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질

조선의 실학자 <a href="/w/박지원">박지원</a>의 소설에 대해서는 호질(소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위서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서막호질왕창왕기

胡質
(?~250)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문덕(文德). 호민의 아들.

삼국지명탐정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데, 두 번이나 살인 사건에 대한 송사를 해결할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다.

1.1 정사

초국 수춘현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장제, 주적과 함께 이름을 알렸는데, 후에 장제가 등용되자 조조는 장제에게 호민은 장자인데도 어째서 아들이 없냐고 했다. 이 때 장제가 호민에게는 호질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자 조조가 즉시 불러 돈구현의 현령이 되었다.

이 때 곽정이라는 사람이 사촌 누나와 사통하고 아버지 정타를 살해하자 군리 풍량이 투옥시키고 고문하는데, 곽정과 사촌 누이는 채찍을 맞으면서도 견뎌내 사실을 은폐하려고 저항하자 거꾸로 풍량이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백을 해 곽정의 죄를 뒤집어 쓰게 된다. 호질은 관직에 오르자 그의 표정과 태도를 보고 그 사실을 상세하게 조사하면서 검증해 사실을 모두 밝혀냈다.

후에 중앙에서 그를 승상동조의령사가 임명하지만 장료는 그를 치중으로 삼기를 청해 온회를 보내어 호질을 설득하게 했지만 호질은 자신의 호군 무주가 장료와 사이가 벌어진 것을 해결할 생각으로 병을 핑계로 온회의 설득을 사양하니 장료는 직접 가서 호질에게 말한다.

나는 그대에게 마음을 의탁하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무고한가요?

호질이 대답하길

옛 사람의 사귐에는 많이 취하더라도 탐욕스런 마음이 없음을 알았고, 전쟁터에서 달아났어도 그가 겂이 없음을 알았으며 떠도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으므로 사귐은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무주라는 사람은 바른 인물로서 과거에는 장군이 그를 일컬어 칭찬함이 끊임이 없었으나, 지금은 노여운 눈으로 서로 바라보는 한이 있어서 곧 싫어하고 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저는 재능이 적은데, 어떻게 좋은 관계를 끝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장료는 그의 말에 감동해 다시 무주와 친하게 되었다.

후에 조조는 호질을 초빙해 승상속관으로 삼았으며, 황초 연간[1]에 이부랑으로 옮겼다가 상산태수가 되었다. 상산태수에서 동완태수로 전임되었으며, 이 때 선비 노현이 다른 사람에게 피살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호질이 말하길

이 사람은 원수가 없고 나이 어린 아내만 있는데, 이것은 그가 죽은 까닭입니다!

그 말에 노현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나이 어린 사람을 모두 살펴봤는데, 서리 이약이 심문당하자 얼굴색이 변하였으므로 구체적 상황을 그에게 캐묻자 이약은 즉시 자수해 투옥되었다.

228년에는 조휴가 주방에게 속아 진군할 때 가규의 지휘 하에 서양에서 동관으로 진출하지만 패배했다. 호질은 군공에 따라 상을 받는 날에는 모두 무리에게 나누어 주고 집으로 가져가는 일이 없었다고 해 군에서 9년 동안 재직할 동안 관리와 백성들이 편안했고, 장사들도 명령에 복종하였다.

조방이 즉위하자 형주자사로 승진해 옮겼고 진위장군을 더하면서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으며, 237년에 주연이 손륜, 여거, 주이를 이끌고 강하를 포위하자 다른 사람들이 적의 세력이 너무 강대해 말렸지만 호질은 번성은 지세가 낮고 병력도 적으므로 마땅히 군대를 진격시켜 그 외곽에서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경무장한 군사만으로 원군으로 가니 주연은 퇴각한다. 이 공으로 그는 정동장군으로 승진하면서 가절도독청서제군사로 임명[2]되었으며, 242년에도 주연과 싸워 포충과 함께 오직 8백명의 군사만이 있는 주연군의 본진을 공격해 공을 세울 기회를 잡았으나 이번에는 오히려 주연의 분전에 패배한다.

농업을 넓히고 곡식을 비축해 몇 년 동안에 양식을 저장하면서 동정대를 건축하고, 또 밭에서 세금을 거두어 변방을 수비했다. 그는 여러 군에 이르는 수로를 개통시켜 배가 왕래하는 데 편리하게 했고, 엄격히 설비하면서 적을 기다리니 해변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호질은 성품이 침착하면서 성실하고 안으로 성찰해 그 자신의 절조로써 다른 사람을 시험하지 않아 그가 재임한 곳은 모두 그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250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집에 남아있는 재산이 없고 단지 하사받은 의복과 서적 상자만 있을 뿐이니 군사는 이러한 상황을 듣고서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양릉정후로 승진시켜 추봉하고, 식읍 1백 호를 주면서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아들 호위가 뒤를 이었으며, 254년에 청순하고 절의있는 인물들을 추모할 때 호질도 추모되었다. 또 조서를 내려 호질의 청아한 행동을 기려 서술하고 그의 집에 돈과 양식을 하사했다.

1.2 평가

진수가 평하길 평소하는 일이 바르고 순수했으며, 지방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아 사람들에게 칭송되는 빛나는 공적을 남기니 국가의 훌륭한 신하로 당시의 걸출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1.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동완태수로, 오의 주방이 조휴를 석정으로 속여 꾀어내었을 때, 가규의 지휘하에서 만총과 함께 유수로 군사를 진군시켰다. 그리고 조휴와 함께 패배하는 역할로 나온다.

1.4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무력을 제외한 능력치가 70대의 만능형.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5/31/66/76. 제사, 누선, 혼란을 가지고 있다. 단 수군계 병법 숙련도는 0.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3/50/75/79/72에 특기는 농업,기술,치안,진정,혼란,지리 6개. 통솔이 73이긴 해도 전투에서 써먹긴 특기가 애매하니 후방에서 내정셔틀이나 태수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삼국지 12에서는 훈남다운 외모로 등장. 매력의 삭제로 능력치는 더 올라가서 무력을 제외한 능력치는 정치 80 나머지 능력치는 70대 중반에 가깝다. 근데 전법이 잉여스러운 전군속공.

2 후한 말의 인물

扈質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해서와 회포 등 두 현에서 도적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도위 위미, 현령 양습이 밤에 서선의 집으로 도망치면서 그들을 호송해 죽음을 면해주도록 한 상황이었는데, 독군 호질에게 조조가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토벌하도록 했지만 병력이 나아가지 않았다. 호질은 서선이 몰래 찾아오면서 책망을 받으면서 형세를 들었으며, 곧 진군해서 적을 무찔러 반란을 토벌했다.

조조가 토벌군으로 파견한 호질을 도와준 서선은 조조에게 인정받아 사공연속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양습이 해서 현령으로 일어났을 때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양습은 임지들을 잘 다스려서 명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호질이 토벌한 저 반란에 대한 기록이 매우 짧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 원인이 돼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1. 220 ~ 227년이다.
  2. 주연전과 주환전에 따르면 241년으로 배송지는 237년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