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역사

스페인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1 고대에서 로마까지

스페인의 역사
Historia de España

고대 - 레콘키스타 - 스페인 제국 - 현대
고대
바스크족로마 제국
/
히스파니아
바스크족



켈트족수에비 왕국
이베리아족알란 왕국반달족





동고트 왕국



그리스반달족
타르테소스인페니키아카르타고서로마비잔티움
~ 7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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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부터 이베리아 반도에는 켈트족과 이베리아인들이 다수를 이루며 살고 있었으나 카르타고인들을 필두로 한 지중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연안에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이미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카르타고 등이 식민도시를 건설하며 일찍이 진출을 시작한 지역으로서, 최초의 본격적인 내륙 개척은 유명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이유로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장 격렬한 전장이 되었다. BC 209년 로마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공격해와 카르타고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이 지역은 로마의 속주 히스파니아가 되었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의 반란군이 히스파니아를 중심으로 로마를 위협했던 탓에 공화정 말기까지 히스파니아 지역은 로마의 골치를 많이 썩히는 곳이었다. 이시기 이탈리아 반도에서 많은 까만머리의 로마인들이 히스파니아 반도로 이주하였다. 이들과 혼혈된 켈트-이베리아인들은 오늘날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제국 시대에 접어들자 히스파니아는 완전히 바뀌어, 유명한 오현제(五賢帝) 5명 중 2명(트라야누스(재위 98~117)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을 배출할 정도로 안정되고 번영한 곳이 되었다. 황제를 배출할 정도라는 것은 로마 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와 대등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번영했다는 의미가 되므로 제정기 히스파니아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히스파니아의 은 로마 경제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다. 로마의 기축통화가 은화였음을 감안하면 짐작이 갈만하다. 얼마나 캐댔는지 나중에는 제련하러 불 땔 나무도 없어질 정도였다는 듯. 그리고 히스파니아의 은광 고갈은 경제적 쇠락기에 접어든 로마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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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년 게르만족의 대이동 당시 서고트족이 이곳으로 진출해 서고트 왕국(414~711)을 세우며 로마의 시대는 끝났다. 이베리아에는 서로마 제국 붕괴 후 게르만계열의 수에비족 반달족 고트족이 들어왔다. 이 3종족은 이베리아를 두고 대결하다가 결국 서고트족이 승리하여 수에비족과 반달족을 복속시켰고 일부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로 이주했다. 6세기에는 동고트 왕국동로마 제국에 멸망당하자 동고트족 일부도 받아들였다. 많은 게르만 종족을 흡수한 서고트 왕국은 당시 서유럽만 보면 상당히 선진화된 문물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마 붕괴 직후의 중세 게르만 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게르만 직속의 독일이 아닌 스페인에 가장 화려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당시 게르만족 국가 특유의 왕위쟁탈전이 문제였다. 결국 이슬람과 내통하던 귀족의 도움을 받아 711년 우마이야 칼리파의 명령을 받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군대가 이베리아로 칼같이 들어오고 닥치는대로 약탈 방화가 이루어졌다. 서고트족의 문화는 결국 오늘 스페인에 미미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이때 일부 귀족이 북부로 도망가 그들의 왕국을 세우고 훗날 레콩키스타의 기반이 되었다. 이슬람의 정복이후 반달족(Valdals)의 땅이라는 뜻으로 반달루시아였으나 후에 아랍인들에게 알안달루스로 불리게 되었다. 약 780년 동안 스페인은 이슬람 세계의 영역 -다르 알 이슬람, 알안달루스- 이 되었다. 이때 이베리아를 정복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계 부족들과 동쪽에서 이주해 온 아랍, 베두인, 흑인들을 한데 뭉뚱그려 무어(Moor)인이라고 부른다. 무어는 유럽에서 어둡다는 뜻으로 쓰였다. 만약 그 많던 게르만족들이 스페인 땅을 이슬람에게서 방어에 성공했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스페인을 지배한 종족을 보자면 켈트-이베리아족(~기원전3C) → 로마인(~4C)→게르만족(~8C) → 무어인(~15C)순이다. 무어인 이후로는 레콩키스타로 현대 스페인의 시작이다.

이 시기 스페인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뤘으며 당시 유럽은 중세시대로 암흑기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코르도바, 톨레도, 세비야, 사라고사 등 많은 도시가 이 시기 이슬람의 중심지였다. 특히 750년 압바스 왕조의 반란으로 멸망한 우마이야 왕조의 잔당이 안달루스로 도망쳐 와 건국한 후(後)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수도였던 코르도바는 화려한 예술과 문화, 학문의 중심지로 바그다드 못잖은 번영과 명성을 떨쳤으며, 지금도 많은 문화 예술품을 남겨 그 찬란한 유산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하고 있다. 11세기 초에 후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뒤에도 모로코에서 발흥한 알-무라비뚠 왕조(Almoravids)와 알-무와히둔 왕조(Almohads)가 안달루스 지역을 지배했다.

2 스페인의 탄생과 발전

스페인의 역사
Historia de España

고대 - 레콘키스타 - 스페인 제국 - 현대
레콘키스타스페인 제국현대
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왕국카스티야 연합왕국




1






2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우마이야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아라곤 연합왕국
바르셀로나 백작령
후우마이야무라비트무와히드나스르
718년 ~ 1492년1492년 ~ 1931년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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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정복 이후 8세기 초반부터 북부의 험악하고 황량한 지형을 무기삼아 살아남는데 성공한 나바라 왕국아스투리아스 왕국, 그리고 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1세가 수복한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중심으로 국토회복운동이 시작되어 700년 이상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국토회복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현재 스페인 서북부의 레온 왕국, 북중부의 카스티야 왕국, 그리고 포르투갈 왕국으로 나뉘어지고, 바르셀로나는 아라곤 연합왕국으로 변하며 새로운 국가들이 국토수복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국토회복운동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700년의 역사 동안 꾸준히 수행되지는 않았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계속 이어진 것이 맞지만, 같은 기독교 국가들끼리도 전쟁을 벌인 적이 없지 않았고 이슬람 세력끼리도 갈갈이 찢겨져서 서로 반목이라도 일어나면 기독교 국가와 동맹을 맺고 상대방을 치는 플레이를 자주 선보였다.(…) 포르투갈 백작령이 왕국임을 선언하며 레온 왕국에서부터 분리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사실 이슬람 세력의 영토가 줄어든 것은 전면전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런 식으로 대신 싸워주고 대가로 땅을 준 이유가 더 크다.(…) 기근이나 페스트같은 질병이라도 창궐하면 즉각 전쟁은 휴전 상태에 돌입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085년 톨레도 점령,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의 승리 등으로 인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1469년 10월, 가장 강대한 양대 세력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레온-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은 결혼을 통해 통일 에스파냐(스페인) 왕국을 성립시켰고, 1492년 이슬람 왕국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가 항복하여 무혈 함락되면서 국토회복운동은 711년 이래 무려 782년만에 종료되었다. 무어인들 대다수는 이슬람 세력이 수세에 몰리는 동안 원래 살던 곳으로(아랍인들은 아라비아나 이집트로, 베르베르인들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고, 그라나다가 항복할 때까지 이베리아 반도에 남은 소수는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 되어 거의 기독교로 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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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과 영토수복을 계기로 스페인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1492년 10월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었다. 스페인은 앞선 항해기술을 활용해 중남 아메리카를 모조리 선점했고, 이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덕분에 유럽 최대의 부를 누리게 되었다.[1] 유럽에 인플레이션을 몰고 오고 심지어 당시 세계최고의 은 생산국이던 일본과 경쟁하여 악영향을 미쳤다.

한편 가톨릭 공동왕으로 통일 스페인 왕국을 다스렸던 페르난도 2세이사벨라 1세는 헌신적으로 나라를 다스려 강력한 스페인 성장의 밑거름을 뿌렸다. 공동왕은 카스티야라는 전제주의에 가까운 나라와 아라곤이라는 입헌주의에 가까운 나라, 즉 상이한 두 국가를 '명목상' 통합시켰고 대귀족들의 정치적 파워를 약화시켰으며 교회에 대한 왕권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켰고 재정과 사회문제를 개혁했다.

그러나 이 '공동왕(1479~1504)' 시기에 뿌려진 씨앗은 이후 두고두고 스페인을 괴롭혔다. 목축을 국가경제의 뿌리로 삼았기 때문에 농업의 발전은 급속히 정체되었고 자영농의 성장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2] 또한 1478년 설치된 종교재판소는 스페인 사회와 정치 전반에 엄청난 퇴행을 몰고 왔다. 종교재판소는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과 무슬림을 학살, 추방하였고, 덕분에 이후 스페인의 경제 인프라는 후진적인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스페인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신대륙에서 유입된 부였다(자원의 저주). 신대륙의 금과 은은 높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빈부격차를 강화시켰다. 따라서 귀족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해 파워 게임을 할 능력이 충분했다. 이때부터 스페인의 경제는 곪아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모든 문제는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의 스페인 군주들이 치러야 할 문제였다.

한편, 통일 스페인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였던 '공동왕'의 후계자 후안이 어릴 때 병으로 사망하고, 당시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왕비였던 장녀 이사벨라가 출산 중 사망했기에 이사벨라 1세 사후 차녀인 후아나에게 계승권이 돌아가면서 스페인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 왕조를 계승하고(오스트리아 항목 참고), 1516년 어머니 후아나 여왕와의 공동통치 형태로 스페인의 국왕이 된 카를로스 1세가 1519년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 후, 전 합스부르크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피선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명목상 선출제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위를 겸직하여 전 유럽의 세력 구도를 뒤바꿔 놓으며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영토만 보면 이 때가 스페인-합스부르크의 최고 전성기였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 루터의 종교 개혁과 퍼져만 가는 독일에서의 개신교 사상, 강력한 황제의 출현을 전혀 바라지 않는 독일 제후들과의 계속된 분쟁 등으로 식민지에서의 막대한 수입을 깡그리 지출한 탓에 국고로 돌아갈 돈이 없어 파산한 경우도 있었지만 식민지에서 차출하면 그만이였다. 1556년 펠리페 2세의 즉위와 함께 최전성기를 맞았지만 몰락도 함께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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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스페인은 오늘날 베네룩스 3국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유한 알토란을 유지하면서 레판토 해전(1571)에서 오스만 제국을 패배시켜 상징적인 제동을 거는데 성공 [3] 하고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계승(1580)하는 등 절정의 전성기를 달렸으나, 억압적인 통치와 전비를 감당하기 위한 가혹한 과세 정책으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1581~1648)을 유발시켰고, 전 네덜란드가 전화에 휩싸이자 이는 곧 스페인의 경제력을 극한으로 몰고갔으며 결국 1575년 두번째 파산이 발생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다시피 네덜란드는 지형이 정말 비정상적이므로 게릴라성에 능한 네덜란드인들은 영국·프랑스까지 껴들어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펠리페 2세와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광신적이고 전투적인 가톨릭 신앙은 펠리페 2세의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당시 스페인이란 국가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한다. 애초에 스페인이란 나라는 레콩키스타를 통해 언어, 문화, 정치 체계가 모두 달랐던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등의 이베리아 반도의 소국들이 통합되어 만들어 진 나라이다. 15세기 후반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한 나라로 통일 될 때도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서의 통합만 이루어졌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정책이 다른건 물론이오, 당장 카스티야인과 아라곤인들은 서로를 외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4]. 당장 이베리아 본토 내에서만 해도 이렇듯 정치적 통합에 장벽이 많았는데, 아라곤령의 남이탈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지였던 플랑드르, 부왕 치세에 더욱 확장된 식민지, 펠리페 2세의 재위 중 편입한 포르투갈까지 포함한다면 '스페인'이란 나라의 실질적인 정치적, 사회적 구심점은 레콩키스타와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십자군적 투쟁이라는 공통적인 역사적 경험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스페인이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치체로서 자살에 가까운 행위였으며, 펠리페 2세의 유별난 광신성은 이러한 근본적인 역사적 문맥에 개인적인 성향이 가미된 것 정도라 봐야 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스페인의 종교적 열기는 정치적, 사회적 차원으로도 그대로 이어져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트렌티노 공의회보다 50년 가량 앞선 가톨릭 군주와 시스네로스 추기경시절에 이미 성직자의 교구 부재 문제, 사제들의 무지함, 교회 내의 위계 질서 확립 등 기존 교회가 시달리고 있던 많은 문제를 혁파하고 자체적인 재번역판 성경 출간[5], 알칼라 대학 설립, 인문주의 학문적 토양에 기반한 신학 교육 체제 정비 등 훗날 가톨릭 교회 전체가 직면할 개혁 자체를 대다수 이룬 상태였다. 종교 개혁의 시대에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가톨릭 세력이 [6] 스페인의 리더쉽을 따른건 이러한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스페인이 선례를 보여주어 여러 면에서 따를 만한 입장에 되어 있었던 점 또한 크다.

실제로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제유럽 국가 중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은 다른 국가들이 시달렸던 식량 폭동도 적었고, 전통적 자치권을 둘러싼 아라곤과 남이탈리아의 단편적 반란들을 제외하고는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었고, 많은 동시대 스페인인들은 "스페인의 안정은 종교적 안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식의 기록과 발언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애초에 종교개혁이 휩쓸고 간 16세기, 17세기 유럽은 종파적 배타성이 일반적이었다. 종교가 달라? 이단이라고? 그럼 죽여야지! 종교적 관용은 네덜란드, 베네치아, 독일의 자유시들 같은 상업적 여건 때문에 공존이 불가피한 곳에만 이루어졌다. 배타성과 탄압이 일반적인 시대에 현대적 가치를 들이 대는 점부터 펠리페 2세와 황금기 스페인에 대한 부당한 견해라고 보는 것이다. 30년 전쟁 당시의 프랑스나 작센 선제후국처럼 동시대에 종교적 여건과 분리된 실리 추구 정책을 폈거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제국 처럼 종교적 관용이 그 특징인 동시대의 다른 사례들도 있지만, 이러한 나라들과 스페인의 경우는 원론적으로 그 문맥 자체가 다른게 바로 저 위의 역사적 전통에 있다.

그리고 기억하자. 현대적 가치관에 따르면 관용과 다양성의 긍정적 선례로 평가받는 위의 예외적인 국가들이지만, 실제로 전성기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예수회의 학문적 지원을 등에 업고 폴란드를 스페인,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같은 공격적이고 본격적인 카톨릭 단일 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귀족들, 트란실베니아헝가리의 개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종교 개혁을 폴란드 내에서도 확산 시키려는 개신교 귀족들, 그리고 양쪽 라틴계 기독교들 사이에 쩌리가 되지 않고 정치적, 종교적 자치를 확보하려는 현대 우크라이나 일대의 정교회 계열 코사크 귀족들이 정신없이 삼파전을 벌이면서 국력의 막대한 부분을 손실했다 [7].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치하의 종교적 관용은 애초에 비무슬림들의 열등함과 차별을 기반으로 깐 불평등한 공존이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 아니다. 베네치아, 함부르크, 리가 등 종교적 관용의 보루로 평가 받는 도시 국가들도 역시 경제적 필요에 따른 이교도의 존재가 허락을 받은 거지, 내부적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여 공권력도 은근슬쩍 동조한 반개신교, 반카톨릭, 반유대인 폭동은 빵값 오를 때 마다 주기적으로 터졌던 이벤트. 기본적으로 애초에 정교 분리란 개념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에 스페인만 유별나게 광신적이라고 까는 건 핀트가 어긋난 평가다.

게다가 애초에 이 종교 개혁의 시대 당시 가톨릭 세력의 반격의 핵심이 된 트렌티노 공의회의 성직자의 교구 참석, 면죄부 판매 문제, 사제 교육의 문제 등 많은 규항 자체가 공의회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파격적인 정치적 지원에 힘 입은 스페인 출신의 주교들이 옛날 방식 그대로의 교회 구조를 유지하고 싶었던 친 교황청파와 프랑스 주교들을 상대로 치열한 키배를 벌여 규정 된 반쯤은 스페인이 주도한 개혁이었던 만큼, 이 당시 스페인 입장에서 가톨릭 신앙과 국가적 행보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무슬림들이나 들끓는 이베리아 반도 촌구석에 박혔던 촌동네에 불과 했던 카스티야가 르네상스와 근세에 들어와 유럽 정치 전체를 좌우지 할 만큼의 패권 국가로 부상한 동기가 카톨릭 반격의 선봉에 있었던 건데 패권 국가가 자신을 패도로 올려 준 길을 버린다는 거 자체가 말이 될까?

프랑스의 경우야 위그노 전쟁이라는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정신나간 종교 내전을 겪고 종교 문제 자체에 질린 만큼 질린 후에야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과 국가적 정체성의 분리가 이루어 질 수 있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귀족들의 자치적 전통이 워낙 강해서 이렇게 종교(뿐만 아니라 사실 국정 모든 일에 관련해)와 관련된 중앙의 확고한 개입 자체가 불가능해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 졌을 수 있었던 것이지, 이러한 특별한 케이스 몇몇을 유럽 전반에 대입하면 곤란하다. (되려 이 종교적 관용의 가장 큰 사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17세기 초반 이후 중앙에서 포괄적인 차원은 아니지만 (중앙 권력 자체가 없으니) 사회적인 차원에서 비가톨릭 교도들에게 대한 차별이 만연해 졌고, 시기스문드 3세의 치세 때는 이러한 중앙 권력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가톨릭 세력의 강화를 추진하다가 대대적인 귀족들의 반란 때문에 철회해야 됐다. 유럽 전체의 정치적인 구조 자체가 중세적 느슨함에서 근대의 중앙 집권 국가로 전환하던 전근대 시기에서, 이렇게 역사적인 큰 여건 자체를 거스르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사실을 고려하면 스페인의 광신성 또한 그 자체적인 문맥에서 어느 정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메리카의 막대한 부에 군침을 삼키며 해상패권을 호시탐탐 노리던 잉글랜드 왕국(당시 국왕은 엘리자베스 1세)이 얼씨구나 여기에 끼어들면서 양국간에 전면충돌이 발생하였는데, 1588년 스페인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 무적함대가 칼레 해전에서 영국-네덜란드 해군과 해적에 패배하면서 세번째 파산과 함께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스페인 제국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이후 영국, 네덜란드를 비롯해 신생 모직공업의 강자들의 등장으로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스페인 본토 경제의 붕괴조짐이 보였다.

3 스페인의 암흑기와 부흥 그리고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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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싶은 것을 하느님에게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풍토(風土)를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을 들어주었다. 다음에는 가장 좋은 과일과 밀을 부탁했고, 가장 뛰어난 말과 칼도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들도 모두 들어주었다. 그들은 다시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춤을 부탁했고, 또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가장 용감한 남성을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도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좋은 정부(政府)를 부탁했다. 그러자 당황한 성모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사들이 하루도 천당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암흑기 당시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는 우화.

펠리페 2세의 치세와 죽음(1598년) 이후로 위그노 전쟁, 30년전쟁(1618~1648) 등과 같은 유럽에서의 분쟁에 계속해서 간섭하면서 식민지의 영토와 대서양을 횡단하는 상선들이 계속해서 영국이나 네덜란드에게 약탈당한 탓에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펠리페 2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3세펠리페 4세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총신)들에게만 정치를 맡겨 국정은 파탄에 이른다.[8] 그 중에서도 몇 없던 능력있고 출중한 관료들의 개혁 시도는 결국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17세기 중후반에는 국왕 카를로스 2세(재위 1665~1700)가 36년 동안 통치하였다. 카를로스 2세는 능력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합스부르크 왕조에서 보기 드물게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 전 군주들은 총신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카를로스 2세는 총신을 두지 않고 직접 통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귀족 과두제에 가까워진 스페인 왕국을 왕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 고위 귀족들은 카를로스 2세를 적대시하였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카를로스 2세의 치세는 실패로 끝났다. 거기에다 그는 성불구자였기 때문에 자손조차 남기기 못하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의 불씨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계승전쟁 이후 즉위한 펠리페 5세의 에스파냐-부르봉 왕가의 통치 덕분에 막장 상황은 어느정도 정리되었고 18세기 초반부터 에스파냐는 중흥을 시작하였다. 부르봉 국왕들은 프랑스의 예를 본받아 행정을 강화하며 각종 개혁[9]을 시행하였다. 또한 유럽과 신대륙의 무역을 장려하고 국내 발전에 힘써 100여년 동안 스페인은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카를로스 3세 시기에 루이지애나도 획득하는등 중흥하였다. 하지만 카를로스 1세 ~ 펠리페 2세 시기 초기의 합스부르크가문만큼의 영광은 아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면서 본토가 게릴라 전쟁의 여파로 독일 못잖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10] 또한 나폴레옹 전쟁 도중인 1810년에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의 본국 점령 등 이 세가지 주요인들로 인해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멕시코의 미겔 이달고 신부와 모렐로스 신부, 콜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와 아르헨티나 등지의 산 마르틴 장군 등의 활약으로 인해 에스파냐가 식민 통치를 원할히 하기 위해 설치한 부왕령[11] 체제는 붕괴되어 현 남아메리카 국가들로 독립하게 된다.

이후 1833년에는 왕위 계승을 놓고 3살 먹은 여왕 이사벨 2세(재위 1833~1868)를 지지하는 이사벨리노스파와 이사벨 2세의 삼촌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대공을 지지하는 카를리스타와의 내전이 벌어졌고 이사벨파가 승리함에 따라 자유주의적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에스파냐는 전 인구의 2/3이 농경에 종사하는 국가였고, 자유주의자들이 펼친 개혁책은 이상주의에 입각한 비현실적인 정책들이었다. 이렇듯 이사벨 2세를 옹립한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능과[12] 여전히 잔존한 카를리스타의 준동 등으로 에스파냐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 번은 혁명으로 공화국이 성립되었다가 쿠데타로 도로 왕정이 복고되고 무정부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등 나라의 상황이 극도로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12세(재위 1874~1885)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간신히 나라 꼴을 보존하였다. 그러나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푸에르토리코필리핀을 넘겨주고 나머지 태평양 식민지는 독일에 팔아 넘기는 등 대부분의 식민지를 처분하여야만 했다.[13]

가까스로 남은 모로코 식민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진압에 실패하고 투입된 군대가 전멸 수준까지 치닫자 1923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프리모 데 리베라가 통치를 시작하였으나 이 군사 정권조차도 일련의 성공 후 1929년에 밀어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붕괴하고 이후 1931년 군사 정권을 지지하던 왕가를 내쫓고 공화국으로 재출발했다. 하지만 공화정 이행 뒤에도 경제 위기와 왕당파의 준동으로 인해 혼란을 거듭하다 1936년 선거에서 좌파와 중도 세력의 연합 전선인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집권 인민전선 내부의 좌파와 중도 세력간은 물론이고 좌파 내에서도 무정부주의, 사회민주주의,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등의 춘추전국식 의견들이 많았고 주변국 누구도 유럽 안에서 좌파정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나라는 없었다.

한편 인민전선 집권후 이에 반발한 군부와 기득권층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 내전(1936~1939)이 발생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이 전쟁에 관심을 끊었으나, 독일, 이탈리아, 소련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해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과 사회주의간의 대리전으로 비화되었다. 또한, 당대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인민전선 의용군에 자원해 전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대표적이며 이 시기를 다룬 유명한 영화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있다. 당시 독일 나치는 대량의 공군을 투입하여 최초의 현대적인 공습을 실험장으로 선보였고 이에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이를 게르니카라는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4 프랑코 독재와 민주화

1939년 3월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가 이끄는 쿠데타군은 마드리드를 제압하고 내전을 종식시켰다. 이후부터 프랑코에 의한 철저한 철권통치가 시작된다. 우습게도 프랑코는 내전에서 독일의 많은 지원을 받았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면한 얼마 안 되는 국가로 남았다.[14][15] 처음에는 파시즘 국가란 이유로 서구권에서 따돌림을 받던 스페인도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의 대서양 전략의 구도에 필요했던 덕분에 점차 관계개선을 해 나갔고, 프랑코는 철권통치로 인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권좌를 굳건히 지키다 천수를 누리고는 1975년 11월 병사하여, 뒤이어 부르봉 왕조가 복위[16], 후안 카를로스 1세(재위 1975~현재)가 국왕으로 취임하고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후안 카를로스 1세가 퇴위를 발표했다.지난 6월 2일 스페인에서 입헌군주제 폐지 시위가 벌어졌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말기에 마지막 식민지인 적도기니 서사하라의 독립을 승인하여 마지막 해외 식민지들을 정리하였다.

현재 프랑코의 무덤은 마드리드 근교 산로렌소데엘에스코리알(San Lorenzo de El Escorial)에 1957년에 프랑코의 명령으로 건설된 전몰자의 계곡(Valle de los Caidos, 바예데로스카이도스)에 안치되어 있다.[17] 마드리드의 관광명소중 한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20만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프랑코는 한국으로 치면 박정희에게 드리워진 격렬한 논란이 한 열배 쯤 더 심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것도 독재자에 대한 향수병에 시달리는 스페인 내부에서나 그 정도로 평가해주지,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이미 국제연합 인권 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유럽연합 등에서 프랑코 정권을 비난하며 그에 대한 모든 기념과 추앙을 자제할 것을 스페인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즉 그렇게까지 평가가 상반되었다고 할 것까지야 없다. 나쁜 의미로는 '뭔가 입체적으로 보이기는 해도 그래 봤자 막장 파시스트 독재자'라는 결론 밖에 안 나온다는 소리다. 요즘도 스페인 시골 마을에 가면 가정집에 프랑코의 사진이 걸려있는것도 종종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세비야 등 바로 그 프랑코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고도 좀비마냥 살아 남아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한 거대 노조들이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대도시에서 프랑코 후빨 함부로 하다가는 그것 또한 책임 못진다. 36년의 철권통치 하에서 무수한 스페인 자유주의자와 사회운동가, 민주주의 인사들이 철저하게 탄압당하고 희생된 역사는 스페인 현대사의 흑역사로 묻히게 되었다. 최근 조심스럽게 검증이 시작되는 분위기이지만… 언제 끝날지는, 한국의 친일파 청산 문제만큼이나 요원하다.

1981년에는 군부에 의해 반동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방송으로 군부를 질타하여 불발로 끝나게 되었다. 덕분에 프랑코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 국왕이란 초기의 평가를 뒤엎으며 후에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조차 방송에서 "국왕 만세"를 외칠 정도에 이르렀으니 그 인기의 상승폭을 짐작케 한다. 프랑코 사후의 스페인을 대대적으로 혁신하는 데에 앞장선 모범적인 국왕으로, 왕비는 그리스 왕가 출신의 소피아 왕비이며 그녀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아토차 역 옆에 있다. 유명한 소장품으로는 파블로 피카소게르니카가 있다. 물론 스페인 왕국이 재현되었지만 옛날처럼 마드리드 왕궁에 살지 않고 마드리드 근교 별장에서 생활한다. 마드리드 왕궁은 행사때만 이용한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인기를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2007년 산티아고에서 열린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이다. 포르투갈,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의 두 정상들과 라틴 아메리카 정상들이 모여 회의하는 장소에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함께 실질적인 남미의 맹주 중 하나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계속 미제의 앞잡이 운운하며 회의를 지연시키자 "거 입 좀 닥치지!?"[18] 하고 꾸중(?)한 사건이 유명.영어 자막이 깔린 동영상. 점잖은 스페인어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이 장면을 녹음한 것이 벨소리로 큰 인기를 모았으며, 스페인어권 인구(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에서 칠레-아르헨티나까지 수억에 달한다) 전체의 상징적인 인물이 스페인 국왕이기에, 타 스페인어권 지역에서도 벨소리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2014년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펠리페 6세 국왕에게 양위하였다. 즉위식 때 반대파도 있었지만 환영인파가 훨씬 많았고 국민들은 새로운 이미지를 바라고 있다. 아직까지는 상당수의 스페인 국민들에게 왕실은 옛 영광을 상기시키고 재현할 수 있는 상징물로 바라보고 있다.

한편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약 40년간 국민당과 사회당이 주거니 받거니 이어오던 양당체제가 붕괴되고 좌파 신생정당 포데모스와 중도우파 신생정당 시우다다노스(Ciudadanos)가 제 3세력으로 대약진하여 현 라호이 총리의 보수당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5 참고

  1. 그 결과, 유럽에 가격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2. 모직용 양모를 생산하는 의 품종중 가장 대표적인 메리노 이 스페인의 품종이다. 12세기 이 지역에 무어인들이 도입한 양의 품종으로 당시 똑같이 양모산업을 진흥하던 영국이 이 품종을 도입하기 위해 갖은 첩보작전을 펼치던 전력이 있을 정도다.
  3. 하지만 1574년 튀니지를 잃어버리면서 이 승리의 위상은 빛이 바랬다.
  4. 특히 아라곤령에서 지방 관리들이 종교 재판관들의 마을 출입 등을 불허 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 때마다 내새운 명분이 외국인 관리들의 불법 침입이라는 점만 해도 그렇다.
  5. 이게 그 유명한 콤플루텐스 경으로, 기독교 초창기 성 히에로니무스가 발간한 불가타 경 이전 유럽에서 최초로 신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재번역 한 판본이다
  6. 그나마 프랑스 내에서도 devots, 즉 '신실파'라 불리는 친스페인 급진 가톨릭 세력이 위그노 전쟁 이후 리슐리외의 집권 까지 프랑스 정계 내의 큰 한 축이었다.
  7. 당장 대홍수를 불러 일으킨 보흐단 흐멜니에츠키의 코사크 대봉기도 그렇고, 반왕실 반란들이나 스웨덴, 모스크바 대공국이 연루 된 왕위 계승 전쟁들 같은 동시대 이중 공화국의 국내외 분쟁들에는 반드시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가 있었고, 충분히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정치적 차원에서 교섭하거나 적당히 타협해서 넘어 갈 수 있었던 문제들도 종교적 단초가 들어가 더 격렬한 분쟁으로 심화 되는 등, '관용을 통해 종교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이중 공화국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중유럽 사학계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현대에는 거의 논파 된 테제이다.
  8. 펠리페 3세는 레르마 공작에게, 펠리페 4세는 가스파르 데 구스만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 하였다. 구스만은 당시 자신이 비록 세도가이긴 했어도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개혁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레르마는 매관매직과 코드 인사로 국정을 말아드셨다...
  9. 프랑스를 본받아 중앙집권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에스파냐는 지역색이 매우 강하고 전통적으로 각 지역별로 자치가 행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완전한 중앙집권은 실패하고, 왕조의 영향력이 카스티야를 넘어서 옛 아라곤 지방을 장악하는 데서 끝났다.
  10. 고야의 그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이 이 때를 배경으로 한다.
  11. 에스파냐는 라틴 아메리카에 4개의 부왕령을 설치하였다. 리오 데 라플라타(아르헨티나, 칠레/1776년),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와 현 미국의 남부 일부/1535년),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 등지/1717년), 페루(1543년)의 4개이다.
  12. 당시 스페인의 정치체제는 귀족 공화정에 가까웠고, 왕은 이름뿐인 존재였다는 점에서 여왕의 실책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사벨 2세는 부왕의 급사로 3세에 즉위하였기에 친정을 할 수가 없었다. 내전중에는 모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조언자들이 섭정하였고, 카를로스파를 굴복시키고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물러난 이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녀를 대신해 통치하였다.
  13. 스페인의 식민지배는 종교적으로 막장으로 알아줘서 필리핀,중남미 국가등등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 대부분이 스페인처럼 가톨릭이 대다수인 나라가 되었다..
  14.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되 본격적인 참전은 무리라고 프랑코가 히틀러의 요청을 거부했다는 설과 사실 프랑코는 히틀러가 처음에 잘 되니까 참전하고는 싶었는데 전쟁에서 쓸만하게 스페인군을 근대화하는 것이 비용이 엄청나 프랑코도 히틀러도 포기했다는 설(즉 참전해봤자 제대로 도움이 안 될거라는 판단)이 있다.
  15. 엄밀히 말하면 그래도 빨갱이는 사냥해야겠다며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1개 보병사단을 보내긴 했다. 의용군을 보냈을 때는 잠시 비교전국으로 상태를 변경했다가 훗날 독일이 밀리고 고 서방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재빨리 철수시켰다.
  16. 본문 하단이나 후안 카를로스 1세 항목에서 알수 있듯이 프랑코가 죽기전에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지명해두었었다.
  17. 공화국 군인 포로 1,200명을 강제동원해 지은 성당에 묻혔다. 그런대 이 성당의 총 길이가 교황청이 성당 건축에서 한도로 여기는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길게 나오자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길이보다 1미터 짧아지는 지점에 격벽을 짓고 '여기부터 성당입니다'라고 적힌 안내문을 걸었다.
  18. 원문 ¡¿Por qué no te callas?! 로망스어족에 대하여 조금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는 3인칭이 아니라 사적인 2인칭이다. 굳이 쓸데없이 근엄하게 번역할 거 없이 본인이 의도한 대로 몹시 인포멀하게 (...) 번역하는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