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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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 五・一五事件(ご・いち・ごじけ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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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2년 5월 15일 일본 제국에서 백주대낮에 현역 해군 장교들이 이누카이 츠요시 현직수상을 암살하고 폭탄테러를 벌인 사건. 쿠데타에 가까운 성격을 가졌으며, 2.26 사건과 함께 일본의 폭주를 시작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 사건이다.

2 상세

1929년은 대공황에 따른 여파로 인해 일본도 불황의 여파가 밀어닥쳐 기업도산이 줄을 잇고 사회불안이 높아졌다. 애초에 비단등의 섬유산업이 주요 산업이었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생각한 경공업 및 중공업도 타국에 비해 품질이 안좋은 데다가 제1차 세계대전당시 연합군의 긴급한 요청으로 짭짤하게 돈을 벌면서 수출한 통조림내부에 모래와 흙만 있을 정도로 불량제품을 팔아치우던 일본은 이미 그 당시에 제품 품질에 대한 국제적 신용도가 당시의 열강 국가보다 낮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공황이 발생하니 안그래도 제품을 판매할 시장이 싹 사라지면서 대공황의 타격을 더 심하게 느끼게 된다.

이렇게 되자 타국을 침략해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1931년에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켰지만 일본정부가 이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마지못하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형국이어서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당시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수상의 정권은 금수출의 금지 등 불황타개를 공약으로 하여 1932년 2월에 치뤄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지만 한편으로 만주사변을 묵인하였기에 육군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1930년에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했던 전직 총리인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에게 불만을 가졌던 해군장교들은 와카츠키를 죽일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와카츠키의 입헌민정당(立憲民政党)이 선거에서 패하면서 퇴진하자 암살은 물건너 간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해군장교들은 해군에 제약을 가하는데 찬성한 현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암살계획의 중심인물이던 후지이 사이(藤井齊)가 "뒤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중국에서 전사하자 동료들은 비분강개하여 사건을 벌이게 되었다.

분노한 해군장교들은 수상관저, 내대신 관저, 입헌정우회 본부, 미츠비시 은행, 경시청을 차례로 습격한 후 별동대로 변전소를 습격해 도쿄를 암흑천지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거사일인 1932년 5월 15일, 해군장교들은 쿠데타를 실행에 옮겨 먼저 이누카이 수상이 머문 수상관저로 쳐들어갔다.

이 때 제일 먼저 들어간 미카미(三上)[1]대가 이누카이를 접했는데 수상은 어서 들어오라고 한 후 응접실로 안내하여 자신의 생각을 장교들에게 말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수상의 설득이 약간 먹혔다. 하지만 뒷문으로 돌입한 쿠로이와(黑岩)가 이끄는 무리가 밀어닥쳤고, 쿠로이와는 수상의 말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곧장 총을 빼내들어 이누카이 수상의 복부를 쏘았다. 그러자 미카미도 이누카이의 머리를 쏘았다. 이에 이누카이 수상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해군장교들은 내대신 저택과 입헌정우회 본부, 일본은행 등에 수류탄을 투척했지만 불발로 그쳤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도 없고, 병력동원등의 세부지침도 없이 단지 분노만 높았던 이들의 반란은 곧 진압군에 의해 체포되어 해군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3 결과 및 영향

일본군은 반란죄를 적용하여 요코스카에서 열린 해군 군법회의에서 해군반란장교를 처리하고 여기에 가담했던 육군사관학교 본과생은 육군군법회의, 민간인은 폭발물취급위반죄 및 살인,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도쿄 지방재판소에 회부했다. 전 육군사관학교 후보생이던 이케마쓰 다케시(池松武志)는 육군형법 대신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일반형법을 적용받았다.

이들은 가담정도에 따라 유기징역, 집행유예 및 훈방조치가 내려졌는데 사형이 내려지지 않았던 것은 당시 정당정치의 부패에 대한 민중들의 호응으로 반란장교들에 대한 구명 및 탄원운동이 봇물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탄원서명만 35만명이 했을 정도니... 결국 판결은 생각보다 가볍게 형을 언도하는 것에 그쳤다. 이를 통해 아무리 정치꾼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지만 과격파 군장교의 쿠테타를 찬양하는 민중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을 볼 때, 그 당시의 일본 대중들에게 이미 법치보다는 극단주의가 만연해 있음을 누구나 짐작하게 한다.

한편 5. 15 사건에 참여한 민간인에 대해선 매우 엄한 기준이 적용되어 무기징역같은 중형이 내려졌다.

이 일은 훗날 2.26 사건 당시 육군장교들이 투항 후 형량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지만 이들의 생각과 달리 덴노를 빙자해서 내란을 꾸몄다하여 중형이 내려지자 반란에 참여한 육군장교들은 크게 당황하였다고 한다.

4 유사 사건과의 차이

5.15 사건은 2.26 사건과 함께 군인에 의한 쿠데타 및 테러사건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반란을 일으킨 해군장교는 비록 군복을 입었지만 2.26 사건과는 달리 무기는 민간에서 조달하고 장교들이 휘하의 부하들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격은 크게 다르다.

같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이라해도 2.26 사건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체제전복 및 권력탈취를 노려 군사력을 동원한 위법적인 쿠데타였기에 형벌도 중했지만 5.15 사건은 군사력 동원도 없었고 국민들도 불만을 가진 정치꾼의 암살(테러)이란 색채가 짙어 형벌이 가벼웠던 것이다.

물론 이건 일본에서의 구분이고, 타국에서 볼 때는 5.15 사건이나 2.26 사건이나 거기서 거기일 정도로 평가가 나쁘다.

5 여담

이누카이 츠요시는 놀랍게도 당일 그 시각 일본을 방문한 찰리 채플린을 만나려고 했고, 이에 그와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비서격인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를 찰리 채플린에게 보낸 상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암살 당일에 츠요시와 다케루, 찰리 채플린은 한 자리에서 만났어야 했고, 쿠데타 주동자들은 이 사실을 이용하여 츠요시뿐만 아니라 다케루와 찰리 채플린도 세트로 제거할 예정이였다.[2] 찰리 채플린은 왜! 만약 채플린이 암살당했다면 일본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태도가 매우 경직되었을 것을 생각한다면 쿠데타를 주도한 장교들이 그 당시 얼마나 맛이 간 상태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채플린은 마침 그 날 사전에 잡아둔 스모 경기 관람과 덴뿌라 시식 일정 때문에 그 약속을 미뤘고, 그 사이 계획과 달리 총리만이 암살 당했다. 아들로서는 아버지를 잃은 것은 불행이지만 그나마 그 중 다행으로 찰리 채플린 덕에 목숨은 건진셈. # 안습. 하지만 아들이 살았다고 해도 결국 츠요시는 죽었고 일본은 이에 예정된 파멸의 수순을 밟게 된다.

공각기동대 SAC 2기에서도 이 사건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당시 탄원서명 중 11개의 잘린 손가락이 동봉 된 것이 있었는데, 고다 카즌도는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서 개별의 11인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1. 이 자는 훗날 삼무사건에도 관여한다.
  2. 당시 타임지 기사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찰리 채플린을 미국인이라고 지칭했다. 그런데 찰리 채플린은 항목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영국인이다. 그거 때문에 기사에서 국제문제를 모르는 ㅄ들이라고 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