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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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자로는 片과 扁이 있다. 절강(浙江) 편(片)씨는 명 신종 만력제 때 임진왜란 조-명 연합군으로 활약한 편갈송 장군을 시조로 한다. 편씨는 편갈송의 고조 대에 명나라 영종 정통제에게 받은 사성으로, 본래 당나라 종친의 성인 이 씨였으나 편갈송의 고조대에 충절을 높이 산 황제가 일편단심 중 '편'을 성으로 내렸다.# 이후 큰아들 편일이 절강백으로 봉해져 본관도 절강으로 삼게 되었다. 편갈송 장군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 때도 조선에 파견되어 원군으로 활약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간신 정응태의 모함을 받아 일단 황제가 만력제다 경주 금오산에 정착하게 되고 세 아들도 모두 넘어오면서 중국이 아닌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원군으로 처음 조선과 인연을 맺은 까닭인지 병자호란, 일제식민지 시기에도 이 성씨들은 의병, 독립운동가로 활약한다.

扁씨는 유래 불명으로, 본관은 희천 편씨 하나다.

2 유명인

편(片)씨 성을 쓰는 유명인으로는 가수 편승엽, 편덕화, 소설가 편혜영, 만화가 편현아, 기자/앵커 편상욱, 독립운동가 (의성단 단장) 편강렬 등이 있다.

그 외 이 곳 참조.

3 그 외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공을 세워 선조(宣祖)의 친서를 받고 조선에 머물며 쓴 편갈송의 시(詩)

우연히 처음으로 발디딘 이 땅, 해 돋는 동해가 바로 저긴데

끝없이 일렁이는 큰물결 작은 파도 억겁의 세월에 밀려왔는가
서북쪽엔 산들이 줄을 이으니 하늘 끝이 여기인가 의심스럽고
동남으론 바닷물이 하도 높으니 땅덩이가 그 위에 떠있는 것 같으이

편갈송이 조선인과 의병들을 얼마나 애절하게 생각했는지는 <마자수(압록강의 옛말)의 별이 되어>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편갈송 장군은 평양성(平壤城)전주성(全州城)을 되찾고 울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탈환하는 등 활약을 펼쳤다. 정유재란은 직산(소사평)전투 승리로 종결. 충청도 직산면 소사평에 세워진 <흠치 병부상서 총독 제군문문 편갈송 승첩비 1597년> 등 조선에 있던 조명 연합군의 승첩비는 안타깝게도 일제(日帝)가 모조리 뽑아 버렸다
.
남송(南宋) 때 주자학(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의 청년 시절부터 10년간 스승인, 현유(賢儒)이통(李侗,이연평1093~ 1163)의 8대손 이지(李址)가 명나라에서 태자태사를 역임. <<편갈송의 고조 할아버지
이통과 朱子(주희)의 7년간의 대화와 서신을 기록한 연평답문(延平答問)은 위대한 고전으로 남아있다. 朱子(주자)는 돌아가신 스승 李侗(이통,연평선생)을 죽림정사에 모시고 배향함. 나중에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된다. "연평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 처참한 심정이 되었고, 나의 깨달음을 연평(이통) 선생에게 묻지 못함이 한이 된다"(朱子)

당시 한국의 정신적 지향점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는, 역대 인물의 사적을 모아놓은 책인 <今古實記 1905년(광무 9)규장각>의 충훈(忠勳)에 편갈송(片碣頌)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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