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납

치청절도사
전임 이정기이납
781년~793년
후임 이사고

李納
(759 ~ 792)

1 개요

당나라의 장수이자, 이정기의 아들로 아버지의 관직을 계임받아 치청절도사에 올랐으며 제나라 제2대 왕이다. 제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 생애

이납은 아버지 이정기를 항상 보좌하였는데 아버지 밑에서 청주자사와 조주자사를 맡아 후계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임했다. 781년, 4진의 난을 주도하며 당의 조주를 압박하고 대운하를 차단하던 이정기가 향년 50세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이납은 이정기의 죽음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주위사람들을 입막음했다. 이납은 이듬해인 782년에 국호를 제나라로 선포하고 아버지의 15주와 절도사를 계위했다. 그런데 이납과 함께 반당세력이었던 전열이 당군에게 포위당하자 이납이 곧바로 위준의 1천여 명 군사를 급파해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하동절도사 마수가 이들을 무찔렀다. 이에 이납의 종숙부 이유, 이사진, 이장경 등이 당나라에 내투했다. 이납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이들을 공격하나 당 조정군이 여세를 몰아 반격하여 크게 패배했다. 궁지에 몰린 이납은 당덕종의 번진 제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회서절도사 이희열과 주도, 왕무준 등이 당에 대해 동시에 난을 일으켰다. 당의 요충지인 변주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강회에서 상공하는 조운선단을 차단하는 등 활발히 당에 저항했다. 또한, 소금, 철, 주석 등을 생산하고 백관을 설치, 제왕을 두는 등 나름 국가의 모습을 이뤄가기도 했다. 아버지 이정기가 그랬던 것처럼 신라, 발해와의 교역권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했다. 이로써 제나라가 소규모 왕국으로 자리잡았으며 당시 위박, 성덕, 노룡, 치청 중에서 가장 강성한 번진으로 군림했다. 이후 당나라에 순종하는 제스쳐를 취해 이희열을 진주에서 대파시키도 했다. 이에 따라 당 조정에서는 운주를 승격하여 대도독부로 승격시켜주기도 했다. 792년, 향년 35세에 졸했다. 슬하 5남으로 이승무(李承務),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 이사현(李師賢), 이사지(李師智)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