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나모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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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에서 대기중인 연합군
영어Operation Dynamo
Dunkirk evacuation
Miracle of Dunkirk
프랑스어L'évacuation de Dunkerque
Le miracle de Dunkerque
Opération Dynamo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절망적인 전황에서 연합군을 구원한 사상 최대 규모의 탈출 작전. 프랑스 침공의 여파로 서부전선이 완전 붕괴되어 전면패배의 위기에 봉착해 있던 연합국에게 항전의지를 되살리고 사기를 크게 올렸으며, 향후 대반격의 단초를 제공했다. 세계 전사상 최대 규모의 탈출작전이다. 규모면에서 비견될 흥남 철수의 경우 군 병력 10만에 민간인 10만으로 탈출인원이 더 적다. 대신 장비를 다 놓고 철수해서 맨몸만 빠져나온 됭케르크와 직접 비교하긴 그렇지만 대신 북한군이나 중공군에겐 Ju87, 아니 제공권 자체가 없었으니…

2 배경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전면적 침공으로 서부전선이 마침내 포화에 휩싸였다. 베네룩스 3국은 물론, 영프 연합군도 각지에서 참패와 후퇴만을 거듭했으며, 독일군이 아르덴 산림지대를 돌파하고 뫼즈 강을 넘으며 연합국이 예측치 못한 대규모 우회포위기동으로 주력부대가 모조리 포위섬멸될 위기에 빠졌다. 연합국은 아라스에서 반격을 개시했으나 실패했고, 연합군은 독일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퇴로가 없는 연합군을 짓밟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포위망에는,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계속되는 연전연패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영국·프랑스·벨기에의 군인 수십만 명이 갇혀 있었다. 프랑스 군 지휘부는 포위망 내부와 외부에서의 동시반격으로 이들을 구원한다는 계획을 실행하려 했으나 사실상 불가능했고, 영국군은 영국군대로 본토에 남은 전력을 최대한 빨리 보내 구원코자 했으나, 그 시점에서 구원군 파견은 포위망에 갇혀 포로가 될 병력만 늘리는 꼴이었다.

그 시점에서 연합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탈출작전이었다.

3 작전 직전 상황

3.1 독일측 사정

패배라는 걸 모르고 전진해오던 독일 육군은 아라스 전차전에서 역습을 당해 당황해했지만, 이내 격퇴하고 다시 진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독일 육군 최선두부대는 사기가 드높았으며, 하인츠 구데리안은 5월 22일, 예하 1기갑사단에게 칼레로, 2기갑사단에게 불로뉴[1]로, 그리고 10기갑사단에게 운명의 땅 됭케르크로 각각 진격할 것을 지시했다. 이들 3개 항구도시는 포위망 안에 있던 연합군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항구들이었으며, 독일 육군이 이들 항구도시를 진입, 점령하면 철수는 불가능했다. 천만다행히도, 이들 3개 도시에 대한 방어준비는 그 직전에 간신히 끝났는데, 여기에는 독일군이 연합군의 역습 정보를 듣고 5월 21일, 24시간 공격중지 명령을 내린 행운이 겹쳤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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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5월 25일, 독일 육군 제2기갑사단이 불로뉴를, 26일에는 제1기갑사단이 칼레를 함락시켰다. 됭케르크가 무사했던 이유는 단 하나, 독일군 최고사령부에서 됭케르크를 맡았던 제10기갑사단이 클라이스트 기갑군의 예비부대로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일 육군은 이미 5월 24일, 됭케르크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몇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됭케르크였고, 철수는 불가능했겠지만….

독일 육군 제4군 사령부는 5월 24일을 기해, 예하 부대에 부대간격 단축 명령을 내렸다. 기갑부대와 보병부대 간의 거리가 너무 벌어졌으니 이를 좁히라는 명령이었고, 사실상 기갑부대에 이동을 정지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결정타가 내려졌다. 전선을 방문한 아돌프 히틀러전군에 진격정지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5월 26일이 되어서야 철회되었고, 독일군은 5월 27일에야 공세에 나섰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아라스 전차전에서의 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반격으로 독일군 지휘부가 선두 기갑부대가 고립되어 전멸할 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실제 너무 작전대로 잘 되어가자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OKW와 아돌프 히틀러는 연합군이 반격해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육군 총사령부인 OKH에서는 히틀러가 쓸데없이 걱정한다고 여기고, 적극적인 공세를 요구했다. 문제는 일선의 야전군 사령관들의 상당수가 육군사령부의 주장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공세의 주역인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와 참모장 조덴슈타인은 기갑부대와 보병부대 간의 간격이 크게 벌어져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끊임없이 클라이스트에게 진격 속도를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육군 총사령부의 의견과 히틀러 및 일선 사령관의 의견이 완전히 대립된 상태다.

또한, 개전 이래로 여기까지 오면서 발생한 전차의 손실량과 연료, 탄약, 부품의 부족, 그리고 전차병의 피로도 매우 심했기 때문에 24시간 정도의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정작 히틀러가 총통 명령으로 진격을 정지시켰을 때는 손실당했다는 전차의 태반이 긴급수리돼서 일선으로 복귀한 상태였고, 연료 부족은 탄약 소모량이 예상보다 너무 적었기 때문에 탄약 수송에 배정된 차량을 연료 수송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해결된 상태였다. 하지만 개전 초의 혼란한 상황에서 병력 손실을 당장 보충할 수 없었으며, 전차 승무원들의 피로는 해소되지 않았으므로 이런 이유로 인해 룬트슈테트 같은 독일군의 고위 장성도 히틀러의 결정을 일단 찬성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총통 명령에 가장 반발했던 구데리안도 정지 기간 이틀째와 사흘째에 발생한 폭우로 인한 운하 지대의 범람을 보고는 진격 정지를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차량의 험지 주파 능력은 궤도차량조차 상당히 낮았다.게다가 당시 건설 공병의 능력까지 고려하면 강우 기간 중의 도하 전투는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근데 문제는 정지 명령이 없었다면 운하 지대 범람이 있기도 전에 뒹케르크를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일단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히틀러나 일선 지휘관이나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이 '공군만으로 뒹케르크에서 연합군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했고, 만사가 잘 되더라도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공격하려면 기갑부대가 꼭 필요함을 절감한 히틀러가 괴링을 믿기로 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에르빈 롬멜 장군은 이때부터 히틀러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리하면 기갑 집단의 진격에 제동을 거는 룬트슈테트에게 질린 육군 총사령부가 일단 룬트슈테트의 지휘권을 정지시켰는데, 육군 총사령부가 자기 말을 안 듣는 것에 심술이 난 히틀러가 그나마 자기와 의견이 통하는 룬트슈테트를 만나러 왔다가, 자기 지시도 없이 지휘권을 정지시킨 것에 화가 난 나머지 육군 총사령부를 골탕먹일 심산으로 기갑 집단의 진격을 총통 명령으로 정지시키고, 정지 해제는 육군 총사령부가 룬트슈테트를 설득할 때까지 보류해버렸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진격 정지 명령이 가진 군사적인 문제는 사실 이미 아 운하를 도하하여 교두보를 만든 기갑 집단의 선견 부대들까지 운하 너머로 되돌린 것이다. 정지 명령 그 자체는 당시의 전술적 상황과 부대 운용상의 기술적 조건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타당성이 없지는 않다는 의견을 내는 연구자들조차 이미 만들어진 교두보에서 철수시킨 것은 큰 실수라고 지적한다. 아 운하 너머의 독일군 교두보가 사라진 동안 영불 연합군은 방어 진지를 어떻게든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여, 철수 기간 동안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독일군 교두보가 소규모나마 운하 너머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면 영불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 정지 기간 동안 방어 진지 구축보다 교두보 소멸에 중점을 두고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에 독일군의 진격 정지 명령이 해소된 이후에는 도리어 반격을 받아 보다 적은 수의 병력만이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2 연합국측 사정

볼로뉴와 칼레의 연이은 함락으로 마지막 남은 됭케르크로 철수를 서두르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갑작스런 공격 정지에 당황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됭케르크로의 철수를 완료했으며, 시 외곽에 진지를 구축하고 우주방어에 돌입했다. 그러나 아무리 우주방어라 해도, 결국 독일 측 전력이 훨씬 우세한 것은 사실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이들이 패해 바다 속으로 쓸려나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지휘 체계도 혼란에 빠져있어서, 서부 전선의 총지휘를 맡은 프랑스 지휘부는 여전히 포위망 내외부에서의 협격이란 망상에 빠져 있었고,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는 5월 28일 독일에 항복한 반면 벨기에 내각은 런던으로 도망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항전을 선언, 지휘 체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영국은 포위된 연합군에 대한 구출을 단독으로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실행하기 위한 충분한 선박을 확보하지 못했다. 세계 최강 대영제국 해군이었으나, 그만큼 영국에겐 지켜야 할 바다가 많았다. 지중해와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바다에 전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충분한 철수 선박의 제공이 어려웠다. 더군다나 영국군은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철수까지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르웨이에 파병된 부대는 규모 면에서 대륙 원정군에 비하면 소수였지만 본토와의 거리가 훨씬 멀어서 그쪽에도 어느 정도의 선박을 할당해야 했다.

결국 영국은 어떻게든 최소 30만 이상의 병력 철수를 위한 선박을 하나라도 더 긁어모을 필요가 있었다.

4 작전 준비

다이나모 작전을 5월 26일 첫 실행하기로 한 영국군이지만 선박이 부족했다. 영국군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게 협조 요청을 해서 선박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선박 징발령을 내렸는데….

당시 모습을 묘사한 그림

당초 예상보다 더 많은 선박들이 몰려왔다! 화물선, 유람선, 트롤어선 등등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선박에선 "햇병아리 놈들에게 내 배는 절대 못 맡긴다!"라면서 선주들과 항해사들이 자진 탑승하여 됭케르크로 나아갔다. 심지어 징발 대상에서 제외된 소형선박들도 우루루 몰려왔다.[2] 통통배라 불릴만한 어선들부터 시작해서, 영국 상류층들은 직접 레저용 호화 요트에 탑승하여 합류했다. 심지어 10대 청소년들이 학교 실습용 보트를 끌고 합류해서 영국군은 이들을 만류하느라 온갖 고생을 했다. 오오 대영제국 오오 한 소형 선박을 몰고 온 선주에게 관구 사령관이 "이건 진짜 전쟁입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진짜 전쟁이에요."하고 말리려 하자 그 선주는 "나는 갈리폴리 전투에도 다녀온 사람이오. 겁 안 납니다."하고 배를 몰고 갔다는 에피소드까지 있었다. [3] 이렇게 해서 영국은 약 900여 척의 대규모 철수 선단을 확보했다. 그 중의 핵심 전력은 누가 뭐라 해도 속도가 빠른 해군 구축함들이었다.

그동안 서부 전선에서 온갖 굴욕을 당한 영국 공군도 반격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영국 공군의 가용 가능한 전투기가 총동원되어 됭케르크와 영불 해협의 제공권을 장악하기로 계획했으며, 비장의 신예기인 스핏파이어도 출격을 기다렸다. 프랑스는 지상에서의 반격을 통한 포위망 돌파를 뒤늦게 포기하고, 영국 측에 자국군도 데리고 가달라고 요청하면서 지휘권 문제도 해결되었으며, 프랑스군 2개 사단이 후위를 맡아 지연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한편, 독일은 지상에서의 공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대대적인 항공 작전을 준비했다.

5 작전 진행

영국군은 첫 이틀 동안 45,000명을 탈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정작 그동안 탈출시킨 인원은 3만 명도 채 안 되면서 영국군 지휘부는 망했어요를 외쳤으나 그 직후부터 폭풍치던 영불 해협이 갑자기 고요해지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철수 작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당연히 독일군은 이를 방치하지 않았고, Ju87, Ju 88 등 폭격기를 대거 투입하여 됭케르크 해안을 무차별 폭격하고 철수 선단을 공격, 다수의 선박을 격침시켰다.

그러나 작전 기간 영불 해협의 구름이 짙게 드리우면서 철수하는 선단에 대한 정확한 공격이 어려웠고, 무엇보다 본토의 기지에서 발진하여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도전해오는 영국 공군에 맞서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 폭격기들을 저지하기 위해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출격했고, 연료가 간당간당해질 때까지 싸우며 됭케르크의 대학살을 막아냈다.

당시 됭게르크 전투에서의 양측 항공력의 충돌은 영국 본토 항공전의 서곡이었다. 이 항공전을 영화화한 《Battle of Britain》(국내에서는 "공군 대전략"으로 소개) 은 철수 작전이 끝난 됭케르크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시작된다.

5월 29일부터의 기상변화로 영국군은 훨씬 양호한 상태에서 작전이 가능해졌다. 항구뿐만 아니라 해변에서도 탈출 병력의 승선이 가능해졌고, 바다가 고요해지면서 탈출선들의 항해 속도도 빨라졌다. 어느 귀족의 보트는 정원의 30배가 넘는 사람들을 태우고 무사히 도착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때 흘수선이 갑판까지 올라오는, 말 그대로 가라앉기 직전까지 갔다고. 어떤 선박은 해안에 지나치게 접근하다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자 오히려 그걸 역이용, 다른 선박을 접안접현시켜 안전하게 승선시키는 마치 임시 부두 같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5월 31일과 6월 1일에 걸쳐 병력 철수는 최고조에 달하였고, 이후 후위부대들의 철수가 이루어지다가 6월 4일을 기해 작전은 종료되었다.

6 작전 결과

6.1 철수작전은 성공

작전 기간 철수 병력 통계
5월 27일7,669명
5월 28일17,804명
5월 29일47,310명
5월 30일53,823명
5월 31일68,014명
6월 1일64,429명
6월 2일26,256명
6월 3일26,746명
6월 4일26,175명
총 합338,226명

9일 동안의 작전으로 영국은 총 338,226명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철수 병력은 영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 기적과도 같은 철수로 영국 국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후 영국 대륙 원정군은 재편성을 시작했으며, 프랑스와 벨기에 병력들도 각자의 망명정부 통제하에 재조직을 시작했다.[4] 작전 기간 동안 철수 선단은 구축함 9척과 대형 선박 9척, 그리고 소형 선박 200여 척이 침몰 및 파괴되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헤르만 괴링 전설의 시작 이는 기상 조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국 공군의 결사적인 반격과 엄호 덕분이기도 했다.

영국 공군은 작전 기간 동안 총 4,822소티를 띄워 무려 177기의 전투기의 손실을 입어야 했다. 프랑스 항복까지 영국이 서부 전선에서 입은 전투기 총 손실이 432기이다. 전체 손실의 40%를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잃은 것이다. 곧 있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생각하면 엄청난 전력 손실이었으나 결과론적으로 독일이 영국에 시간을 주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됭케르크에서 영국 공군이 보여준 투혼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Ju87에게 신나게 두들겨맞은 지상군 병력은 오히려 '공군 놈들은 독일 놈들이 폭격하고 있는데 어디서 뭐하는거냐면서 공군을 비난했다. 이런 반응이 나왔던 것은 공중전 자체가 철수 작전이 진행중인 해안가와 좀 떨어진 곳에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상공에서는 영국공군 전투기를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으로 그 결과 격추당한 조종사들이 철수 병력 대열에 합류하면 그야말로 싸늘한 시선에 푸대접을 받았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 작전에서 2차대전의 명전투기로 꼽히는 스핏파이어와 Bf109가 처음으로 맞대결을 벌였으며 조종사들은 드디어 "호적수"를 만났다는 반응과 함께 서로 상대편 전투기를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불어 영국 공군에서 투입한 전투기 디파이언트가 후방부 터렛형 무장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여 많은 독일 공군 조종사들을 당황하게 만들면서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6.2 연합군의 손실

냉정하게 보면 철수가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단기적으로는 서부 전선 전황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해 프랑스는 결국 항복했다. 철수 병력은 대부분의 장비를 버리고 와야 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영국군이 버리고 온 무기는 8~1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 데 충분한 양이었다.[5] 막대한 분량의 식량과 피복[6], 탄약, 야포 880문, 대구경포 310문, 대공포 500문, 대전차포 850문, 기관총 11,000정, 전차 약 700대, 오토바이 20,000대, 그리고 자동차 및 수송용 차량 45,000대 등이었다.[7] 이때 영국 본토에는 오직 2개 사단을 무장시키는 데나 충분한 장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철수에 성공한 병력들은 사실상 빈털털이 상태에서 재무장을 시작해야 했으나 영국의 산업력으로는 당장 쳐들어올 독일 공군에 맞설 전투기를 뽑기에도 벅찼다. 이들의 재무장은 결국 미국이 장비지원을 하는 걸로 해결했다. 덕분에 영국군은 1942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에 안잭군(ANZAC :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호주군 + 뉴질랜드군)을 투입해야 했다. 대신 철수에 성공한 병력은 1943년부터 연합군 반격의 선봉이 된다.

후위를 맡은 프랑스군 2개 사단, 약 34,000명은 결국 탈출에 실패하고 독일군에 항복했다. 이들의 엄호가 아니었으면 철수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됭케르크 철수에서 이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묻히고 있다.

7 작전 이후

한편 프랑스에서는 됭케르크 철수, 엄밀히 말해서는 철수 후에 다시 프랑스로 상륙해서 프랑스군을 돕지 않은 것을 영국의 배반이라며 격분했는데, 항복 직후 영국 해군이 캐터펄트 작전으로 메르크 엘 케비르 공격을 감행, 자국 함대를 박살내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북아프리카에 미군이 상륙해 프랑스군과 교전하자 "영국놈들이 머저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영국놈들하고 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군!"라면서 까댔으며, 비시 프랑스 군대 중에는 연합군과 죽자사자 교전한 부대도 나왔을 정도였다![8]

독일의 경우, 현장 지휘관들은 입술을 깨물며 멍청한 공격정지 명령을 까댔으나 이미 배 떠난 후였다. 물론 현장 지휘관들도 1일 정도의 휴식은 필요하다는 것은 동감하고 있었으나, 그 이후에도 계속 그 자리에 못박히는 것은 반대하던 상태였다. 게다가 철수병력의 전원 수장을 호언장담한 괴링은 할 말을 잃었고, 공격정지 명령의 장본인 아돌프 히틀러는, 사실 영국에 관대한 평화를 제의하려고 일부러 놓아준 것라며 책임회피에 나섰다. 뭐?

8 창작물에서의 등장

해리터틀도브의 대체역사물 <<일찍 일어난 전쟁>>에서는 그런 거 없다로 나온다. 독일군이 조기에 됭게르크를 점령하고 영,불 연합군은 편제를 정비해서 파리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쳐서 대독강화 및 소련전 합의까지 버티게 된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1938년에 2차 대전이 발발했고 전격전의 개념도 없고 1차 대전 초반의 재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김모세 병장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자 허경영이 나타나 바다를 가르는 기적이 일어난다.(여기까지는 웹 연재본) 출판본에서는 나아가 운하를 세우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연합군은 운하를 타고 철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작가의 정치적 성향을 고려하면 한반도 대운하4대강 사업의 패러디인 것으로 보인다.

겁스 무한세계에 나오는 세계 중 하나인 라이히-1에서는 독일이 됭게르크에서 영국의 철수를 막아 영국을 무찌르는데 성공하고 소련까지 격파했으며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을 공격하여 최종적으로 미독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으나 북대서양에서 결국 전선이 교착된다.



2007년,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어톤먼트>에 이 됭케르크 철수 작전이 나온다. 그 중 도입부의 5분 간의 롱테이크는 압권.

2015년 12월 29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차기작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다룬다고 워너브라더스에서 공식 발표했다. 제목은 <됭케르크> 그 후 문서는 항목 참조.
  1. 불로뉴쉬르메르. 볼로뉴가 아니다.
  2. 이들 중에는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의 2등 항해사 라이톨러도 있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배가 침몰할 때 승객들이 혼란에 빠지자 빈 총을 겨누며 제지하는 항해사가 나온다. 이 항해사가 라이톨러이다.
  3. 참고로 이때 영국 해군에서는 오직 총기함에만 게양 가능한 성 조지기가, 작전기간에는 작전에 가담한 모든 선박에 게양이 허용되었다.
  4. 정확히는 철수한 병력 중 프랑스 병력 10만여 명은 본토로 재수송되어 독일군의 6월 공세를 방어하러 나섰고, 수송선을 기다리다가 독불 간에 휴전이 맺어진 후 영국에 남은 잔여병들이 드골자유프랑스 군대에 가담한 것 뿐이다.
  5. 페도어 폰 보크 상급대장은 자신의 일기에 무수한 차량들, 야포, 전차와 각종 지상군 장비들이 좁디좁은 공간에 밀집해 있었으며 서로 뒤엉켜 폐기물 처리장을 방불케 했다(...) 여기 버려진 물자는 족히 1개 야전군 분량은 되었으며 적들의 장비는 휼륭하고 완벽해서 너무나 빈약한 장비를 가진 우리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라고 썼다.
  6. 여기서 노획된 영국 육군의 피복류들 중 데님으로 된 하절기용 전투복은 독일 해군이 일부 부착물을 교체해 잠수함 승조원용 함상 근무복으로 지급해 잘 써먹었다. 승조원들도 만족을 표한 덕에, 1943년에 노획 피복이 떨어지자 색상과 디자인을 약간 변경해 아예 독일 내에서 자체 생산까지 했다.
  7. 폭풍 속의 씨앗을 보면 작가와 동료가 프랑스제 트럭과 영국제 오토바이를 모는 내용이 있다. 요긴하게 잘 쓴 모양.
  8. 그런데 후대의 평가는 당시 프랑스군의 입장과 다르다. 대체로 프랑스군의 졸전과 전력을 제대로 운용하지도 못한 지휘부가 주로 까이고, 캐터펄트 작전이나 횃불 작전은 당시 연합군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