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T48/역사

< HKT48

일본의 아이돌 그룹 HKT48의 역사를 소개하는 페이지.

1 2011년 : 결성

2011년 5월 AKB48 싱글 악수회에서 HKT48 결성이 발표되었다. 당시 도쿄의 AKB48, 나고야의 SKE48, 오사카의 NMB48까지 해서 일본의 3대 도시인 '토메이한'(東名阪)(쿄, 고야, 오사카의 한자를 이어 음독으로 읽은 것)에 자매 그룹이 모두 들어섰기 때문에, 또 다른 자매 그룹이 생기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팬들이 많았다. 2011년 7월 10일 오디션을 개최하여 24명의 후보생을 선발하였는데, 레슨 도중 3명이 사퇴하여 데뷔한 것은 21명의 연구생이었다. 2011년 11월 26일부터 HKT48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데뷔 공연 세트리스트는 SKE48의 팀S 2nd 공연인 '손을 잡으며'를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HKT48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1기 연구생 데뷔 때부터 야마모토 사야카, 와타나베 미유키라는 스타를 탄생시키며 대박을 터뜨렸던 NMB48과 많은 비교를 당했다.


HKT48 초기의 푸시 멤버였던 모리야스 마도카, 스가모토 유코, 미야와키 사쿠라, 코다마 하루카, 타니구치 아이리, 에토 사야카, 마츠오카 나츠미.

초기 HKT48은 코다마 하루카와 마츠오카 나츠미를 '하루나츠'라는 이름의 투톱 페어로, 스가모토 유코를 캡틴으로 밀어줄 예정이었지만 하루나츠에게 생각보다 인기가 붙지 않았고 스가모토는 캡틴 자리를 거절하였다.

2 2012년 : 어지러운 시작, 그리고 사시하라의 이적

3월 4일자로 첫 팀인 팀H가 발표되었다. 하필이면 일본어로 야릇한 뜻을 가진 'H'라서 개그 소재가 되었는데, 그 H는 엣찌(エッチ)고 HKT48의 H는 에이치(エイチ)라고 읽기 때문에 혼동되지는 않았다. 센터는 코다마 하루카마츠오카 나츠미가 맡았다. 한편 운영진 측은 당시 연장자였던 스가모토 유코를 캡틴으로 내세울 예정이었지만 스가모토가 거부하는 바람에 캡틴 자리는 아나이 치히로가 맡게 되었다. 팀H은 결성부터 많은 논란을 낳았다. 1기 연구생 데뷔 때부터 큰 인기를 모았던 연구생 에토 사야카가 팀H에 빠지면서 팬들이 반발한 것이다. 에토를 팀H에 넣지 않은 이유는 발표되지 않았고, 팬들 사이에서 여러 추측만 난무했다. 팀KⅢ를 위해서 비축해놓았다는 설, 에토의 극장 공연 능력이 떨어지고 레슨에도 자주 불참했기 때문이라는 설, 나이가 너무 많아서라는 설 등이 있었다. 물론 나이가 많아서라는 추측은 억측이다. 에토는 팀H의 주축인 96년생보다 어린 97년생이기 때문이다.

초기의 HKT48은 상황이 매우 안 좋았다. 데뷔 초부터 춤, 노래는 물론 코미디언(게닌) 컨셉으로 MC까지 능숙하게 소화했던 NMB48과는 달리 HKT48은 내세울 게 없었던 것이다. AKS에서는 HKT48의 컨셉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그저 '평균 연령 13세의 젊은 아이돌'이라는 막연한 컨셉으로 승부하려 하였다. 멤버들 역시 이 때까지는 팬들에게 자신들의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며 헤매고 있었다. 특히 공연에서의 MC는 매우 재미가 없다는 악평을 들으며 고전해야 했다.

또한 당시 후쿠오카를 비롯한 규슈 지역은 로컬 아이돌의 활동이 매우 왕성했다. 이제는 전국구 아이돌로 데뷔한 LinQ를 비롯, HR, QunQun 등 다양한 아이돌이 저마다의 활동 기반을 갖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그룹은 이미 지역의 다양한 기업과 연계하여 지역 밀착형 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후쿠오카의 아이돌 오타쿠들 역시 이들 로컬 아이돌에 큰 성원을 보냈다. 후쿠오카 지역 아이돌이라는 컨셉을 선점당한 탓에, HKT48은 막대한 자본력에도 불구하고 후쿠오카의 아이돌 시장에서 고전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AKS에서는 지역의 다양한 행사에 HKT48을 참가시켰다. 소프트뱅크 호크스 야구단의 서포터즈를 맡고, 일본의 3대 봄 축제로 꼽히는 하카타 돈타쿠 축제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등 지역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TVQ, RKB 라디오, FBS후쿠오카 방송 등 지역 방송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전략도 세웠다.

이 시기에는 스가모토 유코가 그라비아를 통해 점점 얼굴을 알려나갔고, 코다마 하루카 역시 真夏のSounds good! 싱글 선발로 뽑히면서 AKB48 팬들에게 이름을 인지시켰다.

2012년 6월, AKB48 4회 총선거가 열렸다. HKT48에게는 단 한 명이라도 순위권에 올려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 HKT48 오타쿠들은 한 명에게 표를 몰아줄 정도로 조직력이 강하지 않았고, 저마다 의견이 갈렸다. 센터인 코다마를 밀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당시의 코다마는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인기도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 외에도 지명도가 높은 스가모토를 밀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이 역시 큰 호응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팀H에 못 들어가고 연구생으로 남아있던 에토 사야카의 팬들은 총선을 통해 에토의 이름을 알려야겠다며 이를 악물었고, 그 결과 속보에서 에토는 62위에 올라갔다. HKT48에서는 유일하게 속보에 올라간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 순위에서는 미야와키 사쿠라가 47위로 넥스트걸즈에 진입했다.

총선거 1주일 후, 일본의 대표적인 황색언론 주간문춘에서 사시하라 리노의 스캔들을 폭로하였다. 팬과 동침을 했다는, 상당히 큰 규모의 스캔들이었다. 사시하라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를 인정했고, 아키모토 야스시는 사시하라를 HKT48로 보내버리겠다고 발표했다. AKB48 팬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사시하라에게 분노를 표하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사시하라를 동정하는 팬들도 있었다. 6월 16일 사시하라는 HKT48로 완전히 이적하였고, 7월 5일 팀H에 배속되었다. 팀H는 이 시기 동안 17인 체제로 공연을 올렸다.

사시하라의 이적은 후쿠오카가 역사적으로 좌천의 명당(…)이라서 그런 것도 있어서 초기에는 '좌천'이라고 표현되며 굉장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HKT48 팬들 역시 갑자기 들어온, 그것도 스캔들로 들어온 사시하라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동안 '젊고 싱싱한 여자 아이들'이라는 이미지로 승부하던 HKT48에 남자와의 동침 스캔들을 뿌린 사시하라가 들어오는 것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 사시하라 오타쿠와 기존 HKT48 오타쿠들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이후에는 사시하라의 이적이 HKT48에 도움이 되었다는 의견이 많다. 일단 아이돌로서 뿐만 아니라 버라이어티 탤런트로서도 이름을 알려가던 사시하라가 'HKT48'이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하게 되면서 HKT48이라는 그룹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극장 공연 경험은 물론 방송 경험도 많은 사시하라는 후배 아이돌들에게 조언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후배들의 캐릭터까지 스스로 만드는 등 반쯤 프로듀서에 가까운 역할을 하며 그룹을 이끌어나갔다. 특히 무라시게 안나는 사시하라와 찰떡궁합을 이루며 MC 캐릭터를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시하라 리노의 모습은 HKT48의 첫 전국 레귤러 방송인 'HaKaTa백화점'에서 잘 드러난다.

사시하라가 들어온 2개월 후인 8월, 에이스였던 스가모토를 비롯하여 에토, 코모리, 타니구치, 나카니시 아야카 등 다섯 명의 멤버가 한꺼번에 해고당하였다. 명목상으로는 모두 아이돌 생활을 접고 새로운 길을 걷겠다며 자진 사퇴한 것이었다. 팬들과 일부 황색언론에서는 이들 다섯 명이 남성 팬과 메일 주소를 교환하는 등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해고당한 것이라는 보도를 냈지만, 사실로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스가모토 유코는 탈퇴 이후 유튜브에 인사 영상을 올렸는데, 사퇴 이유에 대해서는 요리를 열심히 하고 싶어서 탈퇴했다고 밝혔다. 이후 '요리 아이돌'이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활동하고 있다.블로그 트위터 나머지 네 명은 연예계를 은퇴한 줄 알았으나 코모리 유이는 시모노세키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아이돌그룹 10COLOR's로 복귀해서 현재는 GALETTe로 소속을 옮긴 상태이다.공식 홈페이지 블로그 트위터 에토 사야카도 지역방송국 라디오에 레귤러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지역행사 MC를 하는 등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블로그 트위터 공식 홈페이지

2012년 개최한 2기생 오디션이 끝나고 9월 23일 2기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아키모토 야스시 프로듀서가 '제2의 쥬리나'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타시마 메루, 그리고 성실한 대응으로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토모나가 미오 등 생각보다 인재가 많은 기수라는 평을 받았다. 한편 총선거의 여파인지 AKB48UZA 싱글에서는 미야와키 사쿠라코다마 하루카 대신 선발로 들어갔다. 코다마 하루카는 언더걸스로 격하.

12월, HKT48 이름으로 된 첫 오리지널 곡인 <첫사랑 버터플라이>가 공개되었다. 그런데 센터가 코다마도 미야와키도 아닌 2기생 타시마 메루라서 말이 많았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체질이라서 갑자기 센터를 차지한 것에 대한 팬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적은 편. 데뷔 싱글 <スキ! スキ! スキップ!>에서도 타시마가 센터를 맡았다. 코다마 하루카는 센터 자리에서 밀려났는데, 이 때문에 동정표를 얻기도 했고 점점 정변하는 모습이 보여서 코다마의 위상도 높아졌다. 데뷔 싱글은 25만 장이 넘는 초동 판매량을 올리며 그동안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3 2013년 : 삿시와 함께 날아오르다

2013년 리퀘스트 아워 서프라이즈로, 사토 카즈야 지배인에서 방송계에서 활동하던 前 톤네루즈 프로듀서 오자키 아츠시로 지배인이 교체되었다. 사토의 경우, 팬들과의 소통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데다가, 운영의 미숙, 당시 에이스인 스가모토 유코를 포함한 5명의 멤버를 사퇴(HKT48 5인 사퇴 논란)시킨 문제, 2기생 등장 이후 1기생의 대우 문제 등등 여러 문제로 인해 교체 된듯 보인다. 이 후 지배인들의 신뢰도 투표를 거친 결과 오자키 아츠시는 높은 신뢰율을 보여 정식적으로 지배인에 취임하였다. 앞으로 HKT48의 방송 등장이 많아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반응들이다. 실제로 지배인 교체 이후 HKT48은 타 그룹 대비 다양한 TV 방송에 출연하고 있고, 이는 새롭게 바뀐 운영진의 적극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평이 있다. 방송국에서 각 그룹에 방송 기획을 제안하면, 다른 그룹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일정이 안 맞아 거절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HKT48 운영진은 오히려 운영 측에서 달려들어 기획을 제안하고 도쿄까지 찾아간다고 할 정도.

5회 총선거에서 드디어 HKT48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2년차에 돌입한 막내 그룹으로서 총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사시하라 리노, 미야와키 사쿠라, 코다마 하루카, 오오타 아이카, 타시마 메루, 토모나가 미오 등 여섯 명의 HKT48 멤버가 순위권에 올랐다. 특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시하라의 1위 등극이 결정적이었다. 1위 발표 시 HKT48의 사시하라라는 이름이 알려지며 그룹의 인지도를 끌어올렸고, 삿시의 도약과 함께 그룹 역시 점차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2013년 10월에는 3기생 9명을 뽑았다. 또한 드래프트 멤버로 한 명을 선택. 서프라이즈로 HKT48 단독 투어인 'HKT48 큐슈 7현 투어, 귀여운 아이는 여행을 보내라~' 를 개최한다는 기쁜 소식도 받았다.

4 2014년 : 진격의 하카타

2014년 1월 11일 처음 열린 HKT48 투어에서 팀 K4가 만들어지면서 기존 1,2기 멤버들 및 연구생들이 셔플을 통해 각자 배정받은 팀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캡틴은 사시하라와 마찬가지로 AKB48에서 이적해 온 고참 선배 오오타 아이카로 결정되었다.

2014년 2월 24일 열린 대조각 축제에서 HKT48은 타 그룹에 비해 비교적 적은(?) 변화를 맞이했다. 이미 HKT는 2014년 1월 11일 HKT48 큐슈 투어에서 팀 셔플이 이루어졌기 때문. 그리하여 부캡틴 임명 외에는 내부적으로 변화는 거의 없었다.

우선 가장 큰 변화로는 나카니시 치요리타니 마리카가 각각 AKB48SKE48로 이적한 것. 극장 공연에서 MC를 맡았던 이들이 빠지게 됨으로써 앞으로의 극장 공연 진행이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다만 쵸리 같은 경우에는 2번째 싱글 메론 쥬스에서 선발 탈락한 이후 다시 3번째 싱글에서 선발에 복귀했는데 앨범이 출시되기도 전에 이적 크리를 맞았다. 선발로 들어간 싱글이 나왔는데 활동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5회 총선에서 26위를 차지한 미야와키 사쿠라와 연구생 시절부터 상당한 팬층을 확보해 5회 총선에서 59위를 차지한 토모나가 미오가 AKB48 겸임이 되었다. 또한 어리지만 험한 입담과 큰 키의 보스 캐릭터로 입지를 굳힌 타나카 나츠미와 서구적인 혼혈 이미지와 상반되는 개그 캐릭터를 가진 무라시게 안나 역시 각각 SKE48NMB48의 겸임을 맡게 되었다. 또한 SKE에서 키모토 카논이 팀K4의 겸임으로 오게 되었다.

문제는 이들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2001년생 3기생 2명인 타나카 미쿠야부키 나코가 가입 3개월 만에 팀H로 승격되었다는 것이다. 야부키는 이미 커플링곡에서 센터를 맡아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고, 미쿠 역시 타 멤버들에 비해 빠른 성장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아직 어리고 연구생 생활도 얼마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 그렇기 때문에 HKT 팬덤 내에서도 과도한 겸임과 나코미쿠의 빠른 승격으로 인한 과도한 부담에 대한 우려가 발생하고 있다.

새로 생긴 부캡틴 제도에서는 마츠오카 나츠미미야와키 사쿠라가 각각 팀H와 팀K4의 부캡틴으로 임명되었다. 그 외에 팀H↔팀K4 간 셔플링은 없다. 그 외에 아직 승격 못하고 남아있던1기생인 후카가와 마이코, 2기생 쿠사바 마나미도 정규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기세에 힘입어 2014년 6월, AKB48 6회 총선거에서는 그야말로 진격의 하카타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전년도 1위 사시하라는 속보에서의 압도적 표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올해의 1위 자리를 와타나베 마유에게 내주었지만, 이 외 주요 멤버들이 대부분 랭크인에 성공한 데다가 그다지 푸쉬받지 못한 몇몇 멤버까지도 총선거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데에 성공하여 선배 그룹인 NMB48보다 권내 진입 멤버수와 합산 표수를 앞서는 성과를 거두었다.에이스 미야와키 사쿠라가 선발에 첫 입성했고, 토모나가 미오코다마 하루카가 언더걸스로 올라왔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주목받지 못했던 모리야스 마도카마저도 첫 진입에 언더걸스가 되었다. 게다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카구치 리코가 퓨쳐걸스에 진입하여 작년 총선거의 2배가 넘는 13명을 진입시켰다. 특히 모리야스는 첫 진입 멤버 중에서 이코마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다만 2기생 센터인 타시마 메루가 저조한 성과를 보인 것이 조금 아쉬운 부분으로 꼽힌다.

2014년 11월에는 총선거의 기세에 힘입어 미야와키가 AKB48의 싱글인 希望的リフレイン에서 더블 센터로 뽑히고, 모리야스가 처음으로 선발 멤버에 진입하는 좋은 소식을 맞이한다.

2014년에 접어들어 전체적으로 멤버들의 출연 및 인지도는 크게 올라갔지만, 정작 CD 판매량은 싱글을 2회 발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변화가 없는 것이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초동 30만장의 벽을 깨는 것이 관건.

5 2015년 : 성숙기

2015년 5월 10일 개최된 AKB48 그룹의 두 번째 드래프트 회의에서 삿시는 지배인 자격으로 참가해 리더십을 과시했다.[1]

2015년 6월 6일 실시된 AKB48 41st 싱글 선발 총선거 '순위 예상 불가능, 대파란의 하룻밤' 에서 HKT48은 이제 그룹의 막내가 아닌,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줬다.

1위를 탈환해, 이 분이 분밖에 차지하지 못했던 2관왕두 번 연짱이 이리 힘들다니에 오른 삿시를 선두로 카미7에 진입한 미야와키 사쿠라(7위), 언더걸스 센터를 차지한 코다마 하루카(17위), 넥스트걸스 센터를 차지한 아나이 치히로(33위), 유키링마유유와 동기로 팀의 맏언니격인 러브탄(41위) 등 무려 15명을 포진시켜 먼저 생긴 NMB48을 한 명 차이로 꺾었다. 삿시는 1위 소감에서 HKT48 멤버들에 대한 진한 애정을 표시했고 멤버 모두는 기립 박수로 화답하는 훈훈함을 연출했다. 이는 HKT48에서만큼은 사실상 총감독, 프로듀서 역할까지 대행하는 삿시의 리더십이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총선거에서의 선전과는 별개로, 아직까지 그룹 독자적으로 생명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문제점으로 꼽힌다. 특히 거점인 큐슈 지역에서 팬층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악수회 판매량으로 증명되어, 싱글 판매량이 30만장 초반대에서 머물고 있다. 악수회 판매량 등을 고려하여 메이저 데뷔 후 2년간 매년 2장의 싱글을 발매 중에 있고 약간씩 판매량이 상승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단번에 치고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중.

2014년 처음으로 졸업생이 나온 이후 한동안 졸업생이 나오지 않다가, 2015년 상반기를 시작으로 2기생을 중심으로 조금씩 졸업자가 나오고 있다.
쿠사바 마나미는 스캔들로 추정되는 사건이 밝혀진 이후 '학업'을 이유로 졸업하였으며, 이 외에 더블 이즈미로 통하는 고토 이즈미는 '학업'을 위해, 우메모토 이즈미는 꿈이었던 '싱어송 라이터'를 위해 졸업을 하였다.

2015년 12월 19일, 해바라기조 '지금은 연애중' 쇼니치에서 제4기생 오디션 개최[2]전국 투어를 개최한다는 서프라이즈를 발표한다.

2015년 12월 23일, HKT48의 극장이었던 호크스 타운의 재개발 확정. 즉, 폐관 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찌라시가 아닌 신문에서 발표된 거기 때문에 폐관은 확실하다.
이로써, 새로운 극장을 어디로 하게 될지도 주목.

6 2016년

2 월 6 일, 전국 투어 「HKT48 봄의 라이브 투어 ~ 자자 드 솔레 2016 ~」가 이날 나고야 공연을 시작으로 시작된다.

2 월 23 일, HKT48 극장의 폐쇄에 따른 새로운 거점으로 ​​후쿠오카시 주 오구 덴진 니시 테츠 홀 ( 솔라 리아 스테이지 6 층)을 '홈 시어터'와 같은 해 4 월 28 일 첫 공연을 할이 일 "자자 드 솔레 '도쿄 첫날 공연에서 발표 되었다.
또한 니시 테츠 홀은 "전용"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일반 이용도 열린다. 또한 이에 따른 극장 이용 불가 기간의 대응으로 자매 그룹 전용 극장에서의 출장 공연 실시도 함께 발표 되었다.

3월 30일, 3기생(7명)과 드래프트 2기생(3명)이 승격되면서 팀Tll가 결성되었다.

7월 12일, HKT48 여름 라이브 홀 투어 In 후쿠오카 선 펠리스 홀 2일차 공연 중, 4기생 11명이 공개되었다.

2016년의 가장 큰 화두는 마츠오카 하나로 이 해의 초기 오데카케에서 고토 테루모토의 발언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팬덤내에서 핫해졌다. HKT선발->HKT센터-> AKB22인선발 까지 올라가면서 초고속 승진을 하고 있다.
  1. 이 때 지배인은 참관인 자격이고 드래프트 멤버들은 각 팀 캡틴이 중심이 되어 뽑는 형태였지만 삿시의 경우 일반 지배인과 무게가 달랐으니...
  2. 2016년 구마모토 지진 때문에 오디션이 잠시 정지되었었고 최종오디션은 6월 11일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