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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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글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2 해례본의 창제 원리 설명

공식 설명서인 해례본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2.1 자음

正音二十八字,各象其形而制之。정음 28자는 각각 그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다.
初聲凡十七字。초성은 모두 17자이다.
牙音ㄱ象舌根閉喉之形。아음(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고,
舌音ㄴ象舌附上腭之形。설음(혓소리) ㄴ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떴고,
脣音ㅁ象口形。순음(입술소리) ㅁ은 입의 모양을 본떴고,
齒音ㅅ象齒形。치음(잇소리) ㅅ은 이의 모양을 본떴으며,
喉音ㅇ象喉形。후음(목구멍소리)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떴다.
ㅋ比ㄱ,聲出稍厲,故加劃。ㅋ은 ㄱ보다 소리 남이 약간 더 거세므로 획을 가하였다.
ㄴ而ㄷ,ㄷ而ㅌ,ㅁ而ㅂ,ㅂ而ㅍ,ㅅ而ㅈ,ㅈ而ㅊ,ㅇ而ㆆ,ㆆ而ㅎ,其因聲加劃之義皆同,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ㆆ→ㅎ도 소리에 따라 획을 더한 뜻은 모두 같다.
而唯ㆁ爲異。半舌音ㄹ,半齒音ㅿ,亦象舌齒之形而異其體,無加劃之義焉。그러나 오직 ㆁ은 달리 했다. 반설음 ㄹ, 반치음 ㅿ도 혀와 이의 모양을 본떴으나[1] 형태는 다르게 해, 획을 더한 뜻은 없다.

말하자면 자음은 발음 기관을 본따 기본자를 만들고 그 뒤에 가획을 하였고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이체자라는 녀석들이 있지만 그 문자 형태의 기원은 발음 기관의 상형에 있다는 것을 정의해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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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음(연구개음), 설음·치음(치경음), 순음(양순음)을 발음할 때 조음기관 사이에서 폐쇄가 일어나는 부분을 각각 강조한 것. 조음점의 포인트가 잘 잡혀 있어 한글이 굉장히 단순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음과 설음은 혀를 옆에서 본 모양을 본뜬 것인데, 당시에 MRI 따위의 기계가 없었음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수준. ㅅ이 이의 앞모습을 본뜬 것인지 옆모습을 본뜬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참고로 ㅅ을 이의 앞모습을 본뜬 것이라고 생각할 경우, 한글의 ㅁ·ㅅ과 한자의 口(입 구)·齒(이 치) 안쪽의 ㅅ 모양은 상형 원리가 완전히 같다.

2.2 모음

자음과 달리 모음 부분의 설명은 꽤 난해한 편이다.

中聲凡十一字중성은 모두 11자이다.
ㆍ舌縮而聲深,天開於子也。形之圓,象乎天地ㆍ는 혀가 오그라져 소리가 깊으니[2] 하늘이 子時(자시)에 열린 것과 같이 맨 먼저 만들어졌다. 둥근 모양은 하늘을 본떴다.[3][4]
ㅡ舌小縮而聲不深不淺,地闢於丑也。形之平,象乎地也ㅡ는 혀가 조금 오그라져 소리가 깊지도 얕지도 않으니[5] 땅이 丑時에 열린 것처럼 두 번째로 만들어졌다. 평평한 모양은 땅을 본떴다.[6]
ㅣ舌不縮而聲淺,人生於寅也。形之立,象乎人也ㅣ는 혀가 오그라지지 않아 소리가 얕으니[7] 사람이 寅時에 생긴 것처럼 세 번째로 생겼다. 일어선 모양을 한 것은 사람을 본떴다.[8]
此下八聲,一闔一闢이 밑의 여덟 소리는 하나는 합[9]이고 하나는 벽[10]이다.
ㅗ與ㆍ同而口蹙,其形則ㆍ與ㅡ合而成,取天地初交之義也ㅗ는 ㆍ와 같으나 입이 오므라지며, 그 모양은 ㆍ와 ㅡ[11]가 어울려 이룸이며, 하늘과 땅이 처음 어우르는 뜻을 취하였다.
ㅏ與ㆍ同而口張,其形則ㅣ與ㆍ合而成,取天地之用發於事物待人而成也ㅏ는 ㆍ와 같으나 입이 펴지며, 그 모양은 ㅣ와 ㆍ[12]가 어울려 이룸이며, 우주의 작용은 사물에서 나지만 사람을 기다려 이루어지는 뜻을 취하였다.
ㅜ與ㅡ同而口蹙,其形則ㅡ與ㆍ合而成,亦取天地初交之義也ㅜ는 ㅡ와 같으나 입이 오므라지며, 그 꼴은 ㅡ와 ㆍ[13]가 어울려 이룸이며, 역시 하늘과 땅이 처음 어우르는 뜻을 취함이라.
ㅓ與ㅡ同而口張,其形則ㆍ與ㅣ合而成,亦取天地之用發於事物待人而成也ㅓ는 ㅡ와 같으나 입이 펴지며, 그 꼴은 ㆍ와 ㅣ[14]어울려 이룸이며, 역시 우주의 작용은 사물에서 나지만 사람을 기다려 이루어지는 뜻을 취하였다.
ㅛ與ㅗ同而起於ㅣㅛ는 ㅗ와 같으나 ㅣ에서 시작되고[15],
ㅑ與ㅏ同而起於ㅣㅑ는 ㅏ와 같으나 ㅣ에서 시작되고,
ㅠ與ㅜ同而起於ㅣㅠ는 ㅜ와 같으나 ㅣ에서 시작되고,
ㅕ與ㅓ同而起於ㅣㅕ는 ㅓ와 같으나 ㅣ에서 시작된다.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가 기본자이며 그 기본자는 각각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으므로 이 역시 상형자이다. 동양철학에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며(평평하며) 사람은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삼재에 대응되는 기본자를 바탕으로 초출 자와 재출자를 만들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물론 이 대목은 그 만든 이유를 철학적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국어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양철학은 어렴풋한 그 무엇일 뿐...

실은 이런 떡밥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해례본의 설명 자체, 특히 모음 부분의 설명이 아주 어렵다.

현재까지는 해례본의 문장 하나하나가 어떤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 명쾌하게 해석되고 있지 못하다. 자형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과 이 구체적인 분석의 바탕이 되는 당시의 언어학적 이론에 대한 이해, 여기에 다시 이 언어학적 이론의 바탕이 되는 동양철학적 맥락 부여가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들이 이들을 전부 통합해서 세밀한 부분까지 깔끔하고 꼼꼼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학자들은 철학적 부분에서 막히니까 그 쪽은 논외로 하고 과거 동양철학 쪽에서 훈민정음의 내용을 이해하려던 학자들은 언어학적 분석을 논외로 하니 말이다.

이렇듯 해례본의 모음자 해설이 현대의 음성학적 서술과는 상이한 부분이 있으므로, 당시 모음자의 음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외국어 전사 자료를 동원하곤 한다. '사성 통해', '번역박통사', '사성통고', '해동제국기', '조선관역어' 등 당대 중국어, 일본어, 유구어 학습서, 혹은 조선어 음차 표기가 실려 있는 중국 서적들에 나오는 표기를 참고하면 당시 한글의 모음자 발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례본의 모음자 설명에 이런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철학적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위 해설에도 나와 있듯이 '설축(舌縮)', '설소축(舌小縮)', '설불축(舌不縮)', '구축(口蹙)', '구장(口張)'과 같은 용어가 등장하는데, 각각 '혀가 오그라짐', '혀가 조금 오그라짐', '혀가 오그라지지 않음', '입(술)이 오므라짐', '입(술)이 펴짐'의 의미다.

그런데 설축, 설소축, 설불축의 '축(縮)'은 현대 음성학에서의 "혀의 전후 위치(전설 모음~중설 모음~후설 모음)", "혀의 상하 높이(고모음~중모음~저모음)" 그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독특한 기준이다. 그리고 '구축', '구장'은 그나마 "원순 모음"과 "비 원순 모음"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기는 하지만,[16] 'ㆍ, ㅡ, ㅣ'는 구축에도 구장에도 포함되지 않으므로 모든 모음을 원순과 비 원순으로 나눌 수 있는 현대 음성학의 기준과는 역시 차이가 있다 하겠다.

대강 '설축'은 혀가 깊이 오그라드는 후설 중모음(ㅗ), 중설·후설 저모음(ㅏ·ㆍ),[17] '설소축'은 혀가 덜 오그라드는 중설·후설 고모음(ㅡ·ㅜ), 중설 중모음(ㅓ),[18] '설불축'은 전설 고모음(ㅣ)을 의미하는 듯하고,[19] '구축'은 원순 모음, '구장'은 비 원순 모음인 듯하다. 그러나 논저마다 당대 모음들을 모음 사각도로 배치한 결과가 판이한바, 아직 딱 떨어지는 정설이 없다…. 당대 음가에 대한 음성 자료가 없고 문헌만 존재하는 형편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 그런데 국어사 전체를 놓고 보면 한글 창제 이후의 국어 음가 추정은 그나마 쉬운 편이다. 한자를 이리저리 끌어다가 표기해 둔 고대 한국어의 음가는 정말 답이 없다. 고대 한국어 참조.

일단 훈민정음의 모음 설명에 근거하여 현대 음성학에 부합하는 모음 사각도를 그려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고 생각된다. [ ] 속 국제음성기호는 추정치. 물론 추정치이니만큼 완전한 정설은 아니다(이 사각도와 달리 ㅡ가 [ə]였고 ㅓ가 [e]였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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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입을 벌리는 정도
ㅏ,ㅗ,ㆍ양성모음크게 벌림
ㅓ,ㅜ,ㅡ음성모음작게 벌림
ㅏㅓㅏ 입술을 크고 힘없이 벌림(비원순)→ ㅓ 입술을 작고 힘없이 벌림(비원순)[20]
ㆍㅡㆍ 입술을 중간 크기로 약간 힘주어 벌림(비원순)[21]→ ㅡ 입술을 양옆으로 약간 길게 당긴 채 약간 힘주어 거의 다뭄(비원순)
ㅗㅜㅗ 입술을 작지만 동그랗게 앞으로 내밀고 힘주어 오므림(원순)→ ㅜ 입술을 작지만 동그랗게 앞으로 내밀고 힘주어 아주 작게 오므림(원순)

아닌 게 아니라, 혀가 제일 안쪽으로 오그라진 설축, 덜 오그라진 설소축, 완전히 펴진 설불축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려지기는 한다. 이 각각의 세 부류에 모음 기본자인 ㆍ, ㅡ, ㅣ가 천, 지, 인의 순서대로 배치되는 것. 즉 혀를 안쪽으로 오그렸다가 차차 펴면서 내는 음가를 기본자로 삼은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늘이 자시에 먼저 열리고, 땅이 축시에 열렸으며, 사람은 인시에 생겼다는 성리학적 자연관이 반영된 듯하다.) 그 후 ㆍ에서 입을 오므리면(구축) ㅗ, 입을 펴면(구장) ㅏ가 되며, ㅡ에서 입을 오므리면(구축) ㅜ, 입을 펴면(구장) ㅓ가 된다. 여기까지가 점 하나씩을 더한 초출(初出). 그 다음으로 점 둘씩 더한 재출(再出)자인 ㅛ, ㅑ, ㅠ, ㅕ가 있는데, 이는 구축과 구장을 거친 초출자 ㅗ, ㅏ, ㅜ, ㅓ 앞에 반모음 y[j]가 더해진 이중모음이므로(해례본 설명에도 'ㅣ에서 시작되고'라고 나온다.) 사각도에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

ㆍ는 본래 당시 국어 모음 체계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음양 이론을 무리하게 대입했기에 만들어진 인위적 모음(!)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오늘날에 ㆍ모음이 소멸된 것(사실 소멸된 것이 아니라 제주어 등에 그대로 남아있다)은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다는 것. 이에 따르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중세 국어의 단모음은 'ㅏ, ㅓ, ㅗ, ㅜ, ㅡ, ㅣ[a, e, o, u, ə, i]' 여섯 개였다.[22][23] 이 여섯 개 중 'ㅏ, ㅓ, ㅗ, ㅜ[a, e, o, u]'를 일종의 음양 대립으로 보아 ㅣ를 중심 모양으로 양 옆으로 점을 찍어 양성 모음 ㅏ[a]와 음성 모음 ㅓ[e]를 상정하고, ㅡ를 중심 모양으로 위아래로 점을 찍어 양성 모음 ㅗ[o]와 음성 모음 ㅜ[u]를 상정하였다. 그 다음 남은 'ㅡ, ㅣ[ə, i]' 중 ㅣ[i]를 중성 모음으로 설정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ㅡ[ə]를 음성 모음으로 설정하고 나니, 이에 대응하는 양성 모음이 없는(…) 것. 그래서 인위적으로 ㆍ[ʌ]를 가정하고 이를 양성 모음이라고 해석했다는 견해인데, 이게 옳다고 본다면 아무래도 새로 글자를 만드는 시점이었으니 그나마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상 가능하다시피, 표기가 한 번 고정되고 나면 새로운 음소나 기호를 덧붙이는 일이 굉장히 어렵다. 물론 이 역시 확고한 정설은 아니다….

솔직히 중간 중간 나오는 오행이나 삼재 같은 개념만 무시하면 그냥 간단하게 음운론이거나 글자 사용하는 매뉴얼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긴 한데 사용법이 아닌 내부 구조까지 이해하려면 결국 언어학적 분석과 함께 그런 동양철학의 개념이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 기본자까지는 어찌어찌 설명한다 해도, ㅗ, ㅏ, ㅜ, ㅓ의 초출자에 담긴 의미가 매우 어렵다. 하늘(ㆍ)과 땅(ㅡ)이 어우르고… 우주(ㆍ)의 작용이 사람(ㅣ)을 기다려 이루어지고… 무슨 말인지?

그 중 특히 모음에서 철학적 설명이 많은데, 이는 아마 자음에 비해 분석이 용이하지 않아 그런 듯하다. 실제로 모음에 관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 진 건 X선을 이용해 구강 구조를 관찰할 수 있게 된 이유였다. 그에 반해 X선 그런 거 없던 15세기에는 알다시피 신하들 입 벌리게 해서 연구했다. 언어학적으로 설명이 힘들 수밖에.

위에서 인용된 부분은 훈민정음해례본의 제자 원리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이지만 여기에 여러 가지 부가 설명들과 적용 용례들이 추가되어 있다. 일단 그런 부분들 중 어학적인 내용에 직접적으로 대응되지 않는 것들은 국어학자들에게는 사실상 무시되고 있다. 위에서처럼 철학적인 풀이를 무시하고 언어학적인 측면만 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언어학적 분석과 철학적 해석이 어떻게든 관련을 맺은 상태에서 제자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철학적 내용을 이해한 상태에서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내리는 것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과학문(언어학, 국어학)의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애써 무시하는 것과는 차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할 경우에 많은 부분들이 적절하게 이해되긴 하지만 여전히 100% 언어학적인 설명만으로 제자원리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어학계에서도 제자 원리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까지 완벽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제자 원리에 대해서 아직도 미해결된 부분이 일부 남아 있다. 각종 떡밥이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이다. 단, 이런 미해결된 부분이라는 것은 발음기관의 상형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이며 발음기관의 어떤 모습을 어떻게 시각화한 것인가? ㅅ이 치열을 나타낸 것이냐 이빨의 단면을 나타낸 것이냐 등과 같은 문제. 초성자(자음자)와 중성자(모음자)를 구성하는 기본자들과 거기에 부가되는 각각의 획이 언어학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는가아닌가 등의 세밀한 부분에 관한 문제. 기본자에 부가되는 획이 특정한 음운적 자질에 해당하는 것인가 그것과는 다소 다른 청각적인 상대적 세기에 해당하는 것인가, 모음을 구성하는 기본자나 그 기본자들의 결합방식이 어떤 음운론적 해석에 대응되는가와 같은, 정말 전문가들이나 관심 있어 할 문제들. 박사 논문에나 나올 이야기이므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넘사벽급인 문제들이다.

3 제작자는 누구인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집현전 학자들이 다 만들고 세종대왕은 이라는 이유로 상사가 프로젝트에 이름 걸치듯이 자기 이름으로 배포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세종대왕 본인이 직계가족들과 함께 작업했거나 어쩌면 정말 혼자서 비밀리에 만든 프로젝트였다.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이다. 명심하자. 어제(御製)다. 임금이 직접 만들었든 누굴 시켜서 만들었든 상당히 참견을 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말씀되시겠다. 그리고 당시의 여러 정황상 세종이 혼자서 만든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24] 최소한 소수정예 인원이 참여하는 비공식 프로젝트프로젝트 매니저이자 최일선 실무자로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분명하다. 직계가족들이 관여했을 거라는 것도 가정일 뿐, 확실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이러한 방대한 작업의 확실한 참여 기록이 없다는 것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일부러 밝히는 경우야 말할 필요도 없고, 의도적으로 은닉하였더라도 대개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명백한 참여 증거들이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아직까지도 한글의 제작자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근거를 지닌 무수한 추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일단이 아래이다.

세조 6년 5월 28일 기사에 예조에서 《훈민정음》·《동국정운》·《홍무정운》을 문과 초장에서 강할 것 등을 아뢰어 따르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선왕(先王)께서 손수 지으신 책이요,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洪武正韻)》도 모두 선왕께서 찬정(撰定)하신 책이요-라는 대목이 나온다. 정조 7년 7월 18일 기사에 수레·벽돌의 사용, 당나귀·양의 목축 등 중국의 문물에 대한 홍양호의 상소문이 실려 있는데 이 상소에서도 오직 우리 세종대왕께서 하늘이 낸 예지(睿智)로 혼자서 신기(神機)를 운용(運用)하여 창조(創造)하신 훈민정음(訓民正音)은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어라, 이거…

단, 죽산 안 씨 족보에는 세종대왕의 둘째 공주가 대군들이 풀지 못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잘하여 노비 수백을 상으로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게 기록된 이유는 그 공주가 죽산 안 씨 가문으로 출가했기 때문. 족보에 실렸다는 이 내용은 문제가 많다. 상으로 노비 수백을 내릴 정도라면 개국공신, 반정공신 급 정도는 돼야 받을까 말까 한 비현실적으로 큰 상이다. 왕실의 재산에 타격을 줄 정도다. 이 정도의 큰 상을 받을 정도면 실록에 실리지 않을 수 없으며, 세종대왕의 정치 스타일 상 이렇게 상을 남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다. 사실 여부가 의심스럽고, 사실에 들어맞는 부분이 있더라도 후대에 어떤 이유에선지 엄청난 왜곡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거기에 성삼문이 쓴 직해동자습 서문에서 훈민정음은 세종과 문종의 작품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고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편찬한 것이라거나 운회를 정리하는데 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참여한 것을 보면 이 세 명은 적어도 창제 이후의 검증 작업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실록의 관련 내용 참고). 집현전 학자들은 이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정황상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온전히 비밀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창제 과정에서도 집현전 학자들이 보조 연구원의 형태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주도적인 역할은 어디까지나 세종대왕이다. 집현전 학자들은 나중에 훈민정음을 가지고 한자음을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물론 소장파만. 나름대로 오래 근무한 사람들은 반대하다가 세종에게 열심히 까이는 역할을 맡았다(?).

세종 본인이 언어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어렸을 때부터 학식이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수준은 집현전 학자들의 수준을 능가하며, 학자들과의 토론에서도 지지 않았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제작에 절대적으로 반대했다.[25]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훈민정음의 보급을 국가의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계획으로 확대하려는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최만리, 정창손을 필두로 한 일부, 하지만 집현전의 중심에 서 있는 대세 급의 집현전 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세종은 이들을 불러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 뜻이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후략) ㅡ 세종26년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이라며 신랄하게 이들의 주장을 비판했으며 특히 정창손에게는 "에라이 쓸모없는 선비 놈아!"라고 제대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 단, 세종실록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정창손은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삼강행실도 간행사업이 쓸모없는 일이었다는 비판을 대놓고 한 것까지 더해져서 세종의 노여움을 더 크게 산 것으로 보인다(조선왕조실록 해당 기사).

훈민정음의 제작에 관해 또 다른 설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신미대사[26]가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신미대사는 범어[27] 의 전문가로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세종대왕이 업무로 바쁜 와중에 어린 자식들만 데리고 아무런 전문가의 도움 없이 훈민정음을 만들 수는 없는데 유학자들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대했다는 점에서 숨겨진 전문가가 있을 것이라는 점,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세종대왕이 처음으로 이 새로운 체계를 바탕으로 지은 글 세 편(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중 두 편(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이 불교에 관한 것이라는 점 등을 든다. 이들은 억불숭유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에서 승려가 국정에 중요한 역할 하였다는 것을 실록을 비롯한 공식 기록에 남길 수가 없어서 세종대왕의 단독작업으로 모든 공식문서에 기록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밖에도 훈민정음 서문이 불교와 연관 깊은 수인 108자[28]라는 점 등도 든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언어학적 능력과 기획력+신미대사의 전문가로서의 도움+자식들의 도움+집현전 학자들의 (약소한) 도움의 결과물이다.

더 나아가서 불교계 일각에서 신미대사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신미대사가 훈민정음이 창제하기 전인 8년전인 정통 3년(1435년)에 저작한 저서라고 주장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이라는 책을 근거를 들었는데, 그런데 원각선종석보이라는 책은 누군가가 위작한 책이다. 앞에 언급한 것 처럼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에게 자문을 준것과 훈민정음을 전국에 보급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신미대사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링크 그리고 아직 이러한 주장이 학계에서 그리 공식적으로 인정되지는 않는 것 같으니 참고만 할 것.

연산군 시절에 연산군의 악행을 힐난하는 투서가 나돌았었는데, 그것이 한글로 쓰여 있었다. 연산군이 그걸 구실로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구결들도 모조리 수거해 불사르며 한글 말살(?)을 시도했지만 곧 흐지부지되었다. 얼마 뒤에 나온 흥청의 음악 교본도 한글로 쓰여 있었다. 이때가 한글 반포로부터 대략 60여 년이 지난 시점인데, 이 시절에 이미 우리말을 표기할 문자로 한글이 완전히 정착해 있었던 듯하다.

4 사용자는 누구인가?

알려진 것처럼 왕족이나 양반들은 계속 한문을 주요 표기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한글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잘 안썼을 뿐이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유물을 보면 왕족들이 어린 세자나 옹주에게 '언문'으로 쓴 서첩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 이외에는 알려진대로 주로 양반가 부녀자들이 사용했다. 군대에서 암호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국인에게 한글을 알려준 사람을 기밀 유출 혐의로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5 한글의 글자 수 변화

  • 훈민정음 창제 시 초성 17자, 중성 11자, 종성 부용 초성(단 8종성가족용)에 의해 28자. 순경음 비읍(ㅸ)과 지금의 된소리인 전탁자, 거듭 적은 글자들은 인정되지 않는다. 거기에 초출, 재출자를 제외한 합용자 18자(, , ㆇ, ㆊ, ㆎ, , , , , , , , , , , , ㆈ, ㆋ) 역시 인정되지 않는다.
  • 최세진의 훈몽자회(1527)에서는 여린히읗(ㆆ)이 글자에서 완전히 탈락해 있다. 그래서 모두 27자.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완전히 포기한 듯. 그리고 이때 현대까지 쓰일 자모의 명칭과 배열순서가 정해졌다. 그 전에는 자음은 ㄱㅋㆁ(옛이응);ㄴㄷㅌ;ㅁㅂㅍ;ㅅㅈㅊ;ㅇㆆ(여린히읗)ㅎ;ㄹㅿ(반치음) 순서로, 모음은 ㆍ(아래아), ㅡ,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빙글빙글 순이었다.
  •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자음 14자, 모음 10자로 모두 24자. 빠진 것은 모음에서는 ㆍ(아래아. 단 제주 방언에는 아래아의 음가가 변화된 형태로 아직도 남아 있다), 자음에서는 ㆆ(여린히읗), ㆁ(옛이응), ㅿ(반치음)이 탈락한 결과. 이 중에서 옛이응은 IPA 표기상 [ŋ]의 음가를 갖는 글자로, 발음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글자는 ㅇ에 흡수되었다.
  • 소멸한 4개의 낱자 중 ㆆ(여린히읗)이 가장 먼저 소멸하였고 그 다음은 ㅿ(반치음), 또 그 다음은 ㆁ(옛이응)이 소멸하였으며 ㆍ(아래아)가 가장 마지막에 소멸하였다. 이 순서를 '10원(ㆆ)을 갖고 산(ㅿ)에가서 사과(ㆁ)를 사 먹으니 씨(ㆍ)만 남더라.'[29]로 많이 외운다.

현재 쓰이지 않는 글자에 대한 정보는 이쪽을 참고하자.

6 한글의 호칭 변화

이때까지는 이 새로운 문자에 대해 임금인 세종대왕이나 신하들은 모두 이 글을 훈민정음, 혹은 정음 등으로 불렀고 이후 언문(諺文), 언서, 반절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 외에 암 클(암컷(…)이 쓰는 글), 중 글(중, 즉 승려들이 쓰는 글. 정작 승려들은 불경 때문에 한문에 빠삭했다), 상말 글(상놈들이 말하는 것을 적는 글 혹은 상스러운 말을 적는 글)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다만 한글이 이렇게 천시 받는 상황이 바로 세종이 의도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 이 정도까지 천시되지 않았다면 앞서 말한 '왕이 직접 만든 문자' 버프에다가 양반들 한문 공부에도 한글이 무지막지하게 도움을 주는 점이 겹쳐 한글마저 양반이 차지하려 했을 것이고 그러면 향촌 사회에서 한글에 대해서 일종의 정보 통제를 실시했을 거라는 것. 이렇게 밑바닥까지 천시되었기 때문에 양반이 다루는 학문 체계에서 열외되었고 그에 의해 서민들에게 잘 퍼졌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훈민정음에 적힌 세종이 직접 만든 서체는 (이른바 교양 있는 양반들의 필기구인) 으로 적히기 매우 힘든 형태였고, 서민들이 부지깽이나 나무막대기 등등으로 대충 끼적이는 형태로 필기해야 제대로 필기할 수 있는 형태였다. 세상에 이쯤되면 진짜 하늘이 내신 분이라는 것도 모자라는 듯 하다(...)

이렇게 조선 시대의 상류 사회에서는 한글의 대우가 박했으나 서포 김만중이 국서(國書)라고 언급하기도 했을 정도로 세간의 인식이 아주 푸대접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후의 조선 왕들 본인부터가 왕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도 한글로 썼고, 실생활에서도 한글을 사용했다. 왕족과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당시 상류층들이 서로에게 보낸 편지나 메모 같은 것이 많이 남아 있으며 한글 소설은 양반들 사이에서도 읽혔다. 물론 사회 하류층도 계속해서 애용했다. 그러다가 근대화 과정, 특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주체적인 문자라는 의미를 주기 위해 국문(國文)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한글이라는 호칭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이다. 대개는 주시경이 만든 명칭이라고 알고있지만, 처음 한글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13년 3월 23일 주시경이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 朝鮮言文會)'을 '한글모'로 바꾼 바 있어서, 이 사실을 가지고 주시경이 만든 명칭이라 추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호칭이 일반화된 것은 1928년 조선어학회가 1926년에 제정했던 가갸날(훈민정음 반포 기념일. 음력 9월 29일)을 한글날이라 고쳐 부르면서이다.

7 디자인의 변화

현용 한글은 모양이 어느 정도 미학적으로 재구성 되었으나,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은 정말 동그라미, 세모, 네모, 선, 점이라는 단순한 구성으로만 되어 있고 여기에 딱 구분이 갈 만큼만의 베리에이션이 존재한다. 물론 이런 극도의 추상적인 디자인 또한 미학에서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형태는 다른 표음 문자에선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노마 히데키 교수는 《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김지아, 김기연, 박수진 옮김)에서 이 간단한 모양은 무식한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같은 번거로운 서예 도구를 쓰지 않고도 문자를 쓸 수 있도록 하려는 뜻이었다고 주장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적거리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문자 생활에 문제가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 만들어진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한글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서서히 변천해 왔다. 장식적으로 변하고, 모양이 다양해지며 한 자모에 대해 여러 가지 형태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건 어떤 문자건 마찬가지다. 소문자 a만 해도 통용되는 모양이 두 개다. (a, α)

  • ㄱ: ㄱ은 본래 수직으로 꺾어진 모양이었으나, 궁서체나 중성 ㅏㅐㅑㅒㅓㅔㅕㅖㅣ와의 조합에서는 숫자 7, 가타카나 후(フ)자와 비슷하게 휘어진 모양을 가지게 된다.
  • ㅋ: ㅋ은 본래 ㄱ의 안에 수평선이 더해진 모양이지만, 7 위에 수평선이 더해진, 가타카나 라(ラ)자와 비슷한 모양도 나타났다.
  • ㅌ: ㅋ과 비슷하게, ㄷ 위에 가로줄을 긋는 형태가 생겨났다. 특히 이는 북한에서 애용하는 듯하다(문화어 참고).
  • ㅅ: ㅅ은 본래 좌우대칭이지만, 궁서체에서 사람 인(人)자와 비슷한 좌우 비대칭 형태가 나타났다.
  • ㅈ: ㅈ은 본래 3획이었으나, 가타카나 스(ス)자와 비슷한 2획 형태가 나타난다.
  • ㅊ: 본래의 ㅊ은 ㅈ의 위에 점을 찍은 모양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점이 수직선, 수평선 등으로 바뀌었다.
  • 점이 선으로 바뀜: 모음, 자음에는 본래 점을 사용했으나 대부분의 점이 짧은 선으로 바뀌었다.

8 한글을 이용한 한국어, 외래어, 외국어 표기의 역사

한글에 관한 세종대왕의 꿈은 상당히 원대하여서, 세종대왕은 당대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그리고 운서 등에서 다루는 고전 중국어 발음과 대응되는 이상적인 한국 한자음을 표기하려는 욕심이 있었다. 정인지는 해례본 서문에서 한글이 '짐승의 소리'와 같은 동물이 내는 소리, '바람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까지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는 '당시 음운론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소리'를 나타내는 표기법(이라기보다는 발음 기호)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한국어 표기 실험은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의 한글 언해 문헌을 통해 이루어졌다.

문제는 원대한 목표와는 달리 입수할 수 있었던 자료가 부족하거나 부실했다는 점이다.

중국어 표준 발음의 표기는 명나라의 국정 발음 사전인 홍무정운에 훈민정음으로 발음 표기를 추가한 홍무정운역훈을 통해 하려고 했다. 문제는, 원본인 홍무정운에 실린 발음 자체가 당시 중국어의 실제 발음이 아니라 고전 중국어 발음과 당시 중국 각 지역의 발음을 절충한 어중간하고 비현실적인 발음이었다는 것. 그래서 홍무정운은 중국 사람들에게도 죽도 밥도 아닌 발음이라고 까였다. 카피는 잘 했는데 원본 자체가 부실했던 것.

동국정운은 훈민정음으로 이상적인 한국 한자음, 즉 이상적인 외래어 표기를 위한 지침서로, 세종이 벌인 희대의 덕후질이다. 그러나 현실 한자음(= 외래어 통용 발음)과의 차이가 너무 컸고 동국정운 식 표기를 익히기도 어려워 사대부 층에서도 동국정운 식 표기를 포기, 결국 흑역사가 되었다.

의 경우, 고전 중국어의 발음에서는 받침에 오는 ㄹ이 없고 그 음이 에 가깝다는 것을 표기하기 위해 한국 한자음의 유음인 ㄹ의 발음이 흘러가는 것을 막는 역할, 즉 안울림소리인 입성을 표기하는 보조 기호의 용도와 중 고음(고대 한자음)에서 영모(影母, 성문 파열음)를 표기하는 용도로[30]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 중국어에서도 이미 ㆆ와 ㅇ는 구분되지 않고 있었다. 당시 한국어의 현실 한자음에는 초성 ㆆ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이런 현실과 동떨어진 표기 방법 때문에 결국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 가차 없이 ㆆ이 삭제되고 만다. 물론 그 전에 – 1465년에 간행된 <원각경언해>에서부터 쓰이지 않았다 – 없어진 셈이지만 확실히 삭제된 것으로 표기된 것은 이게 처음이라… 비슷한 시기(보통 15세기 중엽, 세조대로 추정한다)에 실전된 순경음 비읍(ㅸ)과는 달리 그 흔적도 남기지 않은 소멸이었다. 반치음(ㅿ)은 16세기까지도 여전히 각종 표기에 활발히 사용되지만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정도에 사실상 표기에서 사라졌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래어 표기법을 널리 보급하는 일은 국가의 힘으로도 어려운 듯.

동국정운 식 표기를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중국어의 치음 표기를 위해 왼쪽과 오른쪽 길이가 짧은 ㅅ, ㅈ 등을 만든 것은 외래어 표기할 때에 f나 v는 중요한 발음이니까 별도의 글자를 만들고 정확하게 발음해 주자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입성을 표기하기 위해 '이영보래'의 규정을 도입한 것은 girl의 rl은 우리말로는 정확하게 발음하기 힘들지만 gull이라는 단어와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거을'로 표기하고 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겠다.

나중에는 조선에서 주변 나라 언어를 배우기 위해 펴낸 교재의 발음 표기에 이를 사용하여,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 소리에 대응하는 표기법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우리들은 세종대왕이 만든 형태 그 자체가 아니라 주시경의 영향 하에 조선어학회에 의해 완성된 한국어 표기법, 즉 20세기의 국어학자들이 현대 한국어 표기에 더 최적화해서 만든 – 현대 한국어의 말소리에 대응되면서 동시에 말소리 그 자체보다는 형태소의 일관성을 좀 더 잘 보여 주는(이른바 끊어 적기, 분철) – 한글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한국어는 말소리 자체에 글자가 그대로 대응되게 구현하는 것형태소(의미의 기본 단위)의 형태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동시에 만족시키기가 다른 언어들보다 꽤 어렵게 되어 있다.

장사꾼왠지 갓길에서 며칠이고 몇 달이고 궂은 날씨에 상관없이 굳이 그 자리에서만 "떡 . 오늘 갓 만듦. 맛있는지 맛없는지 직접 확인하시오."라는 간판을 세워 두고 떡을 파는데, 불법 영업이라서 단속반이 좌판을 들어내려 하면 웃통을 벗어 문신을 드러내며 저항하곤 해서 단속의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하 내용 없음. 보고 끝.

현재도 한글 표기 규정에 예외나 불규칙적인 측면이 많이 존재하는 것은(예: 두음 법칙, 겹받침, 사이시옷) 다 한글이 아닌 한국어 탓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정작 현대 한글로는 모든 현대 한국어에 존재하는 음소를 표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귀었다', '바뀌었다' 등의 단어를 빨리 발음할 때 한 음절로 줄어들어서 나는 ㅟ+ㅓ 발음 등이 있다. 하지만 한글에, 심지어는 옛한글에마저 ㅟ와 ㅓ의 합자는 없다. 참고로 ㅟ는 원칙적으로 전설 원순 고모음([y])을 나타내는 모음자로, 단모음이다. 단지 이중 모음으로 발음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심지어 아나운서마저도!) 국립국어원마저 포기하고 이중 모음 식 발음 [wi]도 허용된 것뿐이다.

또 남부 사투리나 강원도 사투리에 존재하는 ㅣ+ㅡ 발음도 한글로는 표기가 안 된다. 한글 우월론자들은 이런 것, 혹은 외국어 발음 또한 옛 훈민정음 식 표기를 하면 모두 표기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무리다. 해례본의 이론에 따라 새로 자모를 만들고 보조 기호도 새로 만들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현대 한국어 화자들은 발음 습관이 굳어져서 올바른 음가를 발음하지 못한다. 한국어도 바뀌어 음운 체계가 바뀌는데, 세종이라고 해도 그 모든 미래까지 예측하여 문자를 만들기란 예언자가 아닌 한 불가능하다. 훈민정음은 어디까지나 세종 당시의 조선말(과 세종 당시의 중국어 표기)만을 염두에 둔 글자라,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저 억지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지구상에서 모든 언어와 발음을 표기하는 문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영어 사전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국제음성기호를 들 수 있겠다.
한국인 대부분이 모르는 사실.

9 한글의 기원에 대한 논란: 다른 문자를 직접 계승했거나 적어도 큰 영향을 받았다?

한글(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였다.

9.1 파스파 문자 영향론

세종실록에는 '字倣古篆(글자는 '古篆'을 본 땄다)'이라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인 해석은 '고전 전서체의 상형 방식(또는 글씨체)을 본 땄다'이다. 컬럼비아 대학의 한국학 교수인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는 고전(古篆)이 몽고전자(蒙古篆字), 즉 원나라의 공용문자였던 파스파 문자('Phags-pa script)를 가리키는 것이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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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자음 ㄱㄷㅂㅈㄹ는 각각 발음이 비슷한 ꡂ [k], ꡊ [t], ꡎ [p], ꡛ [s], ꡙ [l]을 단순화한 형태이며, ㄱ, ㄷ, ㅂ, ㅈ에 획의 변화를 가해 유기음 ㅋ, ㅌ, ㅍ, ㅊ을 만들었고, ㄷ, ㅂ, ㅈ에서 한 획씩 지워 비 파열음 ㄴ, ㅁ, ㅅ을 만드는 식으로 한글의 자음이 제작되었다는 이론이다.

고 유창균 교수, 미국의 게리 레드야드 교수나 몇몇 몽골인 교수 등이 이 설을 주장한다.(그러나 이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일 뿐이고 그것마져도 토론의 대상이 되니 단순한 설로 보는게 맞다) #

단, 게리 레드야드는 한글은 파스파 문자의 영향과 독자적 요소가 혼합되어 탄생되었다는 입장이다. 즉, 자음은 파스파 문자에서 따왔으되 ㅇ과 모음은 세종의 창작이라는 것.

파일:B1l0dvs.png

(왼될게겐 자나바잘)

데바나가리 문자의 종성(사실 거의 모음으로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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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욤보 문자의 종성

파일:GXfI1rk.png
또한 반대로 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이 이후 1686년 몽골인 자나바잘(zanabazar)에 의해 만들어진 몽골 소욤보 문자의 모아쓰기 방식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31] 소욤보 문자의 모아쓰기 방식에 따르면 20개의 자음과 14개의 모음을 조합하여 이론적으로 4,000여 개의 음절을 만들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32], 이는 현대 한글이 이론적으로 표기할 수 있는 총 11,172개의 대략 3분의 1정도이다. 다만 한국어에서도 모두 11,172개의 음절을 모두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실제로는 약 2000여개 정도만 사용) 몽골어에서도 마찬가지로 4,000여 개의 음절을 모두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1]

9.2 그 외 학설

창작자가 세종이라는 것은 틀림없으나,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는 구절을 가지고 인도의 범자나 한자의 전서체(篆書體; 도장 때 쓰는 모난 글자)가 기원이라거나, 심지어는 창틀 모방설이 나오기도 했다.

1940년대에 처음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안동본이다. 이 안동본이 위서라느니 하는 말이 있었으나 완전히 같은 내용의 상주본[33]이 최근 언제? 다시 발견된다.

일본에서 신대문자라는 한글과 비슷한 문자가 있어 한글은 이것을 모방한 것이라는 설, 가림토라는 고대문자가 있어서 한글은 이것의 모방이라는 설은 한일 유사역사학계에서 나온 떡밥이며, 현재 학계에서는 논의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로 여겨지나, 인터넷 돌다 보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제 때 일본에서 한글의 위치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일본 내에서도 신대문자는 날조한 것으로 까이고 있다.[34]

요물의 시체에서 등 모양을 보고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소설 이야기.

그 이외에 한자 기원설, 구결과 같은 전통 차자표기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학계에서 다루어지는 떡밥이다. 대부분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용을 부정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한자나 차자표기가 부분적으로 꽤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의외로 국어학계에서 꽤 유명한 학자들 중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주변 나라의 모든 기존 문자들을 모아서 그 장점을 참고했을 것이니 아이디어 수준의 영향은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실제로 글자를 쓰는 순서, 즉 획순은 한자의 영향을 받은 게 보인다.

9.3 다른 언어권의 글자 중 우연히 한글과 닮은 꼴들

  • 자음
Г(키릴문자, 그리스문자)
Ն(아르메니아 문자)
ད(티벳문자)
ལ(티벳문자)
口(한자), ם(히브리문자)
Β.Б(로마자,키릴문자,그리스문자)
人(한자)
π(그리스문자)

પ નુલુંગ લસશ

B/b ≒ ㅂ
I/i ≒ ㅣ

Г/γ ≒ ㄱ(감마, gamma)
Β/β ≒ ㅂ(베타, beta)
Ι/ι ≒ ㅣ (이오타, iota)
Π/π ≒ ㅍ(파이, 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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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б ≒ ㅂ(베, be)
Г/г ≒ ㄱ(게, ge)
П/п ≒ ㅍ(빼, 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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ם, מ ≒ ㅁ(멤, mem)

Ն/ն ≒ ㄴ(누, 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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ལ ≒ ㄹ(라, la)
ད ≒ ㄷ(다, da)

口(입 구) ≒ ㅁ
齒의 ㅅ 부분 ≒ ㅅ

  • 기타: 국제 음성 문자

ɨ (i에 가로줄이 쳐져있는 형태) ≒ ㅡ
초성에 오는
음가 없는 한글 'ㅇ'(zero consonant) ≒ '◌', 인도계 문자나 히브리 문자에서 자음이 없을 때 모음을 설명하기 위해 자음 부분에 가상으로 설정한 동그라미

파일:CIvvrY8.gif
  • 모음

히브리 문자의 niqqud

파일:CUV4M84.png

중남미 문명에서 사용하던 숫자 기호, 주로 마야 문명 쪽에서 사용된 20진법 숫자 기호(숫자 기호로서의 모양은 '산가지' 셈법의 모양과 유사하다.)

파일:Y5W9l6H.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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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를 그대로 해석하면 ㄹ은 혀 모양이 ㄹ 모양으로, ㅿ은 이 모양이 ㅿ 모양으로 된다는 건데(...), 이건 아예 말이 안 되고 그냥 설음과 치음의 기본음이 되는 ㄴ과 ㅅ을 모양의 베이스로 삼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2. 강모음
  3. 천하대장군, 거대한 하늘
  4. 아래아를 기반으로 모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아래아를 다른 모음에 비교하여 어떤 것에 치우치지 않는(입을 완전히 벌리거나 완전히 다물거나 오므리거나 하지 않는) 중립적인 모음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어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schwa모음 ə이 이에 해당한다.
  5. 중모음
  6. 지하여장군, 자연
  7. 약모음
  8. 가장 연약한 존재
  9. 원순 모음
  10. 비 원순 모음
  11. 둥그렇게 벌려서 발음하는ㆍ가 입을 강하게 다물려는 특성을 띈 ㅡ를 만나 더 작고 확실히 동그랗게 오므리는, ㆍ+ㅡ→ㅗ
  12. 약하게 다물면서 발음하는 ㅣ가 입을 둥그렇게 벌리는 ㆍ를 만나 동그랗게 벌리는, ㅣ+ㆍ→ㅏ
  13. 양옆으로 강하게 다물면서 당기는 ㅡ가 입을 둥그렇게 하는 특성을 띈 ㆍ를 만나 다문 채로 동그랗게 오므리는 ㅡ+ㆍ→ㅜ
  14. 둥그렇게 벌리며 발음하는ㆍ가 입을 약하게 다물려는 특성을 띄는 ㅣ를 만나 ㆍ보다 더 작게 벌리는 ㆍ+ㅣ→ㅓ
  15. ㅣ 발음과 ㅗ 발음을 연이어 하는 발음이라는 뜻이다
  16. 위 해례본의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여덟 자 중 '합(원순 모음)'은 '구축'인 ㅗ, ㅜ, ㅛ, ㅠ에 해당하며, '벽(비 원순 모음)'은 '구장'인 ㅏ, ㅓ, ㅑ, ㅕ에 해당한다.
  17. 이 세 모음은 모음조화에서 양성 모음으로 분류된다.
  18. 이 세 모음은 모음조화에서 음성 모음으로 분류된다.
  19. 이 한 모음은 모음조화에서 중성 모음으로 분류된다.
  20. 영어의 schwa발음 /ə/ 이다
  21. 현대한국어의 ㅓ발음이다
  22. 여기서는 ㅡ가 [ə]였고 ㅓ가 [e]였다고 본다.
  23. ㅡ[ə]는 고대 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던 모음이었는데, 중세 국어 시기에 들어 음절 말 자음(받침)을 명확히 발음해 주기 위해서 추가된 음소로 본다. 예를 들어 '먹-'이라는 어간 뒤에 '-며'라는 어미가 오면 발음이 동화되어 [멍며]가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ㄱ'를 확실하게 발음해 주기 위한 새로운 중성적 모음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ㅡ'이었다는 것. 이를 추가하면 '먹으며[머그며]'가 되어 'ㄱ'가 유지된다.
  24.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자료 수집 량이 개인이 모으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하다는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단 세종이 주도하면서 신하들에게 자료 수집 등 보조하게 하는 형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제자 시켜서 자료 수집해 오는 것처럼.비유가 적나라하다....
  25. 신숙주 등의 소장학파들은 예외)
  26. 세종의 총애를 받은 승려로서 세종이 승하하면서 유언으로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 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를 볼 때에도 왕이 이렇게 법호를 내리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참고로 신미대사의 동생도 세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동생은 김수온이라는 유학자로 병조정랑, 지영주군사, 판중추부사, 호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제수했다고 한다.
  27. 범어(梵語), 고대인도 말, 산스크리트어를 말한다.
  28. 불교에서 인간의 모든 번뇌가 총 108가지라고 한다.
  29. 국어 강사로 이름 날렸던 서한샘의 강의에서 나왔다.
  30. 한자음에서 초성의 ㅇ은 이모(以母, 경구개 접근 음)와 운모(云母, 유성 연구개 마찰음으로 추정)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31. 다만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The syllabic system in fact appears to be based on Devanagari'(해석: 소욤보 문자의 음절 구조가 데바나가리 문자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글을 통해 한글 모아쓰기 또한 데바나가리 문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희박하게나마 존재한다. 특히 파스파문자라든지 티벳문자, 기타 동남아 계열 문자(크메르 문자, 태국문자, 미얀마 문자 등)가 모아쓰기라는 개념이 거의 없는데, 유독 인도에서 쓰이는 인도계 문자(데바나가리 문자, 구자라티 문자 등)들은 끝자음 m, l, r 등을 자음 문자 밑이나 위에 쓰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바나가리 문자에서는 m,l,r만 제한적으로 사용하였지만 소욤보 문자에서는 g,k,d,n,b,m,s,l 등을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32. In theory, 20 consonants and 14 vowels would result in almost 4000 combinations, but not all of those actually occur in Mongolian
  33. 다만 이것은 소유주와 점유자의 분쟁 속(10년 이상 되었다)에 최근 화재로 행방이 더욱 묘연해졌다.
  34. 일제 시절에 처음 등장한 것은 맞지만, 신대문자를 주장한 이들이 주로 사이비교단에 소속되어 있어서 이미 당대에 일본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35. 애초에 그리스 문자에서 유래했던 문자이다.