 여자 노예를 이용했다.하지만 3년이 지났을 때 모습은 짧은 머리에 수염을 길러서 여성스러운 면이 확 사라졌다 .그래도 우락부락한 다른 노르드 남성과 비교하면 충분히 여성적이다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갈고 닦아서 케틸의 아들인 토르길같은 강력한 전사의 기습공격도 막아낼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토르길이 왕의 친위기사단 10여명을 홀로 베어버릴 정도의 강자인 점을 고려하면 크누트의 실력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1.1.1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그에 따른 각성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왕다운 모습의 인격을 각성하는 부분이 좀 난해한데, 사실 깊이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일단 기독교적 관점에서 사랑이란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입장을 내 입장과 같은 가치를 갖고 대하는 것'이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이 어째서 가치있는 가르침인가 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어서,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여 입장이 다른 상대를 만났을 때 힘과 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들게 마련이다. 희소한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싸움은 비효율과 비극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관련된 모든 사람을 매우 불행하게 만든다. 크누트가 보는 세상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 그 자체로써, 끝없이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모든 상황에서 힘을 통한 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으며, 모두가 각자의 이득을 추구한다.
'사랑'은 이러한 싸움을 피하기 위한 매우 효율적인 대안이다. 상대가 나의 득실을 존중해주고 또한 내가 상대의 득실을 존중한다는 상호 신뢰가 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싸우기보단 협력하여 더 나은 대안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죄수의 딜레마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회 전체 규모에서 실현된다면 사회는 끝없는 파괴 대신 끝없는 번영을 이루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작중에서 크누트 왕자와 빌바르도 신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차별없이 싸우거나 빼앗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하나를 사랑하여 그를 위해 다른 것을 짓밟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무생물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다시말해, 인간은 차별은 가능하지만 사랑은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끝없이 서로 싸우고 빼앗는다. 그래서 그가 본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크나큰 비극이므로, 크누트 왕자는 모든 싸움에서 이겨 절대자로써의 힘을 갖춤으로써 무의미한 싸움의 종결을 강제하고자 마음먹는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지상 낙원의 실현이다.

하지만 만화내에서 너무 간략하게 설명하였고 무엇보다 그 후 크누트가 자신의 지상낙원을 이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모략과 권모술수들에 의해서 그 자신도 점점 피곤하고 힘들어지는 상태. 자신의 형을 독살하였고 사람들을 죽이면서 흔들림없는 모습을 겉으로는 보였지만 내면으로서는 점점 썩어가고 있었다. 그라다가 자신과는 다른 형식으로 떠나는 토르핀을 보며 다시 한 번 시원하게 웃는다. 이후 잉글랜드에 주둔 중인 덴마크 군을 일부만 남기고 해산, 올바른 통치를 하면서 잉글랜드 인으로부터도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아 충성을 받게 된다. [6]

2 북극곰 K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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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크누트/knut2.jpg

탄생 : 2006년 12월 5일
사망 : 2011년 3월 19일

2.1 탄생

독일 베를린 동물원에서 태어나고 사망한 북극곰. 어미곰 토스카가 베를린 동물원에서 낳은 2마리의 새끼 가운데 한 마리로, 미숙하게 태어났기 때문인지 어미곰이 돌보지 않아 크누트와 같이 태어난 형제는 생을 마감하지만 크누트는 사육사 토마스 되르플라인이 어렵게 돌보고 키워서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

2007년 3월 초, 독일의 동물 권익 보호 운동가 프랑크 알브레히트는 크누트를 인간이 길러서는 안되고, 안락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헨 동물원의 책임자 볼프람 그라프 루돌프(Wolfram Graf-Rudolf)도 ‘어미가 버린 새끼는 죽도록 두는 것이 옳고, 베를린 동물원 측도 강단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하였다. 알브레히트는 2006년에 라이프치히 동물원이 부모가 버린 어미 느림보곰이 안락사 되는 것을 막으려고 재판을 걸었으나 이와 같은 이유로 법원에서 안락사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했으며, 나중에 자신이 정말 크누트를 죽이려 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여기에 놀란 여러 아이들이 몰려들어서 동물원 앞에서 크누트를 죽이지 말라고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을 듣고 크누트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편지와 e메일이 베를린 동물원에 몰려들었다. 마침내 베를린 동물원은 크누트를 계속 보호하겠다고 선언하였다.

2.2 일반에 공개

2007년 3월 23일, 크누트는 일반에 공개되었다. 크누트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400명의 기자가 크누트를 취재하려고 몰려들었고, 크누트를 소재로 하여 무수히 많은 장난감, 영상, 책이 발매되었다. 베를린 동물원은 2007년 30%나 증가한 500만 유로의 입장 수익을 얻었는데 이는 동물원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이었다.

크누트는 무럭무럭 자라서 생후 7개월이 된 2007년 7월에는 몸무게가 50kg이 되었다. 11월에는 90kg이 되었고, 대중에 공개된지 1년이 지나자 130kg까지 성장하였다.

2008년에는 크누트의 사육을 담당했던 토마스 되르플라인이 크누트의 장난으로 부상을 입고 안전상의 이유로 크누트와 격리되자 우울증 증세를 보이다가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했다. 부모처럼 따르던 토마스가 죽자 크누트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자 아무래도 어릴 때 만큼 귀여움이 없다보니(그래도 어릴 때 모습이 많이 남았다.) 서서히 크누트의 인기도 떨어졌다. 다소 우울증에 시달리는 듯 하다는 견해, 그리고 크누트는 어릴 때부터 인간의 손길을 탓기 때문인지 같은 동물원에 있는 다른 북극곰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2.3 사망

생후 4년이 된 2011년 3월 19일, 크누트는 왼쪽 다리를 떨며 경련하다가 힘 없이 동물원의 물 속으로 떨어졌으며 그 뒤 시체가 연못 위에 떠오른 모습을 본 600~700명 가량의 관람객들이 크누트의 죽음을 목격하였다.

4월 1일, 병리학 전문가의 검사 결과 크누트는 이전부터 바이러스 성 뇌염을 앓고 있었으며, 뇌염으로 뇌 기능에 이상이 생긴 상태에서 물에 빠져서 익사를 하게 된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크누트는 뇌염 때문에 익사하지 않았더라도 오래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크누트의 돌연사를 슬퍼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베를린 동물원에 몰려들어 꽃다발을 남겼다.
  1. 덴마크어로는 Knud,노르웨이어/스웨덴어로는 Knut
  2. '우리들의 바다'라는 뜻의 라틴어
  3. 이래봤자 아셰라드쪽은 내분으로 자멸.
  4. 처음부터 스벤왕의 암살을 계획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때를 기다리다가 스벤왕이 자신을 궁지로 몰자 미친척하고 직접 스벤왕을 죽인뒤 크누트에게 죽임을 당해 크누트의 왕위계승에 더욱 명분을 실어준다.
  5. 그것도 직전에 국왕이 살해당한 바로 그 현장에서다.
  6. 원래 크누트 왕이 많은 군대를 데려온 것은 잉글랜드 인들을 찍어누르기 위해서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이로 인해 오히려 잉글랜드 인들은 크누트 왕을 침략자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크누트 왕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케틸같은 유력한 부자들을 꼬투리를 잡아 턴 다음 그 재산을 몰수하는 식의 방법을 사용하려고 했었다. 즉, 부자들을 털어서 군사비를 충당하고 거기에 본보기를 보이겠다는 일석이조(?)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르핀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군대를 해산하고 그만큼 세금을 낮추게 되자 오히려 잉글랜드 인들에게 환영을 받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