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전투

黃山벌 戰鬪

혹시 황산 대첩을(를) 찾아오셨나요?

600px
황산벌 전투 기록화
황산벌 전투
날짜
660년 7월 9일 ~ 10일
장소
황산벌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백제군신라군
지휘관계백
충상(忠常)
상영(常永)
(그외 미상)
김유신(金庾信)
김흠순(金欽純)
김품일(金品日)
김관창
김반굴
(그외 미상)
병력5,00050,000
피해 규모20여명 포로, 나머지 전멸불명
결과
백제군의 전멸, 신라군의 승리
기타
백제 멸망

1 소개

한국판 300

660년 음력 7월 9일 ~ 10일 황산벌(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백제신라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하고 백제 주력군이 당나라군의 상륙을 저지하는데 실패하면서 사비성이 포위함락당해 백제는 멸망한다.

2 내분

660년 당군이 덕물도상륙하면서 나당 연합군의 본격적인 백제 공격이 시작된다. 백제 조정의 전략은 성충, 흥수의 말대로 기벌포와 탄현에서 당, 신라군을 동시에 모두 저지하려는 전략과 당의 상륙을 허용하지만 좁은 길목에서 당군에게 공세를 가하려는 전략이 맞서게 된다. 백제 조정은 성충과 흥수의 1안 대신, 신라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한편, 기벌포에 상륙해서 백강을 거슬러오르는 당군을 요격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성충과 흥수의 1안은 단순한 전략적 판단 외에,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기존 귀족세력과 화합하여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맞서자는 의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백제 왕실과 귀족 세력은 극도로 깊은 골이 파여있었고, 이 상황에서 재결합하기 위해서는 백제 왕실로서도 파격적인 양보가 필요했으므로 이러한 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1안과 2안 모두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하거나 최소한 지연시키는 것을 기본적인 전략으로 삼고 있으며, 백강에서 당군을 요격한다 해도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하려면 최소한 탄현 근처에서 신라군을 저지했어야하므로, [1] 백제의 기민한 초기 대응이 이뤄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벌판에서 싸웠다? - 평야가 아닌 산성

300px
300px

결국 김유신 휘하 신라군 5만[2]이 탄현[3]을 넘어 충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자 백제 조정은 달솔 계백, 상영과 좌평 충상에게 5천명[4]의 군사를 주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저지하게 한다...그런데 말이 황산벌이지, 실제 계백은 산 위에 진을 치고 싸웠다. 상식적으로도 10배가 넘는 적과 허허벌판에서 교전하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포위되서 붕괴해버릴것이다. 이는 손자병법에도 잘 나와 있는데, 적보다 열배의 병력 열세일 때 취해야 할 행동으로는 일단 튀어라(...) 라고 적혀있다.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손자도 예상했던 모양인지, 약한 군대가 제 분수를 모르고 이런 상황에서 결전을 하겠다고 나서면 좆됨이라고 친절히 적혀있다. 이걸 계백이 몰랐을 리 없으나 그는 전투를 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지보단 야트막한 산이나마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잡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5]

그래서 계백은 험준한 곳에 3개의 진영을 세워 신라군의 공세에 대비했다고 한다.[6] 이 3개의 영은 각각 현재의 황령 산성, 산직리 산성, 모직리 산성으로 추측된다. 이 중 계백의 본영은 산직리 산성에 위치했을 것으로 비정된다. 계백이 열세에 있는 군을 셋으로 나눈 이유는 신라군이 산직리 산성을 우회하여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는 한편, 세 산성은 어느 한 곳에 공격을 집중할 경우 배후를 노출시키는 형세였으므로, 지세를 활용하여 병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군을 분산시킨 약점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추가로 깃대봉-국사봉-귀명봉 주위의 보루에 소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신라군의 우회를 감지하는 방식의 반원형 진을 짰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산직리 산성의 고도는 30~50m이고 모직리 산성도 150m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며, 이들 산성은 석성도 아니고 작은 토성에 불과하므로, [7] 본격적인 공성전이라기보다는 구릉지대의 작은 토성과 목책을 세워 신라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식의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4 백제군의 규모

이 때 백제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5천명~1만 5천명으로 본다. 1만 5천명설은 달솔 계백보다 상위 직급인 좌평 충상, 상영이 존재했음을 이유로 이들이 계백과 대등하거나 더 많은 병력을 통솔하여 3군을 배치하였다고 추측하는 입장이다. 하지만무엇보다 삼국사기에 명시적으로 백제군 5천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고, 지휘관도 좌평 충상, 상영 대신 계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충상, 상영은 명목상 지휘관이고, [8] 실제 지휘는 계백이 맡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라에 친화적 기술된 삼국사기에서 격파한 적의 수를 일부러 적게 기록할 이유도 없다.

5 관창 그리고 패배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4번 모두 신라의 공격을 패퇴시켰다. 이에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당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신라군은 화랑 반굴관창을 백제군을 향해 돌격시킨다.[9] 반굴은 처음 돌격 때 전사하고, 관창은 한번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돌격하여 결국에는 사로잡히고, 계백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보낸다. 이에 분노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친다. 그 전까지 4차례의 전투로 크게 소모되어 있던 백제군은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버텨내지 못하고 3영이 붕괴되었고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명만 사로잡히고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천은 전멸한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한 것은 하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애초에 제대로된 방어진지도 아닌 3개의 산성에서, 당군과의 합류를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나왔을 신라군을 상대로 4차례나 승리한 것은 그만큼 계백의 지휘가 탁월했고 백제군이 분전이 눈부신 것이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돌격이 사기 진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군의 기동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반굴과 관창이 자살돌격으로 시선을 끄는 사이 병력의 일부를 나누어 황산벌의 중심을 흐르는 연산천 옆의 구릉을 우회하여 계백의 5천 병력을 포위섬멸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려면 반굴과 관창의 돌격은 단기돌격이 아니라 상당수의 병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6 후폭풍

황산벌 전투의 패배로 당군과 신라군의 합류를 저지하려던 백제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백강으로 들어오는 당군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의 시도도 여의치 않아 백제군이 대패하면서 결국 당군과 신라군의 합류가 이루어진다. 계백의 분전으로 신라군의 합류 일정이 늦어지자 당군은 신라의 장수 김문영을 독자적으로 처형하려고 하는 등 압력을 넣었으나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강경대응하면서 일단 알력은 무마되었고, [10] 얼마 안되어 의자왕은 부여성에서 탈출하여 웅진으로 달아났으나 결국 예식진의 배신으로 사로잡힌다.[11] 결국 황산벌 전투를 계기로 백제의 수뇌부가 붕괴해 백제는 공식적으로 멸망한다.

그러나 660년의 상황은 백제 전국이 온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오직 웅진, 사비 등 백제의 수도권만 격파당한 상태였고, 이후 3년간 일본에서 돌아온 왕자 풍왕을 중심으로 나당연합군에 항전했다. 실질적으로 백제의 전력이 완전히 붕괴한 것은 백강 전투로,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 등 조선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의자왕 다음으로 풍왕이 마지막 왕이고 백제의 멸망은 663년이라고 봤다. 이렇게 볼 경우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마지막 불꽃이 아니라 백제 멸망과정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7 미디어

유명한 전투다 보니 여러 번 영상화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황산벌 전투의 경우 방송 3사 모두 한 번씩 영상화 하였다. 그런데 방송사에서 다룬 황산벌 전투는 삼국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군이 쌀배달이니 군수품 보급을 담당했다는 황당한 헛소리 망발을 깔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황산벌 회전에서 신라군이 맡은 역할은 절대로 쌀이나 보급품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군과의 신속한 합류가 목적이다. 당나라군은 수군 함대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기에 신라군의 군량 보급이 필요 없었다. 신라군이 당나라에 군량 보급을 한 경우는 고구려 정벌시에 겨울철 항해가 불가능한 때에 김유신이 한 번 군수물자를 보급한 것과 백제 멸망 후 백제에 주둔한 당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것이 전부이다. 이 두 가지는 "답설인귀서"에 정확히 적혀 있다. 그 외에는 당나라에서 생산되는 넉넉한 군량으로 다 채웠다.

  • 1992년 삼국기 : 이때 계백역을 맡은 유동근과 김유신역에 서인석은 드라마 연개소문과 정도전에서 다시 라이벌로 만난다.
  • 2003년 황산벌 : 항목 참조. 고증을 딱히 신경 쓴 영화는 아니지만, 코미디 영화라는 홍보를 보고 찾아온 관객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전개로 2000년대 사극 영화로는 이례적인 수준의 임팩트를 남겼다. 오히려 사학자들이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역사의 굵직한 면을 비교적 사실적이고 현실적이게 그렸기 때문.[12]
  • 2006년 연개소문(드라마) : 극 후반부 백제 멸망을 다루면서 함께 다뤄진다. 그런데 드라마가 드라마인지라 병맛이다.[13]
  • 2011년 계백(드라마)
  • 2013년 대왕의 꿈
  1. 신라가 탄현을 우회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 경우의 우회루트가 익산이나 대전인데 이쪽은 탄현보다 대규모 거점이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다만 신라병력이 워낙 대규모였다는 것, 국왕직속병력은 모두 차출되어서 백강으로 달려갔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지키는 귀족 병력들이 얼머나 중앙군과 일치단결하여 대처할지에 대해서 백제왕실이 불안해했을 수는 있다.
  2. 대체로 경상도 주둔 병력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경기도 주둔 병력은 고구려와 대치중인 관계로 편성되지 않았다.# 혹여나 신라군은 당나라를 위한 보급부대라는 주장이 있으나 해상을 통한 보급의 우위와 중국측 사료를 보면 맞지 않는 소리다.
  3. 현 대전광역시 식장산 동쪽 부근
  4. 병력 5천은 백제의 방군성 체제에서 중앙 5방의 주둔군 1천 병력의 합과 일치한다. 백제왕실이 직접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수가 황산벌에 투입된 병력의 숫자와 일치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적들이 코앞까지 와있는 상황임에도 백제 왕실과 백제 지방 귀족들과의 갈등이 봉합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
  5. 참고로 손자병법에 아군 병력이 열배 많을때는 사방 포위, 다섯 배일 때는 우직하게 정면돌파, 두 배일 때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앞뒤로 양동작전, 비슷할 때는 대치가 정석이라고 보았다. 아군이 두 배 열세일 때는 야전 방어, 다섯 배 열세일 때는 공성을 유도해야 한다고 했으며 열 배 열세일 때는 짐작하겠듯이 도주 후 유격전이 가장 타당하다고 했다.
  6. 일본서기에는 노수리산에 진을 쳤다고 한다.
  7. 산직리 산성은 석성일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애초에 30~50m정도라 거의 평지성과 차이가 없다.
  8. 의자왕은 자신의 아들 40명을 좌평으로 임명하였으므로, 충상은 사기를 높이기 위해 계백과 함께 파견된 왕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상영은 달솔이었으나 위 백제군 전략의 2안의 입안자로 황산벌 전투 즈음에서 좌평으로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
  9. 흔히 반굴과 관창의 돌격이 '단기돌격'이라 알려져 있고 여타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묘사되는데, 이건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사절요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와전된 이야기다. 삼국사기 원문에서 관창이 잡힐 때 분명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而彼衆我寡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라고 적혀 있어서, 관창 혼자만 단기돌격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10. 김유신이 직접 도끼를 매고 당나라 진영으로 가서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 당군 네놈들부터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잔뜩 쫄아버린 당군 수뇌부는 바로 김문영의 처형을 없던 일로 했다.(...)
  11. 이에 대해 의자왕의 의도가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라고 평가하기도 하나, 그러려면 위에서 언급한대로 성충, 흥수의 1안을 따랐어야 한다.(...) 거기에 백제의 왕실 군대는 위의 두 전투로 거의 와해된 것으로 보이므로, 의지왕이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웅진으로 피난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12. 어디까지나 굵직한 부분이다. 코미디 부분을 좋게 볼리는 없지 않은가(...) 너 나랑 몇년 됐어?
  13. 백제군과 신라군을 다 합해서 100명 될까 말까 한 정도의 숫자로 어설프게 싸우는 등 허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