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한일병탄에서 넘어옴)

위 동영상은 대한제국 국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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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과정
1904년 2월 23일한일의정서상호방위조약을 통한 대한제국의 군사적으로 보호
1904년 8월 22일제1차 한일협약고문을 두어 내정에 간섭
1905년 11월 17일을사조약통감부 설치, 외교권 박탈
1907년 7월 24일정미 7조약통감의 행정권 감독, 군대 해산
1909년 7월 12일기유각서사법권과 교도행정권 일본에 위탁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한국병합
한국 황제 폐하와 더불어 이 사태를 보고 한국을 들어서 일본제국강제병합하여 이로써 시세의 요구에 응함이 부득이한 것이 있음을 생각하여 이에 영구히 한국을 제국에 병합케 한다.한국 황제 폐하 및 그 황실 각원(各員)은 병합 후라도 상당한 예우를 받을 것이며,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며, 산업 및 무역은 평온한 통치 아래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기에 이를 것이니, 동양의 평화가 이에 의하여 더욱 그 기초를 공고하게 함이 짐이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바이다."

- 메이지 덴노의 조서, 1910년 8월 29일.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 승정원일기 마지막 날 기사, "한국의 통치권을 일황에게 양여한다는 칙유를 내렸다", 1910년 8월 29일

1 개요

庚戌國恥

2016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6주기[2]가 되는 날이다.

1910년(경술년) 8월 29일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

실제로는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일본 측에서 일주일 동안 발표를 안하고 있다가, 8월 29일에 순종황제의 조칙 형태로 발표를 했다. 그러나 조약 자체에 황제의 비준절차가 빠졌으므로 무효다. 게다가 8월 29일 발표된 조칙에 찍힌 옥새도 당시 재위 중이던 순종 황제의 대한 제국 옥새가 아니라 이미 퇴위하여 제국의 의사를 대표할 수 없는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혀있었으며 순종 황제의 서명조차도 없었다.

이처럼 조약의 법적 요건이 성립되어 있지 않으므로 무효다. 그 이후로, 벌어진 일은 모두 효력이 없는 조약을 근거로 일본이 강제점령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 2차)한일병합조약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명백한 일본령으로 만든 것뿐이지, 별도의 작업들은 이미 끝나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1907년 정미조약으로 군대 해산, 1909년에는 경찰권과 사법권을 박탈당했다. 1909년 기준 대한 제국은 명목상으로만 독립국일뿐, 사실상 일본의 속령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부터 8.15 광복까지, 지도상에 한국/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완전히 사라졌었다.

한반도는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인 일본제국령 조선이 되었고 국민은 착취와 차별에 시달리는 노예나 다름없는 식민지가 되었고, 우리의 문화재와 자원은 약탈당하였고, 우리의 이름도 빼앗겼고,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말, 이처럼, 더 나아가서 당시대에 살던 우리 국민의 미래도 빼앗겼다. 그렇게, 일본제국은 한민족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와 우리의 국가인 애국가도 금기물 또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사용할 수도 없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또한 조선의 500년 왕도(王都)이자 황도였던 한성도 한성부에서 경기도 경성부로 격하되면서 일제의 억지로 경기도 관할지역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경기도에서 분리독립되어서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면서 국가 수도의 지위를 되찾는다.

519년을 유지한 조선왕조의 멸망이자,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국제적으로는 일본 제국식민지이자 속령지였기 때문에 일본제국령 조선(日本帝國領 朝鮮) 또는 일본령 조선(日本領 朝鮮)이라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지역으로 격하되어 분류되기도 하였다.

영문으로는 흔히 Korea under Japanese rule(일본 통치하 조선) 혹은 Korean Dependency of the Japanese Empire(일본제국 속령 조선)로 불린다.

2 명칭과 관련하여

한국에서는 국권피탈, 경술왜란, 한일합방, 한일합병, 경술국치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일한병합(日韓倂合)이라고 부른다. 원래 일본은 '병탄(倂呑)'이란 말을 쓸까도 했지만, 힘이 센 한 쪽이 다른 쪽을 아울러 버린다는 의미가 한국인의 반발을 사서 저항을 불러 일으킬까봐 '병합'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침략의미를 흐린 것.##2 현재 국어사전에는 병합=합병≒합방이라고 되어 있다. 합병은 둘 이상의 단체, 조직, 국가를 합치는 것, 합방은 둘 이상의 국가를 합치는 것.

이걸 한국에서 '합방'이라는,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다는 의미를 가진 말로 바꿔서 부르는 건 한국이 일본과 합치는 것을 원했다(...)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의미까지 가질 수 있지만, 사실 별로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애초부터 일본은 한국을 동등한 관계로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 그럴지도... 그냥 국치로 쓰는 것이 낫다. 아니면 강제병합이라고 하던지... 강제로 병합시킨게 맞다.

조약의 공식 명칭은 일본의 이러한 의지가 반영되어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이다.

3 대한제국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

경술년(1910년) 8월 22일에 일본의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대한제국의 친일파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이 조약이 1주일이 경과된 이날 공표됨에 따라 순종황제의 조칙이 발표되어 8월 29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멸망한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충신은 있어서, 학부대신 이용직은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라고 반대하면서 뛰쳐나갔다. 맹꽁이 서당에서는 이용직이 나가기 전 나는 일당처럼 길거리에서 칼에 찔리고 싶지는 않다며 어느 견공자제분을 디스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8.15 광복까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배 아래 35년간[3] 한국인일본인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 일본에 협조한 천하의 개쌍놈들의 명단은 경술국적 항목을 참고.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일진회의 "자발적 병합" 주장에는 반대했다. 일진회에게 한국을 바치는 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그리고 일진회의 주장보다 더 가혹한 내용의 조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이완용을 비롯한 일진회는 일제가 주는 오등작을 받았다.

이미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총독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계획서를 가지고 입국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 생전에 이미 정해져 있던 것...

일본근대사(혹은 현대사)에서는 이 시점이 러일전쟁과 함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본다. 이 점에서 경술국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신호탄이자 동시에 필연적인 멸망을 부르는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4 한일병합조약 전문

한일병합조약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 황제 폐하일본국 황제 폐하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합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

*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받도록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의 조항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손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은사금의 줄임말)을 준다.

* 일본국 정부는 앞에 지적된 병합의 결과 전 한국의 통치를 담당하며 이 땅에서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변과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주는 동시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 일본국 정부는 성의있게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의 결재를 받을 것이니 공포하는 날로부터 이 조약을 실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두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이름을 쓰고 조인한다.

5 기타

일본에서도 안중근의 의거가 워낙 유명한 고로,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합병 반대파였으며 안중근의 의거 때문에 대한제국이 합병을 자초하였다는 의견이 매우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일본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3개월 전인 1909년 7월이미 대한제국의 합병을 의결한 상태였다.

주러 공사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인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국권피탈의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 매 자결하였으며[4] 그 외에도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 등 많은 선비들이 자결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 때와는 달리 현직 고위 관료 중 자결한 이는 없었다.

한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고 한다. # 이는 이미 을사조약, 군대해산, 고종퇴위 등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다들 체념한 상황이란 분석이 있다. 을사조약 체결 시에는 온 나라가 뒤집혔고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는 유생들의 기록이 있다.

여담이지만 2009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경술국치 100년 기념으로 일본의 덴노를 국내에 초대한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일부 사람들이 '기념'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데, 사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기념은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닌 뜻깊은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라는 긍정이나 부정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은 단어이다. 당장 전쟁기념관이나 6.25 전쟁 OO주년 기념식같은 명칭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당연한 거지만 긍정적인 일 등에 쓰이는 비율이 압도적이라 착각하는 사항.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일왕 사과 요구로 한일관계가 최악이 된 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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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을 경술국치가 일어난 날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를 찍은 사진이라고 알고 있다. 한때 본 항목에도 그러한 설명과 함께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이 사진은 경술국치 때 찍힌 사진이 아니다.# 링크된 글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 사진은 1915년 10월 1일 조선물산공진회의 개막식날 행사용으로 섭외한 비행기를 담은 사진이다. 동아일보가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이란 책을 내면서 이 사진을 경술국치 때의 사진이라고 소개하고, 또 그 뒤로 비행기가 찍힌 부분을 잘라낸 사진이 여기저기 실리면서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6 병탄 전후 일본의 움직임

6.1 행정

일본은 1909년 7월의 각의에서 대한제국 병합을 방침으로 잡은 이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선 건강상으로 골골거리던 통감 소네 아라스케를 대체해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했으며 부통감직을 신설하여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임명했다.

이 들이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조선을 통치할 엘리트 관료들의 모집이었다. 한일합방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얻는 일본은 즉각 대한제국의 관청과 통감부 조직들을 개편하여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이 흡수, 통합, 폐지되었고 1,434명의 직원들이 해고되었다.

한국인 고등관들은 모조리 해고되었고 각 도관찰사들도 6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당연히 빈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이 중엔 전 대만총독인 고마다 겐타로 밑에서 대만 통치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의 실무경력도 경력이었지만 고마다가 데라우치와 동향 사람이라 같은 파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후일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무능하단 이유로 내쫓긴 인물들로 인맥, 지연, 학연을 통해 등용된 무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이후 야마모토 내각은 조선의 개발을 위해 감찰관으로 내무성 지방국장 고바시 이치타를 파견했는데 그는 일본인 도장관들이 지극히 무능하고 상당수가 대장성 출신이라 이들 밑에선 조선이 개발되지 않을 것이라 혹평했다. 겨우 남은 한국인 장관들도 실질적으론 허수아비라서 밑의 내무부장, 재무부장이 모든 일을 담당했고 이에 괜히 한국인 장관들의 기분만 상할 판이니 한국인 도장관을 전폐하잔 주장이 제기되었다.

6.2 구 대한제국 황실

대한제국 황실은 황제국의 직위를 박탈당하고[5] 황제도 이왕이라는 봉호로 강등돼 일본 황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기존의 황족들은 일본 화족에 편입됐고 일제에 적극 협력한 기존 지배층들은 조선 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순종을 이용했다. 특히 재위 시절 나라를 강탈 당한 순종은 한국의 역대 군주 중에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6]

일제는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일국의 군주로서 대접을 해주었다. 일제는 경성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911년 정초와 고종의 탄신일에는 학생들이 대한문 앞에 모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원칙적으로 안되는 일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눈감아주었다. 또한 구황실에 막대한 세비도 지급되어 1911년에만 150만 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고, 고종과 순종에게 당구, 담배, 영화 등의 취미 생활을 제공하는가 하면 영친왕의 일본 생활에 대한 영상물을 찍어 보여주기도 했다.

1917년 함흥 순행도 눈여겨볼만한데 이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기도 해서 일부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 의례를 지내는 순종도 황제의 복식을 갖추었다. 일본 군함을 타고 도쿄까지 행행한 것은 여러모로 당시 조선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많은 구황족들이 적극적으로 대일항전에 동참하지 않고[7] 일제가 제공한 지위에 안주하거나 몇몇은 적극적으로 부역하기도 했다. 결국 이에 대한 자업자득으로 한국인들이 황실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 떨어졌고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근왕주의자 세력은 빠르게 소멸하고 현대에도 대한제국 황실 복원이 헛소리로 치부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당시에 대한제국 황실이 할 수 있는게 애초에 없었다. 고종의 비자금도 러시아와 일제에 의해 행방이 모연해 졌기 때문에 독립 자금을 굴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제가 주는 구황실 지원금을 대놓고 독립 자금으로 썼다간(...) 그리고 대한제국 황실이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들 당시 선진 지식인들은 대부분 공화정을 지향하자는 추세였다. 대표적으로 신한청년당이 발표한 대동단결선언문만 봐도 "융희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 29일은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날로서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한 날입니다. ... 또한 대한제국 최후의 날이 신한국이 처음 시작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했다.

더욱이 1920년대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때에는 지식인들 중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도 많았으니 제정 복고는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구한 말에 공화주의자로 취급되어 투옥된 전력이 있다.
  1. 노래가 꽤나 처량해서, 듣다 보면 그야말로 망국의 한이 느껴진다.
  2. 본래는 '주년'이라고 해야하지만 한국사 기준으로 볼 때 '주기'가 알맞는 말이긴 하다.
  3. 흔히 알려진 36년은 햇수만을 계산한 것이고, 실제로는 만 35년에서 정확히 1주일 부족하다. 한국 나이가 외국 나이와 달리 살아온 햇수가 아니라 연차인 것처럼 36년 차라는 의미로 36년이라는 표현을 '한국에서만' 쓰는데 역사학적 관점으로 옳지 않다. 1910년 8월 ~ 1945년 8월, 월까지 딱 맞는 명백한 35년이다. 거기다가 엄밀히 말해 실제 35년도 안 되는 걸 34년이라고는 못하더라도 36년이라고 불려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단 혐일, 반일 감정이 강한 사람들 중 일부가 일본이 천하의 개쌍놈이라는 것을 더 부각시키려고 일부러 알면서도 햇수를 더 늘려보려고 하는 언플의 의도는 있다.
  4. 아이러니하게도 홍명희의 할아버지이자 홍범식의 아버지 홍승목은 친일파로서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5. 칭호도 다시 대한제국 이전 때처럼 폐하전하, 태자세자 식으로 제후의 격으로 격하되었다.
  6. 1917년의 함흥 순행은 병환으로 몸져 누워 있는 순종을 억지로 끌어 내리다시피 행해졌다.
  7. 소극적으로 저항한 사례는 종종 있었으나 소극적이었던 만큼 이후 역사에 큰 의미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